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2호2012년 [수필-노금희] 아름다운 사람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366회 작성일 13-01-04 18:28

본문

 ○영순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매월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한 일처리를 위해서라고 해야 할지, 항상 지사를 방문하여 업무를 보는 경우인데 매월 정기적으로 오시는 분들은 잊지 않게 된다. 수많은 분들을 만나기에 더러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같은 업무를 하다보면 오히려 오시지 않으면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방문하신 분의 신분증을 먼저 확인하는데 이분 신분증에는 나에게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서도 찾기 어려운 여러가지 훈장이 달려있다. 그 자랑스러운 훈장은 바로‘ 장기기증서약’증표이다. 심장, 신장, 각막 등 무려 여섯개나 스티커가 붙어있다. 한두 가지도 아니고 본인이 내어 줄 수 있는 모든 걸 몸소 실천하신 50대 중반인 이 여사님 신분증을 볼 때마다 존경스럽다. 실천하는 성자를 만나는 느낌이랄까?

 

 

병원에 잠깐 있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 형제간에 장기이식을 해주기로 약속했는데, 병원입원이 몇 번 미뤄지더니 정작 수술 당일엔 공여자가 나타나지 않아 수술하지 못했다고 한다. 장기기증서약은 뇌사 상태에 이르러서 하는 사후 기증방법이지만 누구든 실천으로 옮기기엔 쉽지 않은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하루는 조금 쌀쌀한 봄날 방문하셨는데 그 날은 업무처리 후 웃으시면서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주머니 속에 품고 오셨는지 그 분의 체온이 남아있는 삶은 달걀. 따뜻한 온기를 손에 쥐어주고 가셨다. <삶은 여행>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그 분은 누구에게나 나누어 주는 삶이라는 걸 보여주기에 인생이라는 여행을 항해하는데 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한다.

 

 

 

 

 

정○선

 

 

매월 사무실에서 만나는 또 다른 한분. 70대가 훌쩍 넘으셨지만 겉으로 보기에 여장부의 포스가 느껴졌다. 매월 사무실을 순례하시는 것이 하나의 일과로 보여 지는데 사무실에 찾아다니시면서 일처리를 직접 하신다는 건 그만큼 체력과 시력도 좋아야 하고, 온갖 사리판단이 정확해야 할 수있지 싶다. 방문하시면 나보다도 먼저 웃음 짓고 깔끔한 옷차림에 겨울엔 어깨에 숄과 모자를 쓰고 오셨다.

 

 

한번은 내게 나의 헤어스타일이“ 아주 잘 어울린다”며,“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야”라고 칭찬하셨다. 연세 드신 분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젊은 사람들의 유행을 어찌 잘 파악하셨는지 슬쩍 웃음이 나기도 했다. 사실 난 오래전부터 커트형으로 짧은 헤어스타일을 고수했기에 특별한 유행 스타일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어르신이 보기엔 썩 마음에 드셨던가보다.

 

 

사무실 근무자에 대한 수칙에 용모단정이 있기는 하지만 칭찬을 받고 보니 그 수칙에 일정정도 기여했구나 하는 만족감도 느낄 수 있었다.

 

 

또 한번은 내가 입고 있는 옷 색깔이“ 참 곱다,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하셨다. 직원과 민원인의 만남은 그리 녹록치 않은 편이다. 대다수 건강보험에 대한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방문하기에 오히려 민원인의 기분을 살피고 마음을 좀 가라앉힐 수 있도록 말 한마디 조심스럽게 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업무 외적인 말은 되도록 아끼고 사무적으로 상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분은 항상 먼저 칭찬하여 나의 기분도 좋게 하여 하루 종일 달뜨게 하는 마력을 가진 분이다. 새해에 방문하셔서 모든 일을 다 보신 후에“ 새해 복 많이 받아요”하는 인사를 나보다 먼저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대표 아버지는 재일 동포로 온갖 편견과 멸시, 조선인의 차별 속에서도 손정의 대표를 비롯해 자녀들에게 항상‘ 너무 천재야’ 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해 오며 살다가 철이 들자,‘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지, 내가 과연 천재일까?’ 의문이 들기도했다. 물론 손정의 대표는 바보는 아니었지만, 손정의 대표가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힘은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칭찬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녀에게 하는 칭찬, 친구에게 하는 칭찬, 직장 동료에게 하는 칭찬, 칭찬에 인색한 일상에서 내가 먼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 말 한마디 건네면 더 큰 메아리로 돌아와 서로에게 웃음을 주고 힘을 주는 명약임을 믿는다.

 

 

 

 

 

○○성

 

 

올해 3월, 5년 만에 고향지역 출장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친정동네 가까운 마을에 사시는 분이 방문하셨다. 오래전 마을 이장도 하시고 여러가지 중책을 맡으셔 활발한 지역 활동을 하신 분이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리고 보니 오랜만에 뵙는데‘ 나를 기억하실까’ 하는 나의 생각과 함께 가지고 오신 우편물을 꺼내 놓으셨다. 웬일인지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모습이 조금은 위축되어 보였다. 아버지 연배의 나이 드신 분들을 볼 때마다 한 해 두 해 달라지는 모습에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본인부담상한액통보>대상자를 보니 사모님 이름으로 발송된 우편물로, 사모님이 병환 중이신가 했는데, 지난 10월 사망하셨다고 한다. 약간 어두운 표정과 힘이 없어 보였던 이유였다. 공단의 업무로 발생한 우편물이지만 괜히 내가 아픈 부분을 건드린 느낌이다. 지급받을 계좌 등 몇 가지 인적사항을 작성하시는데 손은 떨리고 울먹이신다. 그 잠깐이지만 부부간의 애틋한 정이 내게 그대로 전해온다. 안내문을 작성하다 이름 석 자 다시 보면서 그 허전함이 수시로 몰려오는 거겠지. 우리 업무는 왜 이리 시간이 지나서 아픈 기억을 들추게 하는지... 얼른 휴지 몇 장 건네 드리고, 차 한잔 드리려고 한 것도 마다하시고, 미안해 하시면서 얼른 일어나셨다.

 

 

살아가면서 겪는 슬픔 중 배우자를 먼저 보내는 슬픔이 가장 크다고 했던가, 전엔 장제비 신청하러 와서 여자 분들은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본적은 있지만 남자들의 눈물을 만나기란 흔치 않는 일이긴 하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아름다운 두 분의 사랑을 마주한 이 아침은 마음 아프면서 한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