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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2013년 [ 초대수필 - 이반(극작가) - 동전 두 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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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91회 작성일 14-01-2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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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과 다름없는 속초에 이사 온 지도 몇 년이 되어 간다 . 속초에는 이 북에서 함께 피난 나온 분들이 제법 된다 . 그 중 오늘 이야기 할 김 옹은 같은 마을 출신인데 나 보다는 여섯 살 위로 어릴 때 부터 함께 지냈다 .

 

    내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 내 어머니는 도심이 험해저 장 애누이동생이 걱정이라하셔 , 강현면 둔전리 산아래 마을로 이사하셨다 . 장날 같은 때 시장에 나오셨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끊기는 난감한 경우 를 당할 때가 간혹 있었다고 하셨다 . 그럴 때 마다 김옹은 두 말 없이 어 머니를 집까지 트럭으로 모셔다 드렸다고 하셨다 .

 

    어느 가을 어머니는 방문의 낡은 창호지를 뜯어내고 새 창호지를 발랐 는데 헌 창호지와 새 한지 사이에 코스모스 꽃잎 몇 개로 문을 장식했다 . 김옹은 그 코스모스 꽃잎 위에 작은 유리창을 만들어 드렸다 . 찬 겨울 바 람을 피해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창은 그 해 내 어머니 를 따뜻하게 해 주었으리라 .

 

    나는 늘 김옹에게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 언젠가 꼭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 여름이 끝날 때 즈음 김옹이 시간이 난다고 했다 .

 

    몇 년 전 삼척 정나진 항에서 후진 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길가에서 초승달 같은 해변을 만났는데 매우 아름답고 정감이 가는 포구였다 . 어 릴 때 놀던 집 뒤 앞 산과 뒷산 사이의 작은 포구와 비슷한 풍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포구 양 옆에는 갯바위가 있고 가운데 모래 사장이 부드 럽게 깔려 있었다 . 그 위에 작은 전마선 몇 채가 등이나 속내를 드러내고 쉬고 있었다 . 이북고향 바다와 어쩌면 이렇게 같을까 . 감탄한 기억이 났 다 .

 

    그날 나는 김옹을 모시고 그 바닷가로 가서 옛 고향 이야기나 하면서 하루를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 그것은 내가 김옹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작은 보은이라고 생각했다 .

 

    삼척 정나진은 속초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은 잘 달려야 이를 수 있는 곳이다 . 우리는 즐거운 걸음으로 포구에 이르러 사진도 찍고 모래 사장 에 누워도 보았다 .

 

    포구에는 약한 편서풍이 불었다 . 편서풍은 하늬바람 , 또는 갈바람이 라고 해서 이북에서 피난 나온 바닷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바람이다 . 배의 돛을 펴고 고향 북쪽으로 달려 가기 제일 좋은 바람이기 때문이다 .

 

    물결은 고요하고 공기는 투명했다 . 나는 내 어릴 때 김옹과 함께 우리 집 뒤 등대 아래서 놀던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 등대에서 내려다 보면 우 리 집은 긴 초가집인데 학교처럼 길게 느껴졌었다 . 끝의 한 칸 넓이가 꺾 여져 있었다 . 김옹은 나에게 그 꺾인 부분이 우리집 광이라고 했다 . 광 에는 마른 명태짝이 꽉 차있는데 , 마른 명태 몇 마리만 가져 오라고 했 다 . 나는 급히 등대에서 뛰어 내려가 우리 집 광에 있는 마른 명태 몇 마 리를 김 옹에게 내어 밀었다 . 형과 우리 동무들은 마른 명태를 뜯어 먹으 며 봄날의 건조한 하루를 보냈다 . 명태가 맛이 있었거나 우리가 즐거워 했다는 기억은 나지 않는다 . 그런데도 그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

 

    지난 6월 중국 훈춘에 갔는데 , 시장을 둘러 보다 우연히 한 가게에 들 렀는데 명태를 판다고 했다 . 건조한 북어인데 북한산이라고 했다 . 냄새 를 맡아 보았다 . 어릴 때 내가 우리집 광에서 빼 내들고 김옹이 있는 등 대로 뛰어가던 때 맡았던 그 냄새와 같았다 .

 

    나는 그 가게에 있는 명태 한 무더기를 다 사서 속초로 가져 왔다 . 가 게 주인도 의아해하고 일행도 너무 많이 산다는 표정이었다 . 다 마르지 않은 명태에서는 나프탈렌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

 

    아내와 북한 명태를 다시 씻어 햇빛에 말렸다 . 그리고 내가 고향 등대 밑으로 가져간 명태의 양 만큼 들고 김옹에게 가져다 드렸다 . 김옹이나 식솔들이 그 명태를 맛있게 드셨는지 묻지 않았다 .

 

    우리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 그리고 그곳을 떠났 다 . 다음에는 고향 작은 벌에 가서 사진 찍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둘 다 그 말은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

 

    김 옹네는 이북에서 대가족이었다 . 큰 형도 있고 동생도 있었다 . 그의 부친은 1 . 4 후퇴 때 중학교 3학년인 김 옹과 고등학교 2학년인 작은 형 만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 나왔다 . 어린 아들 둘만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 나온 김 옹의 부친은 갖은 고생 끝에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 두 형제는 안 해본 고생이 없었다고 했다 .

 

    차를 몰고 우리가 살고 있는 속초로 돌아 오던 길에 나는 내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김 옹이 도와 준 일들을 상기시켰다 .김 옹은 숨을 한번 내 쉬고는 내가 고마워하며 은혜 , 운운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

 

    김 옹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군에서 제대하고 방황하던 시절이 라고 했다 . 입을 옷도 없고 먹을 음식은 물론 , 다리를 펴고 쉴 곳도 없을 때라고 했다 . 그때 그는 길에서 내 어머니를 만났다 . 어머니는 허리춤에 손을 넣었다 빼더니 김옹의 손에 동전 두 닢을 쥐어 주었다 . 백원짜리 동 전 두 개였다 . 육개장 한 그릇에 백원하던 시대였다 .

 

    김 옹은 그날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면서 말을 마치지 못하고 눈가에 핀 이슬을 감추느라 고개를 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