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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2013년 [ 수필 - 심재현 - 어울림의 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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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61회 작성일 14-01-1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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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뜨물에 집 된장을 풀고 , 시래기 , 두부를 숭덩 숭덩 썰어 넣어 끓이면 밥을 두 그릇은 먹을 수 있었다 . 시래기 국의 구수한 맛은 돌아오지 않을 듯 하던 입맛도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 시래기는 그냥 그대로 볶아 먹거 나 국을 끓여 먹어도 좋지만 , 고등어나 꽁치 조림에도 넣으면 그 맛이 훌 륭하다 . 고등어 맛이 밴 시래기 몇 줄기면 , 밥 한 그릇은 금방 비울 수 있 다 . 그 맛이 어찌나 좋은지 시래기를 넣은 고등어조림을 하면 고등어는 쳐 다보지도 않고 시래기만 집어 먹었다 .

 

고등어조림에 시래기 대신 묵은지나 무를 깔고 해도 좋다고 하지만 , 그 것들은 시래기만은 못하다 . 무를 넣고 푹 조리면 , 무의 달큰함이 남아있 으나 , 고등어의 맛이 너무 강하게 배어버리니 , 이건 주연 배우에 가려진 조연 배우 같고 , 묵은지는 되려 고등어 맛이 살짝 뭍어 있을 뿐 묵은지의 맛이 너무 강하니 이건 주연 배우를 압도하는 조연 배우 같다 . 그에 비해 시래기는 고등어의 맛을 품었음에도 자신의 구수함은 끝까지 지키고 있어 주연 배우와 잘 어우러지는 조연 배우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

 

시래기가 고등어조림이나 꽁치조림같은 생선조림에서나 통할까? 푹 우 린 돼지 사골 국물에 된장 풀고 , 살점 넉넉하게 붙은 돼지 등뼈를 넣고 설 설 끓이다가 얼큰하게 무친 우거지와 시래기를 넣고 한소끔 끓여내도 그 맛은 일품이다 . 밥을 지을 때 송송 썰어 넣어 밥을 한 다음 양념 간장에 비 벼도 좋고 , 별 다른 재료 없이 된장 국물에 시래기만 넣어서 끓여도 그 맛 이 훌륭하다 .

 

시래기의 미덕은 어울림이다 . 자신의 맛은 잃지 않으면서 남의 맛을 고 스란히 품을 수 있는 그런 어울림이야 말로 시래기의 진정한 맛이라고 할 수 있다 . 영화에서 주연 배우만 연기를 잘한다고 , 그 영화가 훌륭할까? 주 연과 조연이 함께 호흡을 맞추며 서로가 갖고 있는 고유의 맛을 끌어낼 때 훌륭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비록 시래기가 주연 배우에 가깝지 않지만 , 그 누구보다 더 맛깔난 조연 배우라고 생각한다 .

 

겨울 내내 처마 끝에서 풋내 풍기며 매달려 있는 시래기에서 그런 맛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였을까? 가을에 무를 수확하고 나 서 제일 알찬 부분을 내주고서도 편히 쉬지 못한 것이 무청이다 . 땅에서 자랐으니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쉬어도 좋으련만 , 처마 끝에 매달려 찬 바람 맞으며 시래기가 되어야 하니 , 무청의 팔자도 평범한 팔자는 아니다 . 무청은 한 겨울 내내 매달리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어떤 생각을 하 였을까? 내가 무청이라면 한 겨울 내내 매달릴 수 있을까? 겨울 내내 찬바 람 맞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다 . 무청에서 시래 기로 되어가는 시간은 고통을 인내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 그 고통을 참 아내며 , 다른 맛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

 

사람이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고 즐거운 일 만은 아니 다 . 세상에 어디 나와 맞는 이만 있을 수 있을까? 서로에게 좋은 사람을 만나 서로를 품어주기도 하지만 , 때로는 사람들이 부대끼며 서로의 맛을 강하게 내려다보니 본의 아니게 서로를 할퀴고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게 삶 인 것을 . 가끔은 나와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것이 삶을 지 치게 하기도 한다 . 그런 날에는 고등어조림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밑에 무를 살짝 깔고 살이 오른 고등어를 올린 후 양념장과 함께 시래기를 넣 어보자 . 그리고 시래기가 품고 있는 어울림을 맛보는 것이다 . 거기에 가 볍게 소주라도 한잔 곁들인다면 지친 삶에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될 것 이다 . 시래기를 천천히 씹으며 시래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시래기는 어 울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

 

어쩌면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과정들이 어울 맛을 내기 위한 인내의 과 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무청이 찬바람을 맞아가며 시래기가 되어가 듯 , 사람도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어울림의 맛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이 러한 기대 속에 오늘 저녁에는 시래기를 넣고 고등어조림을 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