41호2011년 [시-박명자] 눈 내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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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밤
불면의 긴 밤
좀 생산적인 수작업을 하기로 했다
다락에서 헌 물레를 찾아 내리고
밤 깊도록 나는 새 목화솜을 돌려
이상한 루머의 피륙을 줄줄이 풀어 내렸다
어느새 방 안에는 흰 무명 실타래가
화안히 꽃잎 지듯 쌓이고 포근포근 1.5m의
멈춤이 없는 무명깃의 부피는 나의 고독을 덮어주고 있었다
그 무렵 목이 핼쓱한 소녀 하나가 창밖에 지나갔다
휘파람을 불어 나는 침실로 소녀를 유혹했다
소녀는 흰 램프를 들고 최초로 나에게 다가오고
그녀의 흰 너울을 열고 핏기 없는 발목을 눕히고
우리는 터진 솔기 속에서 합일을 이루었다
나는 밤새도록 헌 물레를 돌리고
소녀는 무명 피륙에 <설경산수도>라는
자수를 한 땀 한 땀 놓을 때
나의 세포들은 그녀의 자수 속에서 달콤하게 놀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소녀는 금싸라기 햇살을 만나자 찬 손을 공손히 내리고
스르르륵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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