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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2012년 [수필-서미숙] 나도 하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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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323회 작성일 13-01-04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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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그대의 짐이 되는 것은 아닐는지...

 

 

가끔 못 만난 친구들이나 동생들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하고 만나자 하고 막상 만나면 피곤한 기색이 보이면 곧 바로 후회를 하곤 한다.

 

 

내가 괜히 불러 낸 것은 아닌지, 혹시 시간이 없는 걸 마지못해 나온 것은 아닌지...

 

 

전화를 했을 때도 받기 힘든 전화를 받은 것은 아닌지?

 

 

오랫동안 연락이 없는 후배들이 가끔 궁금하다.

 

 

‘무정한 것, 어쩜 그리 연락을 안 하나?’ 야속하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외로운데 뭘 하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싶기도 하고 그래 마지못해 전화를 하면 한참 바쁘단다.

 

 

그렇게 여러 번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체념을 하고 나도 내일에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불쑥 메시지 하나가 뜬다.

 

 

“언니 보고 싶어요. 잘 계시지요? 언제 한 번 뵈요. 사랑해용~” 하면서 하트 문자를 보내 왔을 때, 아! 아니구나,

 

 

나를 잊은 것은 아니구나 하면서 안도의 숨을 내쉰다.

 

 

각박한 세상, 각박한 인생이라고 자신에게 하소연을 하면서, 내가 헛살았어, 하면서 자신을 자책할 때, 불쑥 던져진 짧은 메시지 하나로 힘을 얻고 삶의 희망을 얻어가면서 사는 이도 있다.

 

 

이 짧은 메시지 하나로 서로의 인생길의 공감대가 엄청시리 형성되는 것처럼 느끼는 이 희열을 우리는 점점 나눠주지 못하고 산다.

 

 

우리의 입에서는 바쁘다가 일상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그렇게 바쁘게 살게 되었나?

 

 

농촌의 그 바쁜 일손에 손을 놓지 못하면서도 느릿느릿 새싹의 움직임이 움트던 시기가 지나가고, 부흥하듯 바람과 같은 시대가 돌아오면서 온통 모든 것들이 기계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일하는 시간이 점점 축소되어 인간의 손을 그다지 필요하지 않는다 하며, 우리의 손은 감춰지고 있는데 왜 우리는 더 바빠 바빠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지금은 몇 세기가 바뀌고 통신의 시대로 안방에서도 아니 옆에서도 언어의 소통이기보다, 손가락의 놀림으로 테크놀로지 대화를 하면서, 침묵으로 눈빛 교환도 소리도 듣지 않는 글자화면의 소통으로 살아가고 있다.

 

 

전화 벨소리에 따라 받아야할 전화, 안 받아도 될 전화 소리를 구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끔은 귀찮은 전화에 일을 못 할 만큼 불편한 전화가 있다. 그래서 전화부에 친구 모임 가족 등 구분을 해놓고 그에 따른 벨소리도 설정해놓고 전화를 받는다. 이렇게 꼭 받아야 할 전화, 천천히 받아도 될 전화, 나중에 받아도 될 전화, 안 받아도 될 전화 이렇게 구별 해놓고 사는 세상이다.

 

 

그렇게 좋은 전화기를 쓰며 편안한 세상으로 그 조그마한 전화기속에서 요즘은 카톡, 카스토리 라고 하는 것으로 서로 상대의 소식을 다 알며 지내고 채팅까지 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 좋은 세상 정말 편안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편안하고 좋은 세상에서 사람들의 인심과 넉넉함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나 또한 보험회사나 잦아지는 상업성의 전화는 꺼려하고 받지 않는다.

 

 

내 가 필요하지 않는 전화는 나도 거부 하고 있다.

 

 

혹여 나도 그 누군가에게 가끔은 귀찮은 존재로 인식되어지는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말이다.

 

 

모임에서 수없이 알림 메시지를 보내도 수년간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문자 성격이란다.

 

 

[거북이 -늦게 답장

 

 

돌 - 시크하네

 

 

잠수함 -언제나 답장이 없음

 

 

꿀 먹은 -단답형

 

 

워프 -바로 답장 속도 엄청 빠름

 

 

유령 -보고도 답장안함

 

 

물고기 -한 번 보내면 그때부터 물 만남

 

 

아기 - 자신이 필요할 때만 답장

 

 

인형 - 시간가는 줄 모름

 

 

광대 - 기쁨

 

 

직장인 -매일 바쁘다면서 답장안함

 

 

천사 -언제나 친절하게 답장

 

 

어린이 -언제나 해맑음 긍정적임

 

 

악마 -늘 부정적

 

 

진지모드 -언제나 진지함]

 

 

 

 

 

물론 늘 안부하고 전화하고 바쁘니까 일상적인 메시지의 답은 안 해도 서로 이해하는 사이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늘 상대의 소식에 무관심한 무반응 인 사람들이 간혹 있다.

 

 

혹여 우리 살아가면서 나는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생각은 해보았는가?

 

 

인사라고 하는 것은 늘상 우리 곁에 흔하게 쓰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간가부터 우리 곁에는 그 인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누가 사는지 심지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대다.

 

 

어찌 이리되었을까?

 

 

언젠가 수업을 하고 있는데 웬 노인 한분이 바구니 한가득 옥수수를 삶아 왔다고 하면서 불쑥 들어왔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 나도 어찌 할 바를 몰랐지만 금방 딴 옥수수가 너무 실해서 방금 애들 주려고 삶아왔다고 하는 그 할아버지의 이마의 송송 맺힌 땀방울을 보고서야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지금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 전혀 영 프로인 일이다.

 

 

그것도 벌써 6~7년 전이니 말이다. 점점 각박하다란 말이 흔하게 우리 곁에 머무를 단어가 되고 우리는 그걸 당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사생활 침해니 개인 사생활 이니 하면서 이웃의 안부도 묻기도 어려워지는 세상 속에 살면서 가끔은 나는 어릴 적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비 오는 날이면 부침개를 마당에서 구워먹으면 하나 둘씩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 앞마당으로 모여 들어오셨다. 그것을 너 왜왔냐 하면서 눈치를 주거나 왕따를 주거나하는 일은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서로 어서오라하며 하나 둘씩 모여 앉아 먹다가, 중간에 각자 일어나 자기네 집의 먹을거리를 하나둘씩 내어 오면서 그 음식들을 나누던 기억이 나의 어린 기억속이지만 생생하다.

 

 

그 속에서 낯선 아이들도 나의 친구가 되고 나의 이웃들로 맺어 지면서 이웃사촌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 현관 입구에 들어서면 저녁 늦게 국수를 삶는지 음식냄새들이 가끔 베란다를 타고 올라오면 신경질 내는 사람들이 있다.

 

 

밤늦게 뭘 해 먹냐고 하면서 궁시렁대고, 심지어 음식 냄새가 내 집으로 타고 들어온다고 타박을 해대는 사람도 있다.

 

 

다이어트 하는데 사람 약올리냐 하면서 신경질을 부리며...경비실에 인터폰이 불난다.

 

 

하긴 나도 신경질을 낸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냄새가 나 역겨웠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사생활 보호로 우리의 시대는 이제 마음의 문들조차 닫고 있다.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을 응큼하다고 하고 불여시라고 하며 하던 말들이 이젠 우리 모두 다 응큼스러워지고, 불여시가 되어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 속내를 모른다.

 

 

사람이 죽어 옆집에서 아이와 엄마가 사흘을 같이 살고 있어도 이웃은 눈치를 못 챈다.

 

 

급기야 썩어 냄새가 진동하자 우리는 그것을 수습한다.

 

 

더구나 세계 자살 1위라는 우스꽝 스러운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 말이다.

 

 

조금만 더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면 과연 우리나라가 자살 1위인 나라가 되었을까.

 

 

우리는 늘 그렇다.

 

 

항상 일들이 벌어진 후에 그 모든 것들을 수습하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뒷이야기를 한다.

 

 

이젠 남을 배려라는지 남을 이해하려는 모습보다는 따지고 대드는 모습들이 더 커지고 있다.

 

 

남이야기를 들어주기 보다는 내이야기를 더 많이 하려고 하고 우리들의 마음 들은 점점 욕심들이 커지고 있다.

 

 

손 텃치 하나로 서로의 소식을 알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의 잠정적인 삶을 부축이며 일회성 친구가 늘어가고 있다.

 

 

작은 메시지 하나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쩜은 그 작은 글자들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아주 커다란 메시지들을 전달해 줄 수 있다.

 

 

작은 소통으로 우리는 예, 아니오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래도 가끔 상대에게 아니오 보다는 예를 할 수 있는 너그러움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당신은 저에게 예 입니까? 아니오 입니까? 가끔 생각하면서 나도 많은 반성을 하며 살리라.

 

 

저는 당신에게 예 이지요? 맞지요?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메시지에“ 하이! 안녕?”이라고 하고 싶다.

 

 

나도 하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