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호2012년 [시-권정남]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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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버스가 낙산을 지나가고 있었다
밀납 같은 밤, 배꽃가지들이 분수가 되어
허공에 은빛 포물선을 그어대고
면사포를 쓴 달빛이 쉬임없이
배꽃을 게워내고 있었다
친정집 뒤란, 아버지가 심어놓았다는 배나무 한 그루,
봄이면 배꽃들이 그렁그렁 눈물 같은 꽃망울을 터뜨리곤 했다.
가을이면 낮달처럼 허공에 걸려있던 배가 아버지의 이마처럼 창백했다. 철들기 전 어느 날. 달빛아래 서계시던 아버지가 사라졌다. 말라가던 배나무도 누가 베어버렸는지 언제부터인가 보이질 않았다. 그 날 이후, 내 삶, 속속들이 배꽃, 그 처연함이 묻어있었다.
속초 가는 마지막 밤 버스가 낙산 배밭을 지나가고 있다
작두날 같은 파도가 어둠을 난도질 하고,
은가루 같은 달의 비늘이
배꽃 겨드랑이를 키득키득 간질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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