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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2013년 [ 테마수필 - 서미숙 - 속초 여자로 살아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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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02회 작성일 14-01-2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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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내리던 비가 아침이 되자 서서히 그치면서 하늘이 뿌옇게 되었 다 .

 

아침나절 안개사이로 비추는 설악산 산봉우리의 싱그러움은 언어로 표현 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다 . 그 아름다움에 취해 산과 하늘을 쳐다보 다 문득 10여 년 전 서울과 친정 부모님을 떠나 이곳 속초에 처음 오던 때가 생각난다 .

 

서울이 싫어지던 참에 남편의 발령을 핑계 삼아 겁 없이 이사를 결정 하고 떠나왔다 . 처음 본 아름다운 속초의 산과 바다를 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강산이 한 번 변하고 , 어느새 제 2의 고향 이 되어가고 있다 .

 

처음 이사 오던 날 , 낯선 곳이라는 두려움 보다는 시골이고 바닷가라 는 것에 마음이 즐거웠고 들 떠 있었다 . 그러나 처음 세를 얻은 집이 너 무나 시골집이었다 . 화장실도 마당에 멀리 있어 밤이면 아이들을 일일 이 데리고 다녀야 했고 , 비라도 올라치면 우산을 쓰고 발을 동동거리며 서로 빨리 볼일을 보라며 성화를 부렸다 . 그런 날이면 마당은 너무 어두 워 무섭기 그지없었다 . 담은 왜 그리 낮은 지 ,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쉽게 담을 훌쩍 뛰어 넘을 것 같아 어디든 외출을 하려면 방문을 걸어 잠 그고 확인해야 했다 . 그러나 그런 불편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목련 나무와 라일락 나무의 여름 그늘이 좋았고 , 마당 한구석에 상추와 방울 토마토을 키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 가을이면 낙엽을 태우며 향이 좋은 커피 한 잔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마당이 다 울리도록 틀어놓고 나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 그렇게 시간이 흐르 면서 어느새 우리도 아예 현관문도 안 잠그고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신경도 안 쓰고 , 바닷바람과 강한 햇볕에 얼굴이 많이 타 서울로 나들이 를 가면 시골 사람이 다 되었다고 시누이가 놀려 거울을 하루 종일 드려 다 보기도 했었다 .

 

이사 와서 첫눈을 맞았다 . 마당 가득 쌓인 백색 가루로 세상이 온통 눈 부셨다 . 아주 어릴 때 보고 삼십여 년 만에 보는 많은 눈이었다 .

 

아이들은 일찌감치 나와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며 마당에서 신나게 뛰 어 놀고 있었다 . 언제 이렇게 왔을까? 밖으로 나가려고 대문을 여니 잘 열리지 않았다 . 혼자 힘으로는 힘껏 밀어도 안 되어서 아이들과 셋이 밀 었더니 “ 꽈당 팡 ~ ” 대문이 떨어져 나가 버렸다 . 대문이 떨어진 것은 아 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마당에서 , 다 큰 어른인 난 골목에서 신이 났다 . 동네 어르신들은 손에 , 손에 싸리나무로 만든 빗자루를 들고 나와 골목 을 쓸고 계셨다 . 나도 플라스틱 마당 빗자루를 들고 나갔다 . “ 그 빗자루 로 뭘 쓸려고 나왔어 눈 구경이나 해 ” 난 머쓱해져서 도로 들어갔다 . 동 네 어르신들이 다들 웃었다 . 부서진 대문을 고쳐준다고 어르신 한 분이 망치를 들고 나왔다 . 눈에 녹슬어서 굳어 버리면 대문이 안 닫힌다고 , “ 그런데 정말 눈이 많이 왔어요 . 꿈같아요 . 너무 멋있어요 ” “ 그래 젊은 새댁 살아 봐라 , 매일 눈이 와도 좋은지 한번 살아봐라 . ” 옆에서 할머니 한 분이 중얼거린다 . 그때는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냥 아이들과 눈사람도 만들고 여기 푹 저기 푹 빠져도 보고 신 이 났었다 .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온 삭신이 아팠다 . 못 일어 날 것 같았다 . 얼마나 잤는지 일어나 저녁을 하려 하니 갑자기 물이 나오질 않는다 . 폭 설 후 뚝 떨어진 한파로 수도 파이프가 터졌단다 . 전기도 나갔다 . 그 날 저녁은 온 식구가 붙어 덜덜 떨면서 잤다 .

 

이튿날 전기는 들어와 추위는 면했지만 물이 안 나와 하루를 더 고생 해야 했다 . 다행히 추위도 풀려 정상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 며칠 동안 설친 잠이나 실컷 자보려고 안방에 들어가 누웠다 .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벼락 치는 소리가 났다 . 우지직 무엇이 부서지는 소리도 들리고 뭔 일인가 싶어 나가 보니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 마른 하늘에서 치는 벼락소리에 조금 무섭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다시 잠을 청했다 . 한 참 있다 보니 또 소리가 들렸다 . 벼락이 심하게 치는구나 하고 문 단속을 하고 다시 들어왔다 .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지붕이 새어서 거실이 물난리가 났다 . 어제 그 벼락으로 기왓장이 부서진 모양이다 . “ 맑은 하 늘에 날 벼락이다 . ” 이렇게 하늘이 맑은데 벼락이라니 이상도 하다며 마 당에 빨래를 널러 나갔다 . 순간 또 벼락 소리가 났다 . 아무래도 이상스 러워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뒷마당에서 나는 소리였다 . 우리 집 지붕 위로 축대 높이 만큼 윗집 지붕에 쌓인 눈 덩어리가 떨어지고 있었 다 . 그 집 지붕에 쌓였던 눈이 기온이 올라가 녹으면서 우리 지붕에 떨 어지는 소리였다 . (그 소리는 남자 200명이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는 무 게 만큼이라고 했다 . ) 그러니 그렇게 큰 벼락 같은 소리가 났고 기왓장 이 다 부서졌던 것이다 . 그렇게 나는 이곳 속초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이곳 속초는 눈이 겨울 보다 이른 봄에 더 많이 온다 . 눈이라고 하면 12월 크리스마스 전후로 해서 그리고 다음해 1월까지 많이 오는데 여기 속초는 오히려 2월이나 3월 늦으면 4월에도 온다 . 그 때의 눈은 거의 폭 설로 이어지기 때문에 모든 교통수단에 비상이 걸린다 . 처음 이곳에 이 사 와서 나는 몸이 좋질 않아 서울로 병원 예약을 하고 간단한 수술을 받 은 적이 있었다 . 그러나 그 눈 때문에 교통이 두절 되어 두 달 걸려 예약 해놓은 병원을 제 때 가지 못해 연기를 해야 했다 . 또 한 번은 서울 친정 에 갔다가 속초로 못 와서 우리 둘째 녀석 초등학교 입학식도 못 갔었다 . 지금은 미시령 길이 좋아 져서 그런 일은 거의 드물지만 그 당시 다 마비 가 되어 속초 집으로 오지 못한 13년 전의 그 3월을 잊을 수가 없다 . 그 덕에 아들 녀석은 첫 입학식에 오지 못한 엄마를 두고두고 원망 했었다 . 내 탓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속초는 바다 , 호수 , 산이 어우러진 곳이다 . 설악산을 끼고 있는 기후의 영향 탓에 눈도 많이 오는 곳이다 . 한번 오면 상당히 많은 눈이 오기에 설악이 눈에 잠길 때면 그 장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또 다른 대가를 요구한다 . 폭설에 쌓여 지붕만 보이는 자 동차들 , 아파트 도로를 치우느라 애쓰는 경비 아저씨들 , 눈 내리는 시각 부터 밤새 거리를 밀어대는 제설차량들 , 엉금엉금 기어가듯 걸어가야 하는 얼음판의 도시 … 그래서 때론 치워도 , 치워도 쌓이는 눈이 지겨울 때도 있다 . 밤새 내린 눈 위로 내 발자국 내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무 도 밟지 않는 내 발자국을 확인하러 나갔다가 자국은커녕 밤새 눈이 와 나만의 미련함을 알게 해주던 그 쓴 웃음의 시간들 속에서 나는 눈 온 풍 경을 그림으로 그려내고 , 눈에 덮인 설악산을 보며 한 편의 시를 썼다 . 그렇게 눈에 익숙해지며 나는 서서히 속초 여자가 되어 갔다 .

 

오늘 아침도 눈을 뜨니 온통 눈꽃밭이다 . 밤새도록 검은색 도화지에 피워낸 안개꽃 도시 , 거리는 온통 반짝반짝 불투명 유리 빛으로 반사되 어 눈이 시리도록 부시다 . 그 눈꽃 속에 서울의 친정식구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른다 . 불쑥 목 울대로 차오르는 그리움으로 서울행 버스를 타고 싶다 . 엄마와 된장찌 개를 먹으며 동생들과 수다도 떨고 싶고 , 친구들과 인사동 골목을 헤짚 고 다니며 그림들을 보고 싶다 .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나는 길을 나서지 못한다 . 이 눈 속을 헤치고 가야할 학교가 있고 , 가르쳐야 할 아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 이제 서울 보다 이곳이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 이 더 많고 , 요일별로 모임도 많아 달력마다 스케쥴이 빽빽하다 . 아직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도 많지만 , 그 부족함을 채우기에 충분한 숨겨진 자잘한 매력 때문에 난 속초를 떠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산다 . 아직 까지는 부족함이 많은 도시이지만 그래도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과 어우러지고 부대끼며 , 입에 못 대던 곰치탕도 잘먹고 , 쳐다 보지도 못했 던 도치를 익숙하게 데쳐내는 속초 여자로 거듭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