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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2013년 [ 초대글 - 박무웅(속초문화원장) - 갈뫼와 함께 했던 추억의 나날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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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452회 작성일 14-01-2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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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초문화를 일구는데 크게 일조한 『갈뫼』가 발간된지 43년이 되었다 . 『갈뫼』는 평생 토목쟁이로 살아온 내게 문화에 대한 향수와 애정을 일으 키게 한 소중한 존재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올해는 속초시 승격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 속초시가 발전의 기틀을 다진 후 문화토양이 필요한 순간 『갈뫼』가 세상밖으로 나와 준 셈이다 . 올해부터 속초문화원장을 맡으며 속초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볼 때 내 유 년의 문화관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는 단어로도 모자란다 .

 

    1950년대 후반만해도 6 · 25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 문화 를 경험할 공간이라고는 음악다방(가야다방) , 극장 , 공공기관인 ‘ 공보 실 ’ 이 전부였다 .

 

    극장 출입은 학교에서 주선하는 단체관람 외엔 교복을 입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었다 . 음악다방 역시 그랬는데 김인극 영어선생께서 동행 할 때만 입장이 가능했다 . 마음대로 문화를 소비할 수 없는 금단의 장소 였던 셈이다 . 그나마 ‘ 공보실 ’ 에서 영사기를 가지고 마을을 순회상영했 고 , 책을 빌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

 

    당시 서점은 ‘ 문계 ’ ‘ 동아 ’ 두 곳이 있었지만 가난한 우리에게는 그림 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 겨우 참고서나 구입하며 수많은 책을 눈으로 잠시 감상만 할 뿐이었다 . 부모님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 먹고 살기에 바쁜 시절 음악이나 영화 , 책을 마음껏 향유하기에 힘들었던 것이다 .

 

    이런 시절이었지만 속초시가 승격하고 도시의 틀이 만들어지면서 문 화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 63년 예총이 결성되고 65년 문화원이 설립 되었고 69년 설악문우회가 결성되어 지역문화 발전의 기반을 다지기 시 작했다 . 지금 우리가 속초에서 누리고 있는 각종 문화행사는 이러한 문 화기관 및 예술인들의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또한 , 그 기반 위에 내가 태어난 도문동의 농요가 속초 유일의 무형문화재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

 

   『갈뫼』가 지역문화 발전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다 . 개인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갈뫼』를 떠올리면 처음 생각나는 분은 속초고등학교 은사인 윤홍열 선생님이다 .

 

    1958년 속초고등학교는 남녀공학으로 한 학년에 180명 정도였는데 문 · 이과로 반을 구성했다 . 나는 문과 반에서 국어2 즉 고문을 배웠다 . 하지만 막상 진학을 결정 할 때는 피폐해진 가세(家勢)를 외면할 수 없 어 취직이 잘 된다는 토목과에 대학 원서를 넣었다 . 문과생이니 공대엔 무척 불리했다 . 공대생활을 고학으로 천신만고 끝에 졸업은 했지만 앞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 방황의 시절에 ‘ 가나안농군학교 ’ 에 입교하여 김용기 교장의 가방들이가 되기도 했다 . 그 이후 대학 교수님의 조언으 로 공무원 시험에 눈을 돌려 건설부 , 경기도청 , 서울시청 , 통신공사 네 곳에 동시에 응시 , 네 곳 줄줄이 합격통지서를 받는 행운도 거머쥐었다 .

 

    그 당시 공무원 시험은 어림잡아 30 ~ 40대 경쟁률이었다 . 시험은 전 공과목과 국어과목으로 나뉘었는데 한 과목이라도 과락을 받으면 끝장 이었다 . 국어시험은 크게 두 문제가 출제되다 . ‘ 용비어천가 ’ 를 다룬 주 관식과 일반국어였다 . 시험지를 받아들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 용비 어천가가 나왔기 때문이다 . 고교시절 은사이신 윤홍열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셨던 그 용비어천가가 시험에 나온 것이다 . 나는 상도문에서 지 금의 양우아파트 자리에 있던 속초고까지 16킬로 정도를 걸어다녔는데 험하고 외진 그 시절의 산길을 걸을 때마다 존경하는 윤홍열 선생님이 열강하시는 고전소설인 별주부전 , 춘향전 , 장화홍련전 등을 외웠다 . 그 리고 어휘가 생소했던 ‘ 용비어천가 ’ 도 내 등굣길의 친구였던 것이다 .

 

    첫눈에 용비어천가를 보고 씩 웃었고 만점을 자신하며 제일 먼저 퇴실 했다 . 너무 빨리 나오는 바람에 경쟁자들이 내가 백지를 내고 나온 줄 착 각할 정도였다 . 시험공부가 부족했지만 고교시절 문학을 사랑했던 선생 님의 영향을 받은 내가 그 은혜를 제대로 입은 셈이었다 .

 

    공무원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날 나는 서울 시립대 뒷산(배봉)에 올라 가 낙엽을 깔고서 동쪽 속초 부모님을 향해 큰절했다 . ‘ 고맙습니다 . 사 랑합니다 .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 다시 서울시청 쪽을 향해 묵념으로

 

    ‘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 고 다짐했다 .

 

    그리고 이 모두가 은사님의 덕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 이제 막 사회로 내딛는 첫 발자국에 최대의 버팀목이 된 것이다 .

 

    토목쟁이인 나는 글 쓰는 작가들이 부러웠다 . 『갈뫼』를 받아 읽을 때 마다 가슴이 뛰었고 『갈뫼』의 영원한 애독자가 되기로 마을음 먹었다 . 작가들이 모인다는 서울 인사동을 찾기도 했다 . 천상병 시인이 운영하 는 ‘ 귀천 ’ 에서 철원 출신 민영선배를 비롯한 여러명의 문인들과 어울리 며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

 

   『갈뫼』를 떠올릴 때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사람은 내게 ‘ 갈뫼 ’ 책자를 처음 준 이성선 동문 , 그리고 낙향 이후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 갈뫼 ’ 지를 내게 보내주는 이은자 동문이다 .

 

    이 두 사람은 내가 토목기사로 서울시청 공무원과 대림산업에 발을 딛 고 있을지라도 , 고교시절 문과 반에서 문학에 대한 열망을 가졌고 , 고향 을 그리듯 문학을 그리워 한다는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두 명의 친구가 연결해준 『갈뫼』와의 시간도 내겐 소중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 다 .

 

    1980년 후반 부터는 속초와 서울을 오가며 시집을 모으고 시간 나는 대로 연극 , 음악 , 국악 , 미술전 , 사진전 , 조각전 등을 관람했다 . 출향인 이었던 내게 『갈뫼』는 어머니라는 단어와 함께 향수의 근원이었고 , 문화 향유의 시작이었으며 , 가난 때문에 진로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던 내 현 실의 위로였다 .

 

   『갈뫼』의 초창기 발간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지독한 어려움 때문에 이 젠 추억처럼 느껴진다 . 십시일반 주머니를 털어 국수와 자장면으로 요 기하면서 원고를 모으고 , 인쇄비가 없어 당시 하나 뿐인 문화인쇄소에 사정하여 외상으로 발간했다고 한다 .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같 은 속초의 문화발전이 생긴 것이다 . 그 중심에서 현재까지도 책자를 발 간하는 설악문우회 동인들에게 존경과 고마움을 보낸다 .

 

   『갈뫼』라는 제호는 한자로 ‘ 갈뫼(葛山) ’ 라는 뜻으로 척박한 산 속에 칡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뜻으로 『갈뫼』는 이미 수복지구 속초에 문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 더욱더 정진하여 거침없고 찬란한 속초문화 발전에 이바지 해 주길 바란다 . 다시 한 번 『갈뫼』 발간을 위해 힘을 쓰 는 모든 문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