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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2012년 [수필-노금희] 소리가 있는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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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46회 작성일 13-01-04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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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그동안 가지고 있던 내 몸이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씩조금씩 나의 고민은 밥상과의 싸움이다. 냉장고 벽에 붙여진 피해야 할 음식과 좋아하는 음식을 보면서 남몰래 신경전으로 가득하다. 그동안 가족을 중심으로 한 밥상이었다면 이젠 나를 중심으로 한 가족 밥상으로 바뀌어 간다. 딸애는 주의 할 음식, 특정 성분의 음식을 외워가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질세라 잔소리를 한다.

 

 

다니던 병원을 옮기면서 마침 금요일에 예약일자가 잡혔고, 앞으로는 여행이 조금은 자유롭지 못함을 알기에 진료를 마친 후 주말을 이용해 전주 나들이까지 감행했다.

 

 

그 날은 겨울의 끝자락, 2월의 중반이 서서히 넘어가고, 마지막 강추위가 절정이었다. 여행을 미리 계획하지 않고 보니 숙소 예약을 미처 하지 못했다. 병원을 향해 가는 길에 어제 봐둔 전주한옥마을의 한옥생활체험관에 예약 취소 편을 알아봤다. 다행히 아직 예약금을 입금하지 않았다는 방이 있어 예약자와 연결해보고 쓰지 않는다면 연락을 주기로 했는데, 예약자와 계속해서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예약문화가 자리를 잡았다고는 하나 일정이 취소 되었다면 미리 연락을 주어서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예약자는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서 오후 2시까지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내 입장에선 입금이 되지 않으면 바로 취소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예약금이 입금되지 않았어도 예약자를 우선하는 한옥생활체험관의 배려가 보기 좋았다. 다행스럽게 예약자의 취소로 우린 세 가족이 사용하기엔 조금 큰 방이었지만 아궁이가 있는 구들방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게 되었다. 날씨가 추운탓에 온돌방이 라고 하니 웬지 기분이 좋아 기대가 되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이불을 깔아놓은 아랫목은 온몸을 녹여 줄 정도로 따뜻했다. 그 흔한 TV도 없이 소박하게 꾸며진 방엔 여러 권의 책과 차를 마실 수 있는 다기세트, 문갑 위에 올려 진 달 항아리 백자가 고즈넉 했다.

 

 

직원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과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내부를 소개받고 우린 뜨거운 온돌방에 몸을 굴리다가 너무 뜨거워 서로 윗목에서 자려고 살가운 쟁탈전을 벌였다. 오랜만에 구들방 아랫목이 까맣게 달구어진 방을 보게 되니 그 자리가 얼마나 뜨거운 열기에 타 올랐을지 짐작 할 수 있었다.

 

 

갑자기 전주여행을 선택하면서 전날 숙소예약을 하기위해 인터넷으로 알게 된 사실은 숙소에서 아침 식사까지 제공 되는 곳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우리가 숙박하는 한옥생활체험관에서는 유기그릇 밥상에 아침식사를 받을 수 있는 매력에 끌렸다. 여행을 하면서 콘도나 호텔이 아니라면 숙소에서 나와 아침을 해결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아침식사가 되는 곳을 찾아도 객지에서 맞는 아침은 깔깔하기 그지없어 더러 입맛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놋그릇, 흔히‘ 방짜유기’라고 하는데 구리와 주석을 정확하게 78:22의 비율로 녹여서 만든 놋쇠 덩어리를 불에 달궈가며 망치질로 두드려 만든, 선조들의 얼과 지혜가 담긴 기물이다. 식기와 제기를 비롯한 각종 고급생활용품에 쓰이고, 특히 징이나 꽹과리 같은 전통악기는 오직 방짜기법으로만 제작된다고 한다. 미네랄을 생성해 온도를 유지하는 보온 보냉 효과가 있어 조리 후의 음식 온도를 그대로 유지해주므로 음식의 맛과 깊이를 더해주고 병원균 살균 기능이 있어 음식물의 부패를 막아주고, 싱싱함을 유지해주며 농약성분 검출기능도 있다. 시중에 판매되는 각종 조미료나 농약이 많이 포함된 채소를 장기간 담아둘 경우 그릇의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어린 시절, 제사 때마다 엄마는 실겅에 올려 진 놋그릇을 내려 볏짚으로 닦아내고 쓰셨던 기억이 난다. 사용 전 후 엄마의 손이 많이 가던 제기들은 시골마다 다니던 행상인들이 도자기류 그릇으로 바꿔 가면서 밥그릇 몇 개를 제외하고 그 많던 유기는 집에서 사라졌다.

 

 

우리가족이 묵었던 방 바로 옆이 주방 마루였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어슴프레 종소리를 들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밥 짓는 냄새, 반찬을 놓으며 그릇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 놋그릇이 부딪치면서 맑은 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아침식사를 알리는 소리가 마당에서 들리고, 우리는 제일 먼저 주방마루에 올랐다. 식탁마다 숙박자의 명단이 <000가족>으로 지정석을 마련해두어 찾아 앉았다. 우리 옆에 여행객은 젊은 여학생 둘이었는데, 자리에 앉더니‘ 우리가 언제 가족이었어?’하면서 즐거운 웃음이다. 친구가 가족이 되는 시간이었다.

 

 

그냥 밥상만 봐도 뿌듯한 아침식사이다. 유기에 담긴 밥과 국의 정갈한 밥상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콩나물국과 여러 가지 반찬에 수저를 들다보면 여기저기서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릇에서 종소리가 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일부러 밥을 뜨면서 그릇을 살짝 치고, 국을 뜨면서도 그릇 옆구리를 찔러 계속해서 소리를 냈다. 그 맑고 청아한 소리는 경주에서 만났던 에밀레 종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자기 그릇에서 나는 소리와는 다른, 맑은 종소리의 여운이 밥을 먹는 내내 오래 지속되었다. 작은 에밀레 종, 밥상에서 만난 소리의 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