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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2013년 [ 수필 - 이복수 - 어머니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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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73회 작성일 14-01-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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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온통 푸른 세상이다 . 오월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오늘 처음으로 도보여행 길에 나서기로 하였다 .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 홀어머니가 젊은 날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나서면 될 일이다 .

 

7번 국도를 따라 속초에서 청간포구까지 도보여행을 시작하였다 . 그 옛 날 양양군 양양읍 속초리 2구 고향집 모퉁이에서 출발하여 영랑호를 지나 모래기 언덕에 올랐을 때 아치형 대형 간판이 손짓한다 . ‘ 금강산은 부른 다 . 어서 오십시오 .

 

고성군입니다 ’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 해파랑길 . 멀리 왼쪽으로 설악산 울산바위가 돌 기한 백두대간 아래 위용을 드러내고 있고 그 오른쪽으로 미시령 고갯길 이 푸르름 속에서 허연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 . 길을 걸으며 깊은 사념의 나래에 빠진다 .

 

미시령 고개 마루길 ,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저 고갯마루를 넘어 강원도 청으로 발령받고 간 것이 어제일 같은데 … , 전세 단칸방에서 홀어머니와 다섯식구가 올망졸망 생활하던 춘천에서의 기억의 편린들이 , 이제 반백이 다 된 은퇴자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 그곳에서 보낸 30여 년 세월이 언제 이리도 속절없이 흘러갔는가 …

 

적막을 깨뜨리는 것은 4차선 국도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굉음이었다 . 문득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싱그럽다 . 해풍 속에서 어린 시절 즐겨 맡 았던 해조류 내음이 물씬 풍겨난다 . 고향바다의 향기 , 어머니의 비릿한 체 취이다 .

 

느티나무 가로수 푸른 잎새도 간지러운 듯 나풀거리며 미소 짓는다 . 모 내기 준비를 위해 써래질을 마친 논에서 아침 개구리들이 마구 울어댄다 . 용촌 삼거리에 이르렀을 때 도로 표지판이 방향을 가르킨다 . 직진은 통일 전망대 , 왼쪽은 세계잼버리수련장 , 파인리조트 , 대순진리회 .

 

길가에는 나무와 풀과 꽃들이 서로 뒤엉킨 채 아우성이다 . 키 큰 버드 나무들 속에 수양버들과 아카시아 나무 수풀더미에서 노랑 애기똥풀꽃들 과 칡나무 순들도 경쟁하듯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 아카시아 나뭇잎 에는 오월을 알리듯 희끗희끗 흰 눈이 수북히 내려앉았다 . 꿀내음 그윽한 아카시아꽃들의 향연이 한창이다 .

 

어느새 봉포 어촌이다 . 캔싱턴 리조트 마당에서 공사 중인 대형기중기 가 허공을 찌르고 있고 , 고성군이 조성한 ‘ 해당화공원 ’ 에서는 드문드문 새빨간 꽃이파리들이 요염하게 고개를 내밀며 해변의 길손을 유혹한다 .

 

봉포해변 벤치에 홀로 앉아 물끄러미 수평선을 바라본다 . 수평선 … 언 제나 그렇듯 바다에 오면 하늘은 슬며시 수평선으로 내려앉고 그녀 앞에 서 하늘은 한없이 작아진다 . 하늘과 가장 가까이 다가가려면 바다에 와서 지그시 수평선을 바라보면 된다 . 하늘빛이 수평선에 스펀지처럼 빨려들 어가 푸른 빛으로 동화되기 때문이다 .

 

오월의 바다는 다소 적막하기까지 하다 . 철썩! 철썩! 눈 앞에 와 부서지 는 파도소리가 아니라면 주위는 한없이 고요한 적멸의 보궁이다 . . 간간이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탓에 비상하던 제비 한 마리 날개쭉지가 꺾인다 . 생 의 추락이다 .

 

‘ 청정 동해 어촌마을 봉포 , 안녕히 가십시오! ’ 다시 해안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 한참을 걸어서 한 구비 해안선을 돌아들자 곧 천진리 너머로 청 간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

 

마침내 청간이다 . 청간마을은 어머니의 친정이었고 , 청간 앞바다는 그 옛날 우리가족의 생명터이었다 . 매년 봄이 오면 열두살 막내의 생계를 위 해 30십리나 되는 이 길을 아침저녁으로 걸어 다녔던 마흔 넷의 홀어머니 … 미역을 널어주고 대신 받은 품삯이래야 고작 보리쌀 됫박이었고 덤으 로 가져 온 참미역 줄기를 작은 누이와 고추장에 찍어 주린 배를 채우고 나면 속이 따갑고 쓰려왔던 유년의 아린 기억들 …

 

어머니 . 당신이 손수 고단한 이 길을 발바닥이 다 닳도록 걸으면서 키 워낸 막내아들 , 꿋꿋이 장성하여 지방행정의 목민관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이제 환갑을 넘은 나이에 찾아온 불효 자식을 …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저 청간정 소나무 숲 하늘가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

 

오월이 오면 왠지 기쁘지 않다 . 산빛은 초록으로 물들지만 마음은 슬픔 으로 물든다 . 오랜 병고 끝에 육신의 고통과 마지막 남은 속살까지 다 내 리어 형해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던 4남매 , 형은 차마 그 모 습을 바라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고 흐느껴 우는 두 누이를 달래며 삶 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충혈된 두 눈을 부릅 뜨는 일 밖엔 달리 없었다 .

 

겨우 내내 긴긴 밤 , 복수로 부어오른 배를 움켜잡고 만성간경화의 질곡 처럼 깊은 절망 속에서 반곱슬머리에 옹니뱅이 고집불통 아버지가 열 한 살 막내둥이를 혼자 놔두고 떠나간 날도 오월이었다 . 스무 살 한 때는 그 런 무책임한 아버지를 원망하였지만 , 서른이 되어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 기로 하였다 .

 

예순이 넘어 찾아 나선 어머니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

 

그 옛날 , 먼지가 풀풀거리는 비포장 신작로 길을 걸어 친정 가는 이 길 위에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못 난 남편을 원망하였을까 , 어린 막내아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했을까 , 아니면 당신의 쇠잔한 삶의 속박을 한탄하였을까 .

 

길 위의 여정에서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 바다에서 불어 온 오월의 싱 그런 바람도 , 새들의 지저귐도 , 푸른 바다와 흰 뭉개구름도 7번 국도를 질 주하는 차량들의 굉음 속에 묻혀버리고 길 위에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 은밀하게 다가오는 오월의 바닷바람결을 타고 어머니의 영혼을 따라 어디론가 떠돌고 있었는지 모른다 .

 

오월이 오면 생각나는 어머니 . 어머니의 길은 척박했던 삶의 끈질긴 생 명력이 살아 숨 쉬는 길 . 언제 다시 이 길을 걸어 갈 수 있으리 .

 

이 아침 어머니는 영원한 그리움으로 다가 와 막내아들의 가슴 속을 마 구 두드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