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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2012년 [소설-강호삼] 빙하기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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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55회 작성일 13-01-0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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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에서 소위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것은 퇴직하고 나간 판검사에게 그들의 후배 판사나 검사가 그 사건을 맡은 선배 변호사에게 사건을 몰아주고 사건의 사실관계가 어떻게 되었건 간에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유리하게 선고하거나 승소판결을 내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21세기의 선진 민주주의를 국가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의 한쪽 보루를 맡고 있는 사법부에 이런 일을 버젓이 저질러지고 그걸 관행이라고 묵인하게 되었는지 기현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거 말이야. 역사와 뿌리가 깊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야.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일제식민 지배를 33년 동안이나 받아오지 않았나?”

 

 

“ ………?”

 

 

“그 과정에서 말이야, 우리는 알게 모르게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에 물들게 된 거지. 신분상승을 위해서는 부모들이 배를 곯더라도 자식들만은 가르쳐서 하다못해 면소무소 촉탁이라도 시켜야만 했던 거야. 그 중에서도 신분상승으로 가장 확실한 건 고등고시나 행정고시를 봐서 판사나 검사, 아니면 군수가 되는 것 아니었겠어? 판사나 검사, 군수의 직위가 기본적으로 무엇을 하는 자리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지. 오직 신분상승을 위해서 2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골방에 앉아서 법률서적을 딸딸 외우고 또 외우는 일만을 되풀이 하지. 삼권분립의 민주국가에서서 법이 구현하고자하는 근본적인 이념은 뒷전인체 말이야.”

 

 

두영씨는 재떨이에 담뱃불을 비벼 끄느라 잠깐 말문을 닫았다. 기현씨도 찻잔을 들어 바닥에 남은 커피를 홀짝 마셨다. 커피는 이미 싸느랗게 식어 있었다. 종로 3가의 골목길에 있는 이 다방의 커피는 원두를 갈아서 만든 커피가 아니고 인스턴트커피다. 인스턴트커피는 제조 과정에 따라서 커피 맛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거기에서 거기다. 대신 삶은 달걀 하나까지 끼워서 커피 한 잔에 이천 오백 원을 받는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노인들이 즐겨 이곳을 찾는다. 주머니가 넉넉해도 굳이 이런 다방을 찾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미처 따라 잡을 수 없는 노인들은 현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커피 전문점보다는 이런 다방이 만만하고 마음이 편하다. 낡은 비닐 소파와 벽에 걸려 있는 그림과 자욱한 담배연기까지 칠, 팔십년 대 그들이 장년이었을때의 다방 분위기와 비슷해서 낯설지 않아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기현씨가 30층의 80평 호화아파트에 아무리 적응해보려고 해도 적응을 못하는 것과도 비슷한 심리상태다.

 

 

언제부턴가 종로 2·3가와 낙원상가, 종묘 일대까지 노인들의 쉼터가 되었다. 2가의 탑골공원은 3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고 그 옆의 3가는 남북전쟁 이후 오랫동안 집창촌이 밀집해 있었던 지역이다. 이제 집창촌은 없어졌지만 대로변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뒷골목은 옛날 그대로, 아직도 낡고 허름하고 어둠침침한 그대로다. 그 골목길에 노인들을 위한 식당이 있다. 2·3천원이면 냉면이나 갈비탕, 닭 한 마리까지 먹을 수 있고 2천원이면 하루 온 종일 바둑을 둘 수 있는 기원(棋院)도 있다. 티브이 뉴스까지도 방영된 8천 5백 원으로 이발과 머리염색까지 해결되는 이발소도 그곳에 있다. 칠, 팔십년 대 산업일꾼으로 나라의 눈부신 발전을 주도했던 노인들이지만 이제 집에서도 나라에서도 별 볼일 없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나라에서 준 유일무이한 복지혜택인 무임 지하철을 타고 서울 도처에서 이곳 종로로 몰려든다.

 

 

기현씨와 두영씨도 예외가 아니다. 두 사람은 2주마다, 월요일 오전 열시에 종로 3가 서울 시네마에서 만난다. 이런 만남을 먼저 제안한 것은 두영씨다. 혼자서 모시고 있던 아흔 아홉 살의 치매 걸린 노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달 후에 만났던 자리에서다.

 

 

두영씨는 노모를 돌보기 위해 정년이 몇 년이나 남은 대학교수 자리를 그만 두었다. 노모를 남의 손에 맡기거나 시설에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노모가 의식이 분명하고 당신 일을 스스로 처리할 때까지는 잘 사는 여동생이 모시고 살았다.

 

 

 

 

어느 날부터 노모가 치매 증상을 보이자 여동생의 태도가 달라졌다. 비용은 자기가 부담 할 테니 시설에 맡기자고 주장했다. 대학입시 준비하는 아이들 때문에 도저히 집에서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지만 두영씨는 머리를 흔들었다.

 

 

“안된다. 니 사정은 충분히 이해는 하겠다. 그러나 이제 엄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니? 저엉 그렇다면 내가 모시마.”

 

 

그날로 두영씨는 노모를 정릉으로 모시고 왔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늦게 발견된 유방암으로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노모의 간병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 노모마저 돌아가시자 두영씨는 한동안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다. 성혼한 아들 남매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으로 오지만 그래도 노모가 떠난 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모친을 보낸 후에도 두영씨는 정릉 골짜기 산비탈의 낡은 단독주택에서 혼자 끼니를 끓여 먹으며 살고 있다.

 

 

“우리말이야, 이제 자주 좀 만나자. 자주 만나봤자 우리 죽을 때까지 몇번이나 더 만나겠니?

 

 

“글세…… 그렇네.”

 

 

정말 따지고 보니 그랬다. 한 달에 두 번, 거르지 않고 만난다고 해도 1년이면 스물 네 번이다. 산술적 계산으로는 칠백 이십 번을 더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의술이 발달해서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일흔을 넘기면 앞날을 예상할 수 없는 게 사람의 운명이다. 더구나 비오는 날, 눈 오는 날, 아픈 날, 궂은 날 빼고 나면 앞으로 백번도 만나기 힘들 것이다.

 

 

한 해 겨울을 지나고 나면 주위에 있던 사람 몇씩 사라진다. 등산으로 몸을 단련하며 자신은 백 살까지 너끈하게 살 것이라 장담하던 친구도 심장마비로 운명을 달리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脣亡齒寒) 했던가, 기현씨도 차츰차츰 이가 시려 오고 있는 걸 느낀다.

 

 

두 사람이 만나서 하는 일이란 영화 한편 보고 바로 서울 시네마 옆, 큰 도로 이면골목길로 간다. 폭 1.5미터도 안되는 좁은 골목길이 시네마 쪽에서, 지금은 없어진 국일관까지 200여 미터, 이어진다. 이 골목도 단성사 쪽이나 탑골공원처럼 식당골목이다. 골목 초입에서부터 일본식 우동과 어묵을 파는 집으로 시작해서 순대국밥, 생선구이, 동태 매운탕. 감자탕 등 가지각색의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골목 양쪽에 즐비하다. 점심시간에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어께를 부딪치며 간신히 비켜 지나갈 정도다.

 

 

단성사 쪽 식당에 비해서 이 쪽 식당의 음식의 질이 조금 높은 편이다.

 

 

따라서 음식 값이 상대적으로 조금 비싸다. 비싸다고 해봤자 삼치, 고등어, 조기, 꽁치구이 1인분 가격이 6천 원이다.

 

 

두 사람은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 식당을 골라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바로 헤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미진하면 인스턴트커피 한 잔에 이천 오백 원 하는 모텔 지하의 보리수 다방으로 간다. 그곳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그 땐 그랬지.>하는 식의 흘러간 이야기를 하거나 현실정치를 맹렬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건 니 말이 맞는 것 같아. 요즘 애들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 때는 그랬지. 죽자사자하고 고시 공부에만 매달렸지. 머리는 똑똑하지만 집이 가난한 집 자식들은 그 길만이 유일하게 출세하는 길이었거던.”

 

 

“그렇게 해서 고등고시에 합격하기만 하면 당장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영감님 소리를 듣는 군수나 판검사가 되었지.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어렵게 공부 한 놈일수록 보상심리가 작용해서 겉으로는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니 법이니 뭐니로 번지러하게 치장을 하고, 나라야 어떻게 되던 말든 권력과 이재에 대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가 되는 거야.”

 

 

“그래, 니 말이 맞아. 우리 현대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위 법한다는 놈들이 나라를 다 망쳐 놓았어. 그런 놈들이 국민이 준 권력을 사유물로 사용하면서 국민 위에 군림한 게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 민주국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것으로 공정한 판결은 뒷전에 팽개치고 법을 왜곡해서 승소판결이 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서민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 아니겠어.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 권력이 누구로부터 수임 받았는지는 아랑곳 하지도 않는 거야, 지들끼리 오랜 동안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해왔으니 지금까지 아무도 막지 못했어. 법이 아니라 자기들 이해에 따라서 고무줄이 된게지. 관행적으로 되풀이 한 짓이어서 그 짓이 얼마나 우리사회를 병들게 하고 계층 간에 갈등을 일으키는 부끄러운 짓인지도 모르는 거야. 더욱 가관인 것은 어제그제 임관된 갓 서른을 넘긴 판사라는 자가, 지 애비보다 나이가 더 먹은 일흔이 넘은 피의자에게 하댓말도 모자라 법정에서 훈계까지 하는 세상이 된거야.”

 

 

“세상이 이렇게 된 건 뭐니뭐니해도 이 나라가 일제 33년과 박정희 군사독재정치 30년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모든 것이 왜곡된 결과 아니겠어. 일제 때는 말할 것도 없고, 5·16 군사쿠데타로 군인들이 총칼로 탈취한 정권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정의와 전통적인 가치관이 한꺼번에 깡그리 무너져버렸지. 정의가 왜곡되면서 힘없는 사람들을 기회주의자로 내 몰았어. 입만 쩌억 벌리면 법과 정의를 말하던 그들도 박정희나 전두환, 노태우가 들이미는 총부리 앞에서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칠 수 밖에 없었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선량한 국민들을 투옥하는 가당찮은 논리를 제공하고 사형이라는 판결로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형장으로 내몰았어. 국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자 그들은 다시 법이라는 이름의 말간 얼굴로 교묘한 커넥션을 형성하면서 우리 앞에 얼굴을 내민 거지. 보라꼬. 그런 놈들이 국회의원 의석의 과반수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야. 더러 그렇지 않는 놈들도 있지만 국회의원이 라는 게 대게는 전과자들이고 파렴치범들이지. 오히려 그 전과를 공공연히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놈도 있으니 할 말 다 한거 아니겠어. 소위 민주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우리사회가 아직도 이 모양이니 갈 길이 한참이나 멀었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어제 국회에서 어떤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하는 말 들어 보았어?”

 

 

“뭔데?”

 

 

“니는 그것도 모르나. 뉴스 좀 보고 다녀라. 부산저축은행 사건 말이야. 지금 그것 때문에 나라 안이 발칵 뒤집혔잖아?”

 

 

“아- 그거 말이가.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겨 놓은 거 아니겠어. 참 기가 막힐 일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노?”

 

 

“기막힐 일이 한 두 가지라야지. 그 국회의원이라는 자 말이지, 지난 정권 때 형무소를 갔다 온 전과자야. 형무소 있던 게 어제그제 같았는데 출소하자마자 국회의원이 되었지. 그런데 이번에 부산저축은행 사건이 터지면서 지역구 부실저축은행의 구명운동을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받자 뉴스에 나와서 뭐라고 한줄 알아?”

 

 

“뭐라캤는데…?”

 

 

“기가 막혀서. 내가 깜빵을 4년이나 갔다 온 놈인데 이런다고 무서워 할 줄 아느냐며 핏대를 세웠지. 누명을 썼다면 누구든지 억울한 일이지. 그러나 문제는 말이야, 그게 아니야. 옛날에 차안에서 물건 강매하던 깡패 출신 전과자처럼 국회의원은 형무소 갔다 온 것도 자랑이 된다는 사실이야.”

 

 

“아마 국회의원 태반이 전과자일 걸.”

 

 

“그러나 자신의 소신에 따른 양심범은 다르지. 문제는 횡령이나 사기, 뇌물수수, 알선 수재 같은 파렴치범 전과자가 많다는 거지. 그것들이 얼굴에 철판을 뒤집어쓰고 국민의 대변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어?”

 

 

“문제는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야. 그런 자들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주는 게 문제지. 전과자든 전과자가 아니던 가리지 않고 지역이기주의와 편 가르기만으로 국회의원을 뽑으니까 말이야.”

 

 

“지역이기주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지역이기주위를 교묘하게 이용해 먹은 게 박정희 아니겠어. 그 자가 망국의 지역 편 가르기의 원조지. 이제 다시 내년 대선을 앞두고 그런 조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어. 그 딸이 교묘하게 유신잔당과 지역 정서를 이용해 여당을 구한 쟌다르크로 추앙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지. 참 기가 막힌 일이야. 그 혹독했던 군사정권을 겪고서도 그때가 좋았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한참이나 먼거지.”

 

 

“우리 사회가 민주화가 된지 너무 시일이 짧아서 그래. 우리나라 민주화가 된지 불과 20여년 밖에 안되지 않았어. 이 정도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야.”

 

 

“그것도 맞는 말이야. 서구사회의 민주화는 100년이나 200년이 걸려 정착했으니까.”

 

 

“나는 우리사회가 이처럼 혼돈을 겪고 있는 것은 경제나 과학이 너무 빠른 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생각해. 우리가 보릿고개로 굶주렸던 것이 불과 50년 전의 일인데 얼마나 세상이 빨리 변했어. 천지가 개벽한 셈이지. 그때,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했어. 반면에 우리의 사고나 의식은 그 발전 속도를 미처 따라 잡지 못하고 일제 33년과 군사독재정권 30년의 더러운 유산만을 아직도 고스란히 안고 있어.”

 

 

“한마디로 말하면 과도기적인 현상이야.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보면 조금씩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고무적인 현상도 있어. 이를테면 대통령이 봉건국가의 제왕적 위치에서 내려와,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쥐눈이니 명박이니 하는 식으로 패러디 되는 현상 같은것 말이야.”

 

 

“그건 너무 심했어.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

 

 

“대통령이기 이전에 명박이도 우리와 꼭 같은 국민이야. 그는 왕이 아니지. 다만 국가의 주인인 우리가 위임한 권리를 우리를 위해서 집행하는 대리인에 불과하지. 판사니 검사니 하는 모든 공직자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 지들이 그만큼 치부했으면 이제 국민들이나 서민들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지.”

 

 

“그건 그래. 그런 의식의 변화가 중요하지. 니가 말한 것처럼 과도기적인 현상이라이야. 점점 나아질 거라고 믿어야지. 우리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 올 거야. 너무 실망하지 말자꾸. 이제 일어나. 네시에 기원에서 훈장 떨거지들과 바둑 두기약속이 있어.”

 

 

“그래에…?”

 

 

두 사람은 다방을 나왔다. 한길로 나와 기현씨는 종로 3가의 지하철역으로, 두영씨는 국일관 건너편 골목의 기원으로 향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또 만나.”

 

 

“그래 또 만나.”

 

 

그들의 만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두 사람은 저만큼 가다가 다시 돌아보고 손을 흔든다.

 

 

기현씨는 얼떨결에 80평짜리 고급아파트에 살고 있다. 본래 이 아파트자리는 40년이나 된 낡은 5층짜리 저층 아파트가 있던 자리다. 그 아파트 1층의 22평에서 기현씨는 아이 둘, 남매를 학교에 보내고 출가와 장가까지 들이고 30년 동안이나 살았다.

 

 

어느 때부턴가 주위에 있는 아파트들이 한 곳, 두 곳 재건축되더니 덩달아 기현씨가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서울 도심에서 재건축할 아파트는 그 아파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부동산 중개사무실에서 값이 올랐을 때 팔라고 현관문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거절했다. 아이들이 자랄 때는 좀 집이 넓었으면 했던 때도 있었다. 아이들이 독립해 집을 나가자 두 내외가 살기에는 22평짜리 아파트가 오히려 넓었다. 내부를 고치고 인테리어를 다시 했더니 새 아파트나 다름없었다.

 

 

주위의 경관도 많이 달라졌다. 아파트를 지을 때 같이 심었던 라일락과 꽃 사과, 목련, 후박과 오동나무, 벚나무, 000, 은행나무, 등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서울의 도심 중에도 도심이면서 공원처럼 한적하고 조용했다.

 

 

게다가 구청에서 아파트 둘레 길에 조깅코스를 만들고 길가에 개나리와 매화, 매 발톱, 둥굴레, 금강초롱 같은 야생화와 백합, 나리꽃, 붓꽃 접시꽃을, 비탈진 언더배기의 진달래와 영산홍을 식재해 놓아서 봄이면 아파트 단지 전체가 각종의 꽃향기로 진동했다. 기현씨는 고향보다 더 정이 들어서 굳이 큰 아파트에 욕심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강남부자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어느 날 느닷없이 아파트 값이 올랐다고 종합부동산세 고지서가 날라들었다. 부동산 투기를 한 것도 아니고 30년이나 한 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사람에게 아파트 값이 오르거나 공시지가가 올랐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집값이 올랐다지만 여전히 22평의 좁고 낡은 아파트일 뿐이다.

 

 

차라리 아파트를 팔고 나갈 때, 값이 올랐으니 세금을 더 내라고 한다면 합리적일 것이다. 대부분 연금 생활자이거나 고정수입이 별로 없는 노인들이 그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파트 값 오르내리는 것에 상관없이 여생을 조용히 살고 있는 터에 1년 생활비보다 더 많은 종합부동산세를 내라니 갑자기 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 돈을 빌려 종부세를 내든가 아니면 엄청난 양도세를 물면서 아파트를 팔고 떠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재건축이 되었다. 기현씨도 진즉 아파트를 팔고 시골 변두리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들을 결혼시키면 큰 집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에서 재건축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몫으로 건평 80평의 이 호화아파트를 받아 입주한 것이다. 낡은 아파트의 깔고 앉은 부지가 40평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종전에 살던 22평의 아파트에 비하면 거실이 운동장 같다. 물 안마가 되는 욕조와 대리석으로 치장한 화장실이 방마다 설치되어 있고 의상실도 방마다 딸려 있다. 부엌의 가구와 냉장고와 냉동고, 마이크로 오븐이며 세탁기 등이 모두 빌트 인이라는 일체형으로 수납되어 있어서 따로 부엌가구를 장만할 필요가 없다. 식탁과 거실의 소파를 22평 아파트에 살 때 쓰던 것을 그대로 들여 놓았더니 상대적으로 주위와 비교가 되어, 자신만큼이나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멀쩡한 것을 내버리고 다시 살 생각은 없었다.

 

 

아들을 결혼 시켰으나 며느리가 늙은 시부모와 같이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돈을 빌려서 살림을 내주고 말았다. 때문에 조만간 이 아파트를 팔고 떠나야 될 형편이다. 종전 22평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저런 이유로 아파트를 팔고 서울 변두리로 밀려 나갔다. 백여만이나 되는 관리비와 엄청난 종부세를 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재건축이 되고 새로 입주가 시작되면서 낯선 사람들이 이웃이 되었다.

 

 

그 이웃이란 게, 하나같이 갑각류처럼 딱딱한 가면을 쓴 것 같이 차갑고 경직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본색이나 약점을 감추려고 하거나 필요이상으로 거만을 떨 때 사람들이 짓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이웃 현관의 입주자에게 처음 몇 번은 기현씨가 먼저 인사를 했다. 그 때마다 40대로 보이는 여자는 새침하고 싸늘한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여자의 남편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쩌다 얼굴이 마주치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남편은 어느 법원의 부장판사고 여자는 모 대학의 교수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가 검사 아니면 판사나 변호사고 유명기업체의 이사거나 중역들이었다. 국회의원도 몇 사람 있는 것 같았다.

 

 

법원과 검찰정이 가까워서 특히 법 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아침마다 출근시간 때면 1층 현관 쪽에 고급차들이 즐비하게 대기해서 운전기사들이 차 밖으로 나와 자신들이 모시고 갈 상전들을 기다리는 풍경도 볼 만했다.

 

 

기현씨는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씁쓸했다.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이 아파트 사람들은 분명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별종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벌어서 이렇게 호화스러운 아파트에 살고 천만 원이나 하는 양복에, 억이 넘는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연봉이 일억, 이억이 된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다.

 

 

몇 달이 지나서야 기현씨는 그들이 어떻게 돈을 벌어서 이토록 호화스러운 아파트에 사는지 어름프시 가늠할 수 있었다. 신문이나 티브이의 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의 공기라는 보도 매체들도 각기 자신들이 속한 사주나 사주의 기업, 이해관계에 있는 집단의 편을 들거나 그럴듯하게 포장된 논리를 교묘한 방법으로 펼치게 마련이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알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여론이 비등하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때다.

 

 

기업가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서 임기 초기부터 정부 고위직 인사의 인선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았다. 소위 고소영이니 강부자니 하는 신조어가 유행처럼 회자되었다. 대통령이 한 나라의 국정을 수행하려면 자신의 정치철학을 지지하고 실현해 줄 수 있는 가장 가깝고 신임할만한 사람을 참모나 장관으로 기용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경영은 사기업이나 가정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고 국정을 운영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온갖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사회집단을 두루 아우를 줄 아는 인사를 적재적소에 기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사가 너무 한쪽으로만 편중되어 버렸다.

 

 

광화문을 뒤덮은 말도 안 되는 광우병 촛불집회는 10년 동안 집권한 진보세력이 선거에 패배하면서 일시, 패닉 상태에 빠진 결과로 칠 수도 있다. 그 뒤로 이어진 대통령의 인사행태는 한나라의 국가를 경영하는 인사라기보다 왕권시대의 논공행상이나 가신그룹을 선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대통령 인수위원회에 있던 사람들 모두 한 자리씩 차지했다. 자리가 모자라자 행적직이나 판검사 출신 인사를 연구소 소장이나 과학 분야의 수장으로 앉히기도 하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국회 청문회가 열리면서 소위 지도층에 있는 인물들의 비위가 지네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속속 드러났다. 장관후보자로 지명된 어느 전직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변호사 개업한지 6개월 만에 12억의 수임료를 챙기는 기록을 세우면서 전관예우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보리타작이며 모심기, 가을 추수 때는 한마을에 사는 사촌이나 재종, 팔촌은 말할 것도 없고 인근에 사는 사돈네나 일가친척까지 품앗이 형태로 공동 작업을 하게 마련이다. 보리타작을 하기가 무섭게 이내 모내기를 해야 하는 초여름에는 일손이 모자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도 학교에 가지 못한다. 아낙들의 일손까지 필요해서 젖먹이 동생을 돌보는 일이 맡겨진다.

 

 

시골은 대게가 한 집에 대가족이 모여 산다. 장가를 들고도 미처 살림을 나지 못한 삼촌이 있는 경우 4촌들까지 한집에서 지낸다. 살림을 난다 해도 같은 마을이거나 이웃마을이다. 그래서 사촌과 재종은 물론, 팔촌과 십촌까지도 협동해서 좋은 일이거나 궂은일이거나 같이 하게 마련이다.

 

 

더러 사촌이나 재종, 아재비 조카 사이나 친척들끼리 다툼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때는 어른들이 나서서 질서를 잡는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이른 바 농한기다. 남자 어른들은 초가지붕의 이엉을 얹을 준비를 시작한다. 작년에 이엉을 이은 초가지붕은 해가 지나면 짚이 삭아서 부스러진다. 매년 새 짚으로 엮어서 역시 마을 남정네들이 공동 작업으로 집집마다 지붕을 얹는다.

 

 

하지만 이제 모두 옛날이야기다.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 핵가족화 된지 오래다. 장남도 부모를 모시지 않는다. 종갓집이라 해도 삼대가 같이 모여 사는 집이 그리 흔하지 않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난 농촌에는 칠 팔순의 노인들이 초라한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막내 작은 아버지도 살림을 나기 전까지 숙모님과 사촌들과 함께 큰 집인 기현씨 네 집에서 같이 살았다. 초겨울 시골집 마당이었다. 이엉 엮는 작은아버지 옆에 앉아서 기현씨는 이엉을 엮기 좋게 짚 한 움큼 식을 준비하고 있다가 작은 아버지께 넘겨주고 있었다. 이엉의 길이가 점 점 길어져 가는데 눈이 떠여졌다. 한참동안 생신지 꿈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기현씨는 요즘 들어 끝도 없고 시작도 없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지내던 꿈들을 자주 꾼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이리라. 거실에 있는 구식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머리맡의 시계를 보니 네 시다.

 

 

<이 신 새벽에 누가……?>

 

 

난방이 잘되는 아파트이긴 하지만 워낙 바깥 날씨가 추워서 이불 밖은 서늘하다. 부스스 잠을 털고 일어나 뒤뚱거리며 거실로 나가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행님인기요?”

 

 

전화기를 들자마자 톤이 높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왁살스럽게 고막을 두드린다.

 

 

“누구 …… ?”

 

 

“지, 종입니더. 아부지가 조금 전에 세상을 떠났는기라예.”

 

 

그 동안 별로 연락이 없었던 부산에 사는 사촌 동생이다. <아뿔사!> 기현씨는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탄식을 내 뱉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찾아뵙는다는 게,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만 실기를 하고 말았다는 생각에서다.

 

 

기현씨 아버지 형제는 고모가 세 분, 작은 아버지 두 분해서 모두 6남매였다. 모두 돌아가시고 막내 작은 아버지만 숙모님 없는 빈 시골집에 혼자 기거하고 계셨다. 사촌들이 모시려고 했으나 막무가내로 시골집에 남아 있길 원하셨다. 작은 아버지는 닭장 같은 아파트와 분주하기만한 도시 생활보다 당신이 나고 자란 시골생활이 훨씬 편했던 것이다.

 

 

이제 그 막내 작은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셨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해도 일 년에 두 서너 차례는 찾아뵈었는데 치매를 앓아 요양원에 입원해 계시면서부터는 벼르기만 하다가 기어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말았다. 6⋅25 참전용사로 춘추 여든 여덟이시니 장수를 한 셈이다. 만년에 숙모님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긴 했으나 아버지 형제분 가운데 가장 다복하셨던 분이다. 아들 둘, 딸 셋 해서 모두 5남매로 사촌들은 부산에서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사촌들 못지않게 당질들 가운데는 고등고시를 봐서 검사가 된 아이도 있고 큰 대학병원의 의사를 한다는 아이도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들이 어렸을 때는 가끔 사촌들의 손에 매달려 인사를 오기도 했는데 성년이 되고서는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기현씨는 몸소 작은 가방에 양말과 내의 칫솔 등을 챙겼다. 아내는 늦게까지 티브이를 보다가 새벽잠이 깊이 들었다. 어떤 차편으로 가야할지 궁리하다가 2시간 반이면 부산까지 간다는 고속열차 생각이 나서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한국철도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좌석이 한자리도 없다.

 

 

새삼 토요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이지만 주말마다 관광지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는 언제나 만원이다. 생각을 굴리다가 오늘이 토요일이면 목동에 사는 아들도 쉬는 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가를 들인 이후로, 어쩌다가 한 달에 한번이나 두 달에 한번, 손님처럼 얼굴을 내미는 아들이다. 좀처럼 전화를 거는 일도 없다. 발신음 소리가 여러 번 반복되고서야 며느리가 전화를 받는다. 시아버지 목소리임을 확인한 며느리가 화들짝 놀란다.

 

 

“아버님 !”

 

 

“잘 있었니? 별일 아니다. 아범 좀 바꾸어라.”

 

 

잠에 취한 아들의 어눌한 목소리가 수화기로 전해져 왔다.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다. 너도 알지. 김해의 작은 할아버지 말이다?”

 

 

“작은 할아버지가 왜요?”

 

 

“그 어른이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다는구나. 너도 가봐야 할 것 같아서말이다?”

 

 

아들은 얼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 잠깐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얼굴을 직접 보지 않아도 썩 내키지 않는 낌새임에 틀림없다.

 

 

“웬만하면 애비랑 같이 갔다 오자. 우리집안에 마지막 어른이시지 않니?”

 

 

“알겠습니다.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간청조의 말이 아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그나마 다행한 일일 수 밖에 없다. 기현씨는 재직 시, 잦은 전근으로 아들과는 별로 애틋하게 지내지 못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고 장가를 들어 분가해서 떨어져 살다보니 이제 아들이 손님 같은 느낌이다.

 

 

“오늘 토요일이어서 기차도 버스 편도 다 자리가 없는 모양이다. 차를 가지고 이리로 오느라. 그 편이 상가에 가서도 되러 편할 것 같다. 도착하는 대로 전화 넣어라.”

 

 

한 시간쯤 지나서 아들이 아파트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기현씨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데 이미 누군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 있다. 건너편 현관 집 여자다. 여자도 아침 일찍 어디로 가는 모양이다.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려다 말고 주춤하고 만다.

 

 

6년 전, 이 아파트가 재건축되고 같은 시기에 입주한 사이지만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일이 없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문이 열렸다. 여자가 냉큼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넓지 않은 엘리베이터 안이지만 기현씨는 여자와 최대한 거리를 두고 구석자리에 선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여자가 바람을 일으키며 재빨리 빠져나간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들이 얼굴을 내밀며 기현씨의 손을 살핀다.

 

 

“짐 없으세요?”

 

 

“아니.”

 

 

“가방 이리 주세요.”

 

 

아들이 기현씨의 어께에 맨 가방을 벗겨내 앞 장 서서 주차된 차 쪽으로 걸어간다.

 

 

토요일이긴 했지만 서울에서 대전까지는 비교적 차가 제 속도를 내면서 달렸다. 대구를 지나면서 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은 김천 톨게이트를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다. 아들은 비교적 차간 거리를 지키려 노력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아들의 앞쪽이 다른 차선의 차간의 거리보다 길게 벌어져 있다. 그때, 갑자기 뒤차로부터 전조등 불빛이 번쩍였다. 뒤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뒤 따르던 승용차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스포츠카처럼 날렵하게 생긴 외제 승용차가 기현씨가 타고 있는 차의 꽁무니를, 마치 들여 박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바짝 붙이고 연신 전조등을 켰다 끗다 빠르게 반복했다. 추월하겠다고 차선을 비켜달라는 신호인데 좌우 양 차선 어느 차선이고 비켜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지쳤는지 뒤차도 더 이상 전조등을 깜박이지 않았다.

 

 

그런데 구미 톨게이트를 막 지났을 무렵이다. 옆 차선에서 차 한 대가 전광석화같이 끼어들었다. 아들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끼익-소리 내면서 아스팔트에 타이어 마크를 그리면서 십 여 미터 쯤 미끄러지다가 간신히 멈췄다. 고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큰 사고가 난줄 알고 일시 출렁했던 양쪽 차선의 차들은 가던 길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그런데 갑자기 끼어들었던 앞 차가 저만큼 멈추었다. 이내 문이 열리고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각각 삼십대 후반과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검정 양복차림의 사내가 내렸다. 그들은 곧장 아들의 차 쪽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아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러서 식은땀을 흘리며 맥을 놓고 있었다. 기현씨도 세차게 머리를 앞뒤로 부딛혀 얼떨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내들이 차의 옆구리를 마구 걷어차면서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기시작했다.

 

 

“야이 씨발놈아, 나와! 몇 번이나 비켜달라고 했는데 이런 똥차를 가지고 앞에서 알찐거리면서 왜 길을 안 비켜줘. 빨랑 못나오겠어, 빨리 기어나와.”

 

 

아들이 눈을 번쩍 떴다. 기현씨는 순간적으로 아들의 눈에 푸른 불이 일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아들이 운전석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면서 아직도 차에 발길질하고 있는 사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사내가 저만큼 나가 떨어졌다. 다른 사내가 아들에게 달려들면서 고속도로는 삽시간 세 남자가 치고 박고 뒹구는 싸움터가 되었다. 중과부적으로 아들이 두 사내들에게 밀렸다. 그대로 두었다간 아들이 그들에게 맞아 죽을 것만 같았다.

 

 

기현씨가 차에서 내렸다.

 

 

지나가던 양쪽 차선의 차량들이 창을 내리고 개처럼 엉켜 싸우고 있는 세 사내들의 싸움에 히죽이 미소까지 띠면서 처다 보았다. 반면에 차선이 막힌 뒤차의 운전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차에 내려 다가왔지만 그대로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아들은 일어나지 못하고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박고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두 사내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보시오. 젊은 양반 그러다가 사람 죽이겠소. 잘못은 먼저 당신들이 하지 않았소. 이 상황에 어떻게 차를 비켜주며 끼어들면서 사고를 낼 뻔한 것은 당신들이지 않소?”

 

 

기현씨는 그들이 이성을 되찾도록 최대한 음성을 부드럽게 말했다. 아들의 일격에 입술이 터진 삼십대 사내가 힐긋 뒤돌아보았다. 아들과 일행임을 알아 본 사내의 눈빛이 표변하더니 느닷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강한 충격에 기현씨는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렸다.

 

 

“이 쌍놈의 영감탱이가 뭐 잘났다고 나서긴 나서. 우리가 누군줄이나알고 그래. 너거덜 당장 수갑 채워서 처넣지 않는 것만 고마운줄 알아.”

 

 

기현씨가 쓰러지는 것을 본 다른 사내가 눈짓을 했다. 이쯤 해두고 그만 가자는 것 같았다. 사내는 성이 덜 풀렸는지 아들 쪽으로 다가가서 다시 구둣발로 옆구리를 걷어찼다. 아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올렸다. 한바탕 소동을 부린 두 사내가 욕설을 내 뱉으면서 자신들의 차로 돌아갔다. 이내 시동을 걸더니 까맣게 멀어져 갔다. 한참 후 깨어난 기현씨와 아들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숨을 골랐다. 아들은 기현씨를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운전을 기현씨가 대신했다.

 

 

간신히 부산에 도착했으나 대학병원의 장례식장으로는 바로 갈 수가 없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여관으로 가서 방을 잡았다. 얼굴을 씻고 약국에서 사온 과산화수소와 연고 거즈 등으로 통증과 찢어진 부위를 소독하고 밴드로 붙였다. 옷매무새를 대충 바로 잡은 뒤 다시 장례식장인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예정대로라면 네 시간 전에 도착했을 텐데 짧은 겨울 해는 이미 많이 어두워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고인을 모신 영안실로 갔다. 사촌의 세를 과시하듯 영안실 입구에는 얼추 봐도 백 여 개가 훨씬 넘는 화환들이 통로만 간신히 남기고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입구에서 굴건제복을 입은 사촌의 얼굴을 먼저 발견했다. 문상 온 손님을 배웅중인 것 같았다. 불콰하게 술이 취해 있었다.

 

 

“아이구 행님 아닌교. 하매나 행님 오시는가 마이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그마 입관했뿌렸습니더.”

 

 

“그래, 나도 아침 일찍 떠나긴 했는데 도중에 쪼깬이 일이 생겨가지고 그마 늦었다. 니 알제 우리집 큰 애?”

 

 

“아임니더, 하도 어릴 때만 봐서 잘 몰르겠심더”

 

 

아들이 어색한 몸짓으로 앞으로 나와 꾸벅 인사했다. 사촌의 안내로 작은 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방으로 들어갔다. 굴건제복을 입은 상제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제히 일어섰다.

 

 

영정은 작은 아버지의 5십대 모습의 흑백사진이다. 한 평생 농투성이로 사촌들을 반듯하게 키워낸 깐깐하고 강한 노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기현씨는 향갑에서 향 세가치를 뽑아 촛불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은 뒤, 뒤로 물러나 아들과 함께 두 번 큰 절을 올렸다. 다음으로 상제들과 인사를 나눌 차례였다. 굴건제복을 한 두 상제의 얼굴이 유난히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촌의 아들인 것이 분명한데 어디서 보았는지 얼른 생각이 나질 않았다. 상제와 맞절을 하고 일어나서였다. 사촌이 그들을 기현씨 앞으로 나오게 했다.

 

 

“행님! 야아들 아시겠능교? 에릴 때 봐서 잘 모를 낌니더마는 야아가 병주고, 야아가 창환이 아임니껴.”

 

 

그들이 꾸벅 절을 하고 얼굴을 드는 순간 기현씨는 그들을 어디서 보았는지 또렷이 기억해 내고 말았다. 그들의 찢어진 입술이 기억을 되찾게 했다. 바로 몇 시간 전의 고속도로에서 부자를 때려 눕혔던 자들이다. 그들도 기현씨와 아들을 알아보았다. 경악으로 두 눈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기현씨는 그만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아들이 급하게 기현씨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주위에서 뭐라고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들은 곧장 주차장으로 가서 차의 뒷좌석에 아버지를 눕혔다. 영문을 모르는 사촌과 친척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뒤따라 왔다. 아들이 따라 나온 사람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하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아들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내비게이손이 안내하는 대로 고속도로로 진입해서 곧장 귀경길에 올랐다.

 

 

기현씨는 정신을 수습했으나 그대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들이 라디오 수위치를 눌렀다. 마침 저녁 뉴스시간이었다. 내일아침 전국의 기온이 영하권으로 내려가고 서울은 영하 섭씨 십 오도가 될 것이며 체감온도는 영하 25도로 전국이 꽁꽁 얼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한 달이나 계속된 이 추위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공룡이 멸종한 빙하기가 도래할 것이다. 기현씨는 차창을 통해 사람들은 없고 늑대들이 어슬렁거리는 동토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