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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2013년 [수필 - 최선희 - 신사임당 추모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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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406회 작성일 14-01-1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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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인간으로 탄생할 때 , 아니 자유자재로 활동할 수 있는 모든 동물은 신기하게도 기계로 제작된 신체구조가 아닌 남녀라는 성별로 구분 된 동물로 태어났다 . 그런데 체형이나 체질이 남성이 크고 강하며 여성 은 더 작고 약한 호르몬을 품은 생리적 현상이다 . 남자로 , 여자로 태어난 고마움의 표현이나 불만의 호소를 할 곳도 , 할 수도 없다 . 수없이 흐르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저 당연함으로 살아간다 .

 

하지만 대대손손이 세월 따라 삶이 함께 흐르며 다행으로 나는 남자이 기에 , 여자이기에 만족하고 행복하다 또는 남자이기에 , 여자이기에 불만 과 불행함의 하소연이 우러나올 때도 많이 있을 것이다 . 인간은 감정의 분 위 속에서 살아가니까 . 특히 우리 조선민족은 창조 시 부터 남존여비라는 사상을 손잡고 동행하며 걸어왔다 . 아들이 태어나면 좋아하고 딸을 낳으 면 씁쓸한 어른들의 입맛 . 이유도 있다 . 옛 조상들이 만들어 지켜 내려온 풍습 , 딸은 애쓰고 성장시켜 그 어떤 다른 성씨의 집으로 시집을 보내야 하니까 .

 

요즈음도 어린이가 아니면 누구나 밥숟가락에 담겨있고 호흡하는 공기 속에 섞여 흐르는 느낌으로 기본교육인 냥 머릿속에 묻어 내림을 안다 .

 

그러나 미개하던 구시대정신에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문화 수준의 판단으로 남자가 위대하여야하고 여성이 똑똑해 대문 밖을 나대면 집안이 망한다는 시대착오 정신이 변해간다 . 그릇된 사상이 아직까지 완전 깨끗 한 색깔은 아니라도 차츰차츰 여성의 필요성을 깨달으며 잠겨있던 정신적 고정관념이 거의 사라졌다고 본다 . 이제는 여자라고 가두어 두지 않고 교 육과 사회활동에 문을 열어주니까 . 우리나라 소학교가 처음 생길 때 딸아 이는 감히 학교문턱에도 가면 안 되는 당연한 규정으로 인식되어 그 시대 여자 어린이였던 요즈음 연세든 노모님들은 일자무식자가 많지 않은가 .

 

어느 여성이나 느끼며 체념하고 살아왔지만 가정에서는 사내가 아닌 무 남독녀이기에 , 사회생활에서는 여성이기에 그 누구보다 많은 고통과 억울 함을 몸소 겪은 경험자 나는 여자이기에 뒤늦은 승진이 목이마른 한으로 남아있다 . 하고 싶은 교육관을 제대로 풀지 못하고 퇴직한 나는 즉시 사 회단체 한국여성 예림회 속초지회 회원으로 입회하여 회장을 비롯한 여러 회원들의 가르침으로 뒤뚱뒤뚱은 겨우 벗어난 걸음마를 힘주어 연습하고 있다 . 사라져가는 필요한 전통문화는 부흥하기위하여 지나친 성별의 차 이는 교정시키고 여성중심으로 계몽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 옛과 오늘을 비교 고난의 역사를 통하여 혼란했던 이질문화를 지양하고 민족고 유의 부녀 상을 정립하는 것도 필요한 목적으로 사회단체 한국 여성 예림 회는 활동하고 있다 . 전통윤리교육이며 고유문화에 대한 계몽과 민족사 에서 가장 부덕 높은 여성상의 발굴 및 찬양사업과 한국민족 및 전통문화 전승을 위한 각종 실습이며 사적지 답사 등 의견들을 모아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기력을 훨훨 펴 여성으로서의 밝은 빛을 찾아 노력한다 .

 

지난 5월 17일은 강릉 신사임당의 11회 추모제가 강릉시 오죽헌 몽룡 실에서 거행되어 우리 예림회원 모두 여성들이 주관하는 본보기의 견학 겸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추모제에 참석하였다 .

 

여성이 무시당하던 옛 시대에 우리나라 여성의 사표이신 사임당추모는 정성어린 봉행으로 유덕추앙(遺德推仰) , 여성의 뜻 모아 내실 있는 제전 , 올곧고 지혜로운 여성상 정립이란 방침아래 추모제는 진행되었다 . 한국 여성 예림 회 강릉지회가 주관되어 약 두 시간 정도 사회자의 빈틈없는 절 차에 의하여 조용하고 엄숙한 추모제였다 . 현수막도 하얀 옥양목에 고딕 체로 삼색을 이용하였고 제단 아취도 정성어린 봉행으로 사임당의 얼 선 양 , 여성의 뜻 모아 아름다운 유덕추앙이라는 문장으로 양옆에 세워져 있 었다 .

 

모처럼 참석하여 마음속에 담긴 푸짐한 존경심으로 우리나라의 여성대 표 위인이신 신사임당 영전에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기원 드렸다 . 또한 배운 상식도 많았다 . 많은 여성들의 특히 우리 예림회원 몇 십 명의 추모 제 참석 고마움에 하늘에 계시는 신사임당께서 감사의 눈물까지 내려주셔 서 검은 우산을 받쳐 들고 더욱 진한 감명의 제배를 올렸다 .

 

강릉 예림회원들의 연한 연두색 한복과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 단체 한 복은 추모제다운 무게를 주었다 .

 

오죽헌 뜨락에 아름다운 여성 , 겨레의 위대한 어머니이시며 현명한 아 내 , 뛰어난 여류화가의 숭고한 인품과 예술혼을 온 천지에 살며시 뿌리고 가신 신사임당의 500여년의 흐름은 오늘날도 아니 영원히 그 예지와 덕 성을 겸비한 이상적인 여성으로 빛날 것이다 . 어려운 옛 시대 , 여성은 존 경심을 거의 받을 수 없던 상황 속에서 효를 실천하며 훌륭한 자녀교육과 현명한 지혜로 삶을 살아가신 학식과 인격을 두 손 모아 존경합니다 . 너 무 빠른 48세의 아까움 속에서 주고가신 자취의 향기는 우리여성들은 대 대손손 더욱 진하고 빛나는 계승으로 이어지길 소원한다 . 남기고 가신 신 사임당의 사상은 현시대에 갖추어야 할 어머니의 좌표이며 동방의 대현율 곡선생을 길러낸 신사임당이 위대한 어머니였기에 율곡 같은 인물이 완성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율곡선생과 함께 고액권 화폐인물로 선정되어 세계 를 울려 퍼지게 한 최초의 사임당 역사적 위상을 후손인 우리에게 , 앞으 로 끝없이 이어질 커다란 영광은 전 국민과 여성들의 훌륭한 자랑이요 긍 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어야한다 .

 

훌륭하신 신사임당은 1504년 10월 29일 조선연산군 10년 강릉 북평촌 현 오죽헌 외가에서 부친 신명화공과 용인 이씨 사이의 다섯 자매 중 둘 째 따님으로 태어나셨다 . 유아 때부터 그림으로 천재적 예술세계를 펼치 고 19세 때 덕수 이씨 이원수공과 혼인하여 지아비의 도움 역할로 오늘날 여성들에게 본보기를 주었다 . 동방의 대현 이이를 비롯한 4남3녀의 스승 이며 어머니이시다 . 1551년 5월 17일 명종 6년 짧은 일기로 세상을 떠나 신 신사임당께서는 모든 여성들의 선망이 되어 존경받는 여성이시다 .

 

제11회 사임당 얼 선양제에 참석하여 그분에 대한 더욱 세밀한 행적과 발자취를 사모하며 여성으로서 반성과 자긍심도 새삼 느껴보고 몰랐던 위 대한 여성의 역사 인물에 대해 심사숙고한 교육도 더 깊이 안아보았다 .

 

나는 이번 현장학습의 보람으로 예림회원이 되어 훌륭한 추모제에서의 보고 배움의 느낌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며 모든 여성들이여 여자라고 자포자기 하지 말고 하면 된다는 의욕으로 가정 , 학교 , 사회교육이 이루어 지도록 노력하자고 두 손 모아 약속과 부탁하고 싶다 .

 

추모제 후 나누어준 여러 종류의 편(떡)의 맛은 위대하신 신사임당의 손 맛 같은 더 먹고 싶은 감칠맛을 주었다 .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자꾸자꾸 훌륭하신 신사임당의 모습을 떠올리며 같은 여성으로서 행사를 마치고 돌 아오는 마음이 감사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