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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동화 - 이희갑 - 청대산의 소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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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756회 작성일 15-01-0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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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의 줄거리

 

선유는 연휴를 맞아 아버지를 따라 급히 청대산을 향한다. 다른 날과 달리 갑작스럽게 떠나는 아빠를 보고 선유는 불안해한다. 아빠와 약속이 된 엄마를 버스터 미널에서 만난다. 지난봄 청대산에 매우 큰 불이 났을 때 아빠가 매우 안타까워 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 때 아빠는 청대산으로 갈 기회를 찾으나 회사일로 가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연휴라고 해도 한마디 말씀도 없었던 아빠가 엄마와 선유를 데리고 청대산을 향한다는 것에는 납득이 쉬 가지 않았다.

아빠 고향에 있는 청대산을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 선유는 아빠와 청대산의 관계에 대해 조금 이해할 만한 이야기를 듣는다.

가난하고 어려운 중학교 시절 가뭄으로 인해 물이 없어 모내기를 할 수 없는 농촌에 국가적으로 학생과 공무원이 물찾기 봉사활동을 한 이야기를 들었다. 청대 산 아래 펼쳐진 딱사벌 벌판에서 선유 아빠의 중학교 친구들의 물구덩이를 파기 활동은 먼 나라 동화 얘기처럼 들렸다. 가난했지만 의리 있고 다정했던 친구들 얘기가 새롭게 들렸다. 고생 끝에 물구덩이를 파고 선생님으로부터 해산 명령이 떨 어지면 그길로 칡을 파러 청대산으로 향했다.

다섯 명의 친구들이 청대산 산속을 걸어가면서 산이 주는 느낌을 느끼며 가재골 계곡에서 가재를 잡는다. 친구들이 가재 잡기에 열심일때 문득 선유 아빠 민호는 가재골짜기 위로 올라간다. 골짜기를 오를수록 물소리 새소리와 더불어 찾아오는 특이한 청대산 만의 분위기를 느낀다. 그곳에서 민호는 이상한 감정에 약간 휘둘린다. 정신을 차린 민호가 친구들에게 내려왔지만 민호의 감정을 알아차 리기에는 가재 잡이가 너무나 재밌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낀다.

민호는 다시 친구들과 칡이 있다는 계곡으로 올라간다. 친구들은 아름다운 청대산 계곡과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수목들이 출렁거림을 들으며 칡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간다. 드디어 칡 있는 곳에 도착한 다섯 친구들은 제각기의 칡을 찾아 나섰다. 현수가 간 곳은 가재골 상류로, 형근이와 정훈이는 싸리나무 숲 너머로, 태영이는 산철쭉나무길로, 그리고 민호는 산꼭대기 방향으로 각각 흩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장과 능력으로 칡뿌리를 캐느라 땀방울을 흘린다. 민호는 끊어질 듯 이어져 들려오는 청대산 정상에서 들리는 휘파람 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7. 청대산소나무 형제들

 

“선유야, 저길 봐.”

버스 앞좌석에서 꿈나라로 가신 줄만 알았던 엄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차창 밖으로 호수가 보였다. 고개 하나를 크게 돌던 버스가 산자락을 뿌리치듯 비켜나자 넓은 호수가 보였다. 산골짜기 숲 사이로만 달리던 버스의 창문에 호수에서 반사된 빛이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야, 소양강 호수구나.”

선유가 아빠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소리쳤다. 청대산 칡 파던 이야기를 하던 아빠가 멈칫했다. 두 눈을 초롱초롱하며 이야기를 듣던 관중인 선유가 딴 짓을 하니 말하던 아빠가 멋쩍어졌다.

“야아. 참 좋다. 시원하구나.”

엄마는 호수를 향해 두 팔을 번쩍 들더니 기지개를 폈다. 선유도 엄마 를 따라 기지개를 폈다. 아빠는 좀 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같이 기지개 를 폈다.

“선유야. 우리 올 때 저기서 빙어 낚시하다 올까?”

엄마의 끝소리가 잽싸게 가로 막는 아빠 소리에 묻혔다.

“당신 두 참. 빙어 낚시는 겨울이야 겨울.”

“왜, 지금은 안 되는 거야?”

“엄마, 빙어는 겨울에 잡는 물고기예요.”

선유도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엄마 귀에 대고 살짝 말했댜.

“뭐야, 빙어는 여름엔 안 살아? 그런 거야?”

“엄마, 남들이 듣겠어. 진짜.”

언젠가 겨울, 빙어 잡이 왔다가 너무 많이 잡히는 바람에 엄마가 신이 나 소리를 연방 지르던 모습을 선유는 떠올렸다.

“어니면 말고.”

금방 분위기 파악을 한 엄마가 말끝을 흐렸다.

“피-”

선유가 아빠를 보고 웃었다. 아빠도 찡그리면서 피 웃었다.

엄마는 미안했던지 의자 속으로 다시 몸을 폭 수그리고 자는 척 했다. 선유는 다시 아빠를 의미 있게 쳐다보았다.

“아까. 딴 짓 하던 건 어쩌구,”

아빠는 딴전을 피웠다.

“아빠, 밴댕이 속이란 말 뭔지 아시죠?”

선유도 능청을 떨었다.

“알았다. 알았어. 허허.”

아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빠는 다시 기억의 저 뒤편으로 가서 이야기 줄기를 잡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청대산 산 속에서 흩어져 칡을 파던 아이들은 저마다 운명처럼 만난 칡 뿌리와 한참이나 승강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현수는 칡 줄기를 잡아당기며 걸어가다 땅 속으로 쏙 들어간 지점부터 파고 들어갔다.

“어라?”

삽날을 세워 땅을 팍 찔렀다.푹 하고 삽날이 들어가야 할 흙이 반발을 보냈다. 현수는 오른 발로 삽을 밟았다. 그래도 들어가지 않았다. 현수는 삽날이 들어가지 않은 흙을 손으로 헤쳐 보았다. 단단한 돌흙이 있었다.

“어건 뭐야.”

현수는 짜증이 났다. 현수는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툴툴 거렸다. 하지만 여기밖엔 칡을 팔데가 없는 걸 알았다. 현수는 삽자루를 두 손으로 엇바꿔 쥐고 삽날로 돌흙을 톡톡 찌르며 깨부셨다.

태영이는 처음 소나무를 칭칭 감은 칡넝쿨을 보고 실망했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소나무를 감은 넝쿨을 감긴 반대방향으로 푸니 술술 잘 풀렸다. 넝쿨은 소나무에서 두 발짝 떨어진 땅 속으로 이어졌다. 태영이가 그곳에 삽을 대고 발로 콱 밟았다. 삽이 흙속으로 쑥 들어갔다. 부드러운 모래참흙이었다. 태영이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잘 파지는 땅속의 칡뿌리가 벌써 태영이 눈앞 나타난 것 같았다.

형근이는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 달 전에 아빠와 삼촌과 같이 와서 파헤친 칡 구덩이에서 그 때 잘린 칡뿌리를 마저 캘 것인가 다른 칡을 찾을 것인가 하는 망설임이다. 마저 캐려고 하니 너무 고생했던 기억이 나고, 새로 찾으려 하니 전에 팠던 아버지 팔뚝만한 칡을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형근아, 뭘 해.”

정훈이는 형근 맘도 모르고 재촉을 했다. 사실 정훈이는 다섯 친구 중 에 가장 늦게 청대산 동네로 이사 온 친구다. 그러니 시골에서의 하는 일이 아직 궁금한 것이 많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형근이가 망설이는 이유를 눈치로 알텐데 그게 정훈이에게는 없다.

형근이는 정훈이를 한번 힐끗 쳐다보곤 결심했는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형근이의 힘찬 삽질이 구덩이에 콱박혔다. 역시 아빠와 함께 와서 작업하던 곳이 가장 좋은 곳이란 걸 알았다.

민호는 의외로 칡뿌리를 빠르게 얻었다. 물론 민호도 곧게 뻗지 않은 뿌리를 캐느라고 애를 먹었지만 가장 먼저 칡뿌리를 건져 올렸다. 다만 중간에 부러져서 더 굵은 칡뿌리를 얻지 못한게 아쉬웠지만.

민호는 칡뿌리에 묻은 흙을 깨끗이 닦아냈다. 코끝을 자극하는 칡 향기가 강하게 뱃속으로 들어가 허기가 더 졌다. 한 입 콱 깨물어 먹고 싶었지만 친구들을 만날 때까진 칡의 모습이 온전해야 하기 때문에 참았다.

민호는 잠시 누워있던 풀밭에서 일어났다. 지금 쯤 칡을 빨리 캔 친구들은 청대산 꼭대기로 올라올 것이다. 민호도 슬슬 청대산 꼭대기로 발을옮겼다.

청대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은 좁은 오솔길이었다. 산에서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들의 길 같았다. 민호는 청대산 꼭대기로 향하면서 귀를 기우렸다. 휘파람 같은 소리가 또 들릴까 해서다. 하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청대산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가파르던 산등성이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청대산 정상의 소나무 모습이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죽 올라간 기둥 끝에 마치 순록의 뿔처럼 굵은 가지가 여러 갈래로 뻗어 있고, 그 위에 푸른 솔을 이고 있는 소나무 모습은 참 늠름해 보였다.

청대산 정상에는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다.

청대산 아래에서 보면 보는 위치에 따라 세 그루로 보이기도 하고 네 그루로 보이기도 한다. 또 여섯 그루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확히 다섯 그루다. 물론 처음에는 일곱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이젠 다섯 그루 밖에 없다. 어른들 말로는 옛날에는 산 정상에만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던 게 아니라 청대산 전체가 거대한 소나무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은 물론, 눈이 내리는 겨울까지도 소나무 숲으로 꽉 들어찬 청대산은 늘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고 한다. 청대산 이란 이름도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던 청대산의 소나무들은 세월과 함께 점점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청대산 소나무들이 사라진 역사는 바로 청대산 아래 동네 마을의 역사와도 연관이 있다. 나라 잃은 일제 강점기 시대를 거쳐 남과 북이 나뉘는 분단의 시대와 한국 전쟁, 그리고 청대산 아래 전보다 더 많 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과 관계가 있다. 청대산 골짜기 마다. 산등성 마다, 산마루 마다 아름드리 우람하게 서있던 청대산의 소나무들이 마을의 슬픔과 시련의 시간과 함께 하나 둘 사라져 갔던 것이다.

청대산 마을 사람들이 급변하는 세월을 살아가는 것에 바쁘고 지쳐 한 눈을 파는 사이 논의 잡초인 피가 하나 둘 씩 뽑혀 나가듯이 청대산 소나무가 뽑혀져 가는걸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 청대산 아름 드리 소나무 숲은 사라졌다. 청대산 꼭대기에 유일하게 남은 일곱 그루의 소나무만이 청대산의 마지막 보초병처럼 서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정신 차린 뒤 바라본 청대산의 모습에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 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소나무들이 사라진 것은 전적으로 사람들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청대산의 소나무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청대 산의 소나무는 옛날처럼 언제나 청대산에서 튼튼하게 멋쟁이로 우뚝우뚝 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나무들은 사라졌다. 아름드리 푸른 솔 소나무 숲이 사라진 자리에는 잡목이 어지럽게 들어앉기 시작했다. 놀란 사람 들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우람한 소나무를 다시 본 다는 건 시간이 걸리는,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번 꺾인 나무가 그 모습을 다시 찾기는 백년도 더 넘어야 한다고 하니 백년 안에 사는 사람들은 푸른 청대산 모습을 다신 볼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조심하게 되었다. 다신 청대산에 들어가 아무 짓도 하지 않기로 약속들을 했다. 나무를 베거나 화전을 하거나. 산불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썼다. 청대산 정상에 남은 소나무 일곱 그루를 신경을 써서 보호하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아이들은 더 어린 아이들에게 청대산 정상의 일곱 소나무는 절대로 건드리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며 지냈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청대산을 바라보고 간밤에 청대산소나무가 별 일 없이 서있는 것을 보고 안도 했다. 마을 어디서나 잘 보이는 청대 산소나무는 사람들이 일을 하다 허리를 펴면 보이고, 창문을 열면 보이고, 길을 가다 얼굴을 들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청대산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하나, 둘, 셋.... 다섯, 여섯....!!”

일곱이 되어야 할 청대산소나무가 여섯 셈에서 멈췄다.

“뭐야, 내가 잘못 셌나?”

청대산을 바라 본 사람은 누구나 손가락으로 셈을 했다.

“분명히 여섯이네.”

“난 일곱으로 보이는데.”

“아니야. 분명 여섯이야.”

사람들마다 청대산을 바라보며 청대산소나무를 세느라 걸음을 멈췄다.

“청대산 소나무는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이잖아.”

“아냐, 이건 분명 아냐,”

“그러게. 일곱 형제 모습도 달라졌어.”

“맞아. 어제 모습하곤 달라. 뭔가 허전해.”

사람들은 속으로 뭔가 알아차렸으면서도 태연한 척 말들을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지방 라디오뉴스에 청대산소나무가 나왔다.

 

어젯밤. 청대산소나무 한 그루가 베어졌습니다.

어느 몰지각한 사람의 짓으로 보고 조사 중입니다.

 

청대산 아래 동네 사람들은 모두가 가슴 아파했다. 어떤 사람은 마치 가족을 잃은 것처럼 크게 슬퍼했다. 나중에 자세한 소식으로는 청대산소나무 일곱 그루 중 가장 크고 튼튼했던 소나무가 밑동만 남기고 톱으로 싹뚝 잘라져 나갔다고 했다. 청대산 아래 동네 사람들은 못된 벌목꾼을 원망했다. ‘세상에 그럴수가.’ 하면서.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여섯 형제의 소나무가 다시 형제를 잃는 일이 생겼다. 그건 사람의 짓이 아니었다. 어느 여름날, 유난히 강한 태풍이 청대산 마을을 지나갔다. 천둥과 번개가 청대산 일대를 내리쳤다. 웬만한 나뭇가지를 꺾을 만큼 거센 비바람이 불었다. 가로수가 뽑히고 노송이 부러졌다. 전신줄은 하루 종일 윙윙대며 울었다.

태풍이 지나 가고 청대산을 덮은 안개가 걷혔다.

“어라?”

사람들이 벌린 입을 닫지 못했다.

청대산소나무 형제의 모습이 또 달라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뿐이다. 사람들의 머리가 다시 갸우뚱했다.

그날 라디오뉴스에서 청대산소나무 소식이 들렸다.

 

이번 태풍으로 청대산소나무 한 그루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낙뢰에 맞은 듯 합니다.

 

청대산소나무 한 그루가 벼락을 맞았다는 말이다. 가지가 꺾이고 나무 기둥이 부러졌다. 남아 있는 몸체는 온통 불에 타 숯덩이가 되었다. 사람 들은 가슴이 아팠지만 자연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며 맘을 달랬다.

그리고 이제 청대산에는 다섯 그루 소나무만이 서 있게 된 것이다.

민호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구들을 기다리며 청대산소나무 다섯 형제 가까이로 다가갔다.

청대산소나무를 가까이에서 보긴 처음이다. 청대산소나무는 동네 사람 들이 보호하는 나무라 가까이 가면 안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있었다. 그래서 몇 번 청대산 정상에 올랐지만 청대산소나무 근처에는 가질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물론 민호가 파던 칡 장소가 정상과 가장 가까운 지점이긴 하다. 하지만 민호는 가재골 골짜기에서 이상한 분위기에 빠진 자기 기분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도 헤어질 때 산꼭대기 정상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아직 친구들이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민호는 청대산소나무 아래서 소나무 위를 쳐다보았다. 산 아래서는 다섯 그루가 한 몸처럼 붙어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와보니 약 3~4미터 간격을 두고 다섯 그루가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다섯 그루마다 특징이 있었다. 가장 큰 소나무 기둥은 한 사람 팔로 다 감싸 안을 수 없을 정도로 굵었다. 그리고 올라가면서 약간 휘어지다가 다시 꼿꼿하게 하늘로 향해 치솟았다. 두 번째로 큰 소나무는 아주 몸통이 많이 휘어졌다. 구불구불한 몸 기둥에 솔잎도 무성하게 이고 있었다. 바람을 가장 많이 받을 것 같았다. 세 번 째 소나무는 민호 키보다 조금 높은 곳 기둥에서 큰 가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여전히 푸른 솔을 가득 이고 있었다. 네 번째 소나무는 아주 이상한 모습이다. 이리저리 몸이 구부러진 채 첫째 소나무를 향하다 세 번째 소나무 방향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소나무 방향으로 몸을 틀다가 위로 솟아올랐다. 한마디로 말하면 앉은뱅이 자세를 하며 구불구불 휘어저 가다가 솟아 오른 모양이다. 다섯 번째 소나무는 가장 굵기 가늘었다. 그러나 그런 나무도 민호가 한 팔로 안기는 버거울 정도다. 하지만 소나무 형제들 가장자리에서 가장 곧게 쭉 올라간 잘 생긴 소나무다.

민호는 소나무 가까이에 가서 껍질을 만져 보았다. 두껍고 모자이크 타일처럼 붙어 있는 껍질이 오랜 나이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힘차 게 살아 있는 강한 생명감을 느꼈다. 다섯 형제 소나무가 서 있는 가운데 쯤에 커다란 그루터기가 하나 있었다. 아마 오래전에 베어진 가장 으뜸 소나무 자국인 것 같았다. 둥글어 사람이 앉기에 좋은 그루터기였지만 푸석푸석하게 보였다. 오랜 비바람을 맞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다섯째 나무 옆에도 언젠가 벼락을 맞았다는 나무의 흔적이 보였다. 숯 검둥이가 되었다는 나무 모습은 없어졌지만 밑동으로부터 불규칙하게 꺾어진 50 센티미터 가량 솟아오른 고목자리가 보였다. 거뭇거뭇한 땅속으로 아직 미련이 있어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일까. 이미 생명을 다한 나무의 잔재 모습이 허무하게 보였다.

민호를 둘러싼 청대산소나무 속은 어딘가 위엄이 있어 보이고 한편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산 정상으로 부는 모든 바람이 청대산소나무 가지에걸리는걸 알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소나무에서는 소리가 났다. 솔잎에 쏴아 하는 소리, 가지에서 휘잉 거리는 소리. 기둥에서 웅 하는 소리, 그리고 진짜 이상한 것은 그 소리가 다 모아져서 민호의 귀에 이상한 신호음을 주는 것이었다.

‘저 소리였나?’

민호는 가재골짜기에서 들었던 휘파람 소리를 떠올렸다. 아주 낮은음 으로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청대산소나무들이 함께 내는 소리 가운데는 분명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도 있을 것이고 그 보다 사람이 낼 수 없는 더 낮거나 높은 소리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소나무들의 의사소통인가? 그들만의 대화. 그러면 소나무의 감정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말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건 아닐까’

청대산소나무에 또 한바탕 바람이 거쳐 갔다. 다시 청대산의 소나무들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느낌과 해석이 달라지는 그런 소리. 오케스트라의 2악장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8. 청대산소나무 아래서

 

“민호야!”

산 서쪽 등성이에서 태영이 목소리가 들렸다.

민호는 산등성이쪽을 향해 달려갔다. 태영이가 어린아이 다리통만한 커다란 칡을 하나 어깨에 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나 먼저 온 거 어떻게 알았어?”

“너 머리가 살짝 보였어.”

태영이의 얼굴이 번질번질 하게 보였지만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수고 했어. 근데 딴 애들은?”

“나야 모르지. 각자 헤어졌는데.”

“그래도 너 하고 모두 비슷하게 와야 하는 거 아냐?”

“나야 운이 좋았지.”

태영이는 부드러운 모래참흙 속에 있던 칡뿌리를 쉽게 판 일을 떠올리 며 웃었다.

“근데 넌 뭘 하고 있었어. 벌써 왔었어?”

“아니, 나도 좀 전에.”

민호는 대답을 하며 청대산소나무들을 쳐다보았다.

“왜 무슨 일 있어?”

태영이가 민호의 모습이 좀 이상했던지 물었다.

“아니.”

민호는 머리를 옆으로 흔들면서도 선뜻 자기 기분을 말하지 못했다.

“뭔가 있는데...”

태영이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민호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 뭘 봤어?”

“아니, 저 그게 말이야...”

그 때 형근이 얼굴이 두 사람 앞에 불쑥 나타났다.

“뭐야, 기척도 없이,”

민호와 태영이는 조금 놀라면서 형근이를 쳐다보았다.

“내가 불렀는데 대답 안한 사람은 누군데.”

“뭐, 언제.”

“니들 무슨 말 재밌게 하는 진 몰라도 그랬어.”

“아, 미안” 태영이가 말을 했다.

“내가 민호에게 뭘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서....”

“참, 정훈이랑 같이 안갔어?”

민호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아, 정훈씨. 저기저기 오고 있지롱.”

형근이가 산 정상아래 비탈진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정훈이는 보이질 않았다.

“뭐야. 정훈일 떨거뜨리고 왔단 말야?”

태영이가 발끈했다. 그러자 정훈이가 나타났다.

“너네 이야기 다 들었어. 칡을 좀 깨끗이 씻느라 늦었어.”

정훈이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화사한 표정을 지었다. 정훈이의 표정을 봐서 안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짐작했다.

“칡은 형근이가 다 팠어. 그러니 내가 미안하잖아. 그래서 칡 씻는 거 메고 오는거 다 내가 하겠다고 했지.”

“와, 환상의 콤비였네.”

태영이가 금방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모두 웃었다.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청대산소나무들 솔잎 사이에서 파도소리가 또 났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청대산소나무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우웅!

청대산소나무들이 울음소리를 냈다. 아이들은 조금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예민한 정훈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민호는 첫째 소나무 몸통을 손바닥으로 대어보았다.

“야, 소나무가 울려. 아니 떨려.”

아이들이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각각 자기 앞에 있는 소나무 몸통에 손 바닥을 대었다. 그러다 서로 눈짓을 하며 웃었다. 그렇다는 뜻이다.

“소나무도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자기들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민호가 감을 잡으며 말하자 태영이가 민호 어깨를 툭 쳤다.

“또 감상적인 학생이 나타났네.”

그 때 형근이가 뭔가 놀란 사람처럼 눈알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현수는?”

아이들은 불덩어리에 댄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래. 현수가 안 왔다. 아직.”

민호가 산등성이로 뛰어나갔다.

“현수야. 현수야.”

민호는 골짜기 낭떠러지기가 시작되는 곳으로 뛰어가며 현수를 불렀다. 아이들도 함께 현수를 불렀다.

현수는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아이들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스쳤다.

“어디로 갔지? 내려가 보자.”

민호가 앞장을 섰다.

“가재골로 가는 골짜기 상류로 간 것 같애,”

태영이가 말했다.

“자, 그럼 이쪽 길이야.”

민호가 다시 길을 잡자 아이들이 뒤따랐다.

“현수야. 현수야.”

청대산 아래서 현수야 하는 메아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벼랑길로 엉금엉금 내려갔다. 한참 내려가는데 가재골로 가 는 모퉁이 굽은 골짜기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이들은 멈춰서 기다렸다. 잠시 후 사람의 까만 머리가 나뭇잎 사이로 얼핏 보였다. 그러더니 곧 몸 전체가 나타났다. 현수였다.

“현수야!”

아이들이 일제히 현수에게로 달려갔다. 미끄러지고 뒤뚱거리고 야단이 났다. 현수가 힐끗 아이들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근데 표정이 영 아니었다.

“현수야.

아이들이 걱정되어 다시 불렀다. 현수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감정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왜 늦은 거야.”

눈치 없이 형근이가 말하자 현수는 걸음을 탁 멈췄다. 그리고 머리를 푹 숙였다. 아이들이 현수에게 다가 갔다. 현수는 땅만 내려다 보았다. 민호가 다가가 현수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면서 살짝 들어 올렸다. 현수의 두 눈에 눈물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보니 현수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할 칡이 없었다. 삽도 없었다. 모두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정훈이가 현수가 온 길 위에서 칡을 발견했다. 칡은 정말 볼품이 없었다. 엄지손가락 굵기만 했 다. 거기에다 배배 꼬인 칡 몸통에 얼마나 문질렀으면 보풀이 일어나 쓰 다 버린 새끼줄처럼 보였다. 아무리 형편없는 칡이라도 손목 둘레만큼은 해야 하는데.

아이들은 금세 알아차렸다. 현수는 새끼줄 같은 칡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 받았다는 걸.

사실 현수는 운이 나빴다고나 할까. 완전히 돌밭사이에 끼어있는 칡과 씨름하느라 온 힘을 다 뺐다. 아무리 삽질을 해도 돌밭에 부딪힌 삽은 팅팅 튀며 현수에게 도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돌 하나를 재끼면 칡 줄기는 얄밉게도 그 밑에 있는 또 다른 돌 틈 사이로 모습을 숨겼다. 현수는 다시 그걸 삽으로 캐고 또 다시 돌을 재끼고 허면서 끝없이 칡과 숨바꼭질을 했다. 그러나 더욱 현수를 돌게 한 것은 그렇게 파들어 간 칡이 엄지손가락 이상 더 굵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와서 손가락 칡을 포기하기엔 그동안 노력과 시간과 흐름이 만만치 않음을 느꼈을 때 현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더 이상 다른 칡을 찾기에는 시간이 없다.’

현수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 굵기가 팔뚝 굵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 서 더 파고 들어갔다. 시간이 너무 갔다. 그만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현수는 이미 파헤쳐 말라 비뜰어진 칡을 두 동강으로 나누려고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아무리 삽으로 팍팍 찔러 봤자 칡뿌리 줄기는 끊 어지지 않았다. 아삭한 칡 속의 전분 대신 거친 줄기 성질로 바꿔진 칡뿌 리는 현수의 삽날에 요지부동이었다. 현수는 성질이 나서 얼굴이 화끈거 렸다. 현수는 삽자루를 비스듬히 쥐고 칡 몸뚱이를 마구 내려쳤다. 하지 만 여기저기 삽날 생채기만 생길 뿐 칡은 끊어지지 않았다. 나중엔 칡이 완전히 보풀이 나고 말았다.

‘이젠 그만이다. 그만.’

현수는 포기를 했다. 이제 친구들한테 가야한다. 그런데 이런 칡으로는 안 된다. 세상에 이런 먹을 수도 없는 창피한 칡을 들고 갈 수는 없다. 그 렇다고 빈손으로 가는 것도 체면이 아니다. 현수는 자기 키보다 두 배나 더 긴 뱀모양 구부렁한 칡을 질질 끌고 걸었다. 그때 아이들 소리를 들었다. 현수는 순간 자기가 들고 있던 칡을 내던졌다. 그런데 칡에 감겨 있던 삽도 함께 내동댕이쳐졌다.

“현수야. 고생했어.”

민호가 현수의 등을 두드렸다.

“현수야 괜찮아. 우리가 이렇게 굵은 칡을 많이 캤어.”

태영이가 두 손을 마주 보게 하며 두툼한 물건을 쥔 모습을 했다.

“현수아, 괜찮아”

정훈이가 현수의 얼굴에 뒤범벅이 된 땀과 진흙을 닦아주자 현수는 손등으로 눈을 한번 쓱 훔치더니 살짝 웃었다. 아이들도 함께 웃었다. 나중에는 모두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하. 아하하하. 갑자기 청대산 봉우리 위에서 아이들이 거침없이 웃는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아이들은 다시 청대산소나무 아래로 모였다. 민호는 캐온 칡을 한데 모았다. 태영이가 캐온 가장 통통한 칡을 미리 준비해온 실톱으로 썰었다. 칡 향기가 물씬 풍겼다. 아이들의 코가 벌렁거렸다. 뽀얀 전분의 물이 흘러내렸다. 먹음직한 칡이었다.

“현수가 잴 고생했으니 현수 먼저.”

민호가 칡 한도막을 현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현수는 얼떨결에 당하는 일처럼 화들짝 놀라며 받았다.

“미미 미안해.”

현수는 부끄러워하며 칡을 입에 댔다. 아이들이 또 한바탕 웃었다. 이번에는 현수도 머뭇대다가 함께 웃었다.

아이들은 캐온 칡을 열심히 씹었다. 입속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향긋한 칡 물이 나올때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톱으로 손가락 길이 정도르 썰어 손에 쉬고 조금씩 뜯어 먹었다. 단물이 다 빠지면 뱉어내고 다른 칡을 먹었다. 한참을 씹으면 턱이 아프다. 껌 씹는 거에 몇 배는 힘을 주어야 한다. 꼭꼭 씹어야 단물이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았다.

한참 칡을 씹으며 아이들은 청대산소나무아래에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동쪽에는 바다가 펼쳐졌다.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이 가물거리고 바다 위에 떠있는 배들이 따개비들이 붙어있는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동해바다 푸르른 빛깔이 하늘보다 더 파랬다. 동해바다를 같이 보던 청대산소나무 솔에서 문득 바다소리가 났다.

서쪽은 우뚝 솟은 거대한 산이 높은 담장처럼 보였다. 설악산이다. 화채봉과 용아장성 줄기가 서쪽하늘을 가로막고 이미 산 아래는 어둡게 산 그늘이 지고 있었다. 설악산 쪽을 향하던 청대산소나무에서 솔잎이 두두둑 소리를 남기며 떨어졌다.

북쪽은 설악산에서 금강산으로 이어진 산등성이들이 고만고만한 키로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었다. 휴전선 근방 작은까치봉 줄기가 아스라이 보였다. 키 큰 청대산소나무에서 보면 아마 금강산도 보일 것이다. 갑자기 청대산소나무에서 떨리는 소리가 났다. 우우우웅.

남쪽에는 해안가를 끼고 달리는 길이 보였다. 산모롱이 때문에 길은 구불구불 이어졌다 끊겨졌다 하면서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해안으로 밀려드는 파도가 하얗게 보이고 모래사장이 빛나게 펼쳐져 있었다. 청대산 소나무의 검푸른 잎에 바람이 깃들자 나무가 조금씩 흔들리며 솔향기를 품어내었다.

아이들은 그루터기에 앉았다. 칡을 많이 씹은 입가에는 어느새 새까맣게 물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즐거웠다. 쳐다보면 새까만 입술을 쭉 내밀고 오히려 자랑한다. 그런 다음 다시 깔깔 대고 웃는다. 산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아이들은 산바람 강바람 노래를 불렀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노래를 부르니 나른해 졌다. 칡도 어지간히 먹으니 턱도 아프고 배도 불러왔다.

“얘들아, 좀 쉬다 가자, 웃옷 벗어.”

민호는 아이들 웃옷을 그루터기 옆에 펼쳤다.

“좀 누웠다 가자.”

아이들이 와서 누웠다. 누운 아이들은 청대산소나무들 줄기가 더 거대 하고 우람하게 뻗어 오른 걸 느꼈다. 빙 둘러선 다섯 그루 청대산소나무 들의 가지들이 서로 엉기어 검푸른 솔지붕을 만들어 아이들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하늘을 가렸다. 아이들은 포근함을 느꼈다. 떠들던 아이들이 잠시 조용했다. 청대산소나무에서 들리는 여러 소리가 이제야 아이들 귀에 들리기나 한 듯이.

청대산소나무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거나 산새들이 울거나 할 때 그랬다.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갈 때도 그랬다. 아이들이 소나무 밑에 누우니 더욱 그랬다. 아이들은 신기한 느낌이 들면서도 나른해 지는 기분을 그냥 놔두었다.

아이들은 점점 더 나른해 졌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졸음이 거센 바람처럼 다가왔다. 눈을 스륵 감았다. 그럴수록 소나무의 이야기 소리가 더욱 분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문득 민호는 이런 생각을 했다. 청대산 소나무들이 오랜 세월동안 청대산 봉우리에 서 있으면서 바라보았던 수 많은 일들. 얼마나 많았을까. 그래서 청대산소나무들은 때론 파도소리 같이, 때론 땅이 울리는 소리 같이. 때론 휘파람 소리를 내며 이야기 하는건 아닐까. 엄청난 격변의 세월을 바라보며 말없이 오랜 세월을 그냥 서있는 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비록 나무라고 하더라도.

민호는 가재골 위에서 들은 휘파람 소리를 생각했다. 분명히 들었던 그 휘파람 소리. 그 때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 청대산소나무들이 가지에 걸린 수많은 사연들의 소리들은 아닌지.

민호는 청대산소나무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청대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 온 일들을 다 알고 있을까.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헤어진 이야기를, 사람이 살지 않던 청대산 아래에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이 생겨난 일도. 현수네 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일도, 영랑호 얼음지치기에서 잃어버린 태영이형 이야기도. 서울에서 이사와 설악산 구조대가 되었다가 사라진 정훈이 아버지 이야기도. 거대한 해일이 덮여 집이 몽땅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린 형근이네 일도 다 보았다는 말일까.

민호는 살그머니 일어나 아이들을 보았다. 현수는 벌써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었고 태영이 정훈이, 형근이도 자고 있는지 기척이 없다.

‘저 아이들도 느꼈을까. 소나무들의 말을.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소나무가 대신하는 건지도 모르는데.’

민호는 이런 생각을 하다 친구들도 자기처럼 무언가를 느끼며 그것이 꿈속에 나타나 헤매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는 다시 누웠다. 다시 스르륵 눈이 감겼다.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잠시만 쉬다가 산을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거리를 두고 있던 청대산 소나무들이 다가왔다. 나를 이야기 세계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민호는 가물거리는 정신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9. 헬로를 외치며 손을 흔드는 아이

 

“선유야, 자고 있니?.”

아빠가 선유를 흔들었다. 선유가 눈을 번쩍 떴다. 아빠의 얼굴이 코앞 에 까지 왔다. 선유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얘 봐. 아빠 말시켜 놓고 자는 게 어딨어.”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졸았어요?”

선유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제가 오래 잤나요?”

“아마,”

엄마가 의자 속에 쏙 들어가셨던 몸을 일으키며 끼어들었다. 엄마 얼굴에는 쌤통이라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아빠 곁에 앉지도 못하게 차지하더니 잠이나 자려고? 하고 약 올리시는 표정 같기도 했다. 선유는 상황 판단을 빨리했다.

“죄송해요. 아빠. 근데 어디까지 이야기 하셨어요?”

“글쎄, 난들 아냐. 한참 이야기 하다 보니 넌 꿈속에서 헤매던데?”

선유는 아빠의 얘기를 가만히 되 새겨 봤다.

“그래 칡 캐던 아빠 친구 현수아저씨가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갔다는 이야기까지는 기억나요.’

“으 돌겠네. 선유야. 진짜진짜 중요한 얘기를 못 들었다니.”

아빠는 아주 아쉬운 얼굴을 하며 선유가 안됐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엄마는 여전히 ‘쌤통’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아빠. 아빠 얘기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그만 졸음이 깜박 찾아 와서 그랬나 봐요.”

선유는 머리를 긁으며 졸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저기 봐라.”

갑자기 엄마가 소리를 쳤다. 버스는 기다란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양쪽 절벽 사이로 강이 흐르고 그 강가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방 낚싯대를 올리고 있었다. 그 때마다 낚싯줄에는 물고기들이 팔딱 거리며 딸려 오르고 있었다. 햇빛에 하얀 배를 반짝이면서 말이다.

엄마는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빠와 선유가 말싸움 하든 말 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빠가 선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현수아저씨의 못들은 이야기를 마저 해 줬다.

“현유야, 아빠는 그날 청대산소나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기에서 다시 십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지. 아빠는 그 때 청대산소나무들은 다섯 살 내가 한 일들을 다 알고 있는 걸 확인했어.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청대산 아래 청대산소나무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일도 알고 그 이야기를 오랜세월동안 하며 지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

현유는 아빠가 청대산소나무 아래에서 다시 다섯 살 어린 시절 민호로 돌아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버스는 다리를 지나면서 계곡의 물살을 잠깐 보다가 다시 긴 터널로 들어가고 있었다.

 

“헬로, 헬로”

아이들이 신작로에 쭉 늘어섰다. 아이들은 손을 흔들었다. 미군들을 태운 군용트럭이 지나가고 있었다. 민호도 아이들 틈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민호는 다른 아이들 보다 조금 늦게 나왔다, 민호엄마가 민호를 예쁘 게 치장하느라 그랬다. 머리를 곱게 빗기고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입 술을 빨갛게 칠하고 눈에 띄는 노란 옷을 입혔다.

하루에 한두 번, 어떤 날은 하루에 수없이 지나가는 미군들의 행렬에 아 이들은 마치 미군들과 만나기로 약속이나 한 듯 나와 손을 흔들었다. 미군들도 귀여운 한국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던져 주었다. 그건 그 때 한국 아이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미군들의 전투식량인 씨레이션과 초콜릿, 과자, 장난감, 공책, 연필 등 종류를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은 가난과 피난 속에 살던 한국아이들에겐 마치 하늘나라에서 내려오는 선물이었다. 씨레이션을 열고 먹어보는 음식 하나하가 입속에서 녹을때 정신까지 팽 도는, 완전 딴 세상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생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장난감과 온갖 물건은 보물 중에 보물이었다.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였다. 한반도 남쪽을 밀고 내려온 북한 군이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후퇴하는 북한군과 북한을 도왔던 중공군은 계속 북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한반도를 둘로 갈랐던 38선은 북한의 남침으로 깨졌다. 그리고 북한군은 서울을 빼앗고 대전, 대구까지 빼앗은 다음 마지막 부산을 빼앗으려고 했다. 부산까지 빼앗기면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북한에 나라를 빼앗기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절대절명의 시간이었다. 그때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다.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연합군 함대가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을 탈환했다. 남쪽 깊숙이 내려간 북한군은 허리가 잘렸다. 힘을 잃은 북한군은 패전의 패전을 거듭하며 북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원래의 38선까지 밀려 갔지만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은 멈추지 않았다. 북한군은 그들의 수도 평양도 빼앗기고 압록강까지 밀려 나갔다. 이젠 북한정부의 몰락이 눈앞에와있었다. 한국전쟁 처음과는 완전히 전세가 뒤바뀐 것이다. 하지만 다시 전세가 바 뀌고 말았다. 어마어마한 수의 중공군이 북한군을도와 유엔군과 국군에 맞섰기 때문이다. 뜻밖의 중공군과 모진 강추위라는 두 개의 적 앞에 유엔군과 국군은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남으로 후퇴했다.

그 때 북한에 살던 많은 주민들이 남으로 내려왔다. 공산주의 치하 북한 에서 더이상 살 수가 없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택한 것이다. 북한에 살던 사람들은 유엔군과 국군을 따라서 남한으로 오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미기 시작했다. 청대산 아래 동네도 그렇게 해서 생겨난 도시였다. 민호네 가족도 그렇게 청대산 아래 동네에 살게 되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38선까지 내려와 멈추려고 했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이 맹렬한 기세로 밀고 내려왔기 때문에 다시 서울을 남겨둔 채 남쪽으로 밀려나갔다. 그러나 곧 전열을 재정비한 유엔군과 국군이 반격을 하였다.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되찾은 다음 38선이 있는 판문점까지 진격하였고 동부전선은 38선을 넘어 금강산 아래까지 진격하였다. 그리고 몇 년째 더도 덜도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고 그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곧 휴전이 된다는 소문이 퍼졌다. 휴전이 되면 한국전쟁은 끝난다. 휴전은 사실 전쟁의 끝은 아니다. 하지만 전쟁은 멈추게 되는 것이다. 남한 대한민국과 북한정부는 휴전이 되기전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전보다 더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었다.

청대산 동네는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던 38선 이북에 있었다. 그러나 이젠 국군이 지키는 대한민국 땅이 되었다. 이런 지역을 수복지구라 했다. 청대산 동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북한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원래 살던 사람. 또 여기저기 피난 다니다 온 사람들로 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도시가 하나 생겼다. 한국전쟁이 낳은 도시라고 할까.

청대산 동네는 유엔군과 국군의 전초기지였다. 청대산 북쪽 얼마 되지 않은 곳은 밤낮 가리지 않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청대산 봉우리에 올라서 보면 북쪽으로 전투하는 적군과 아군의 진지 까지도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밤이 되면 남북으로 수없이 많은 불빛이 오고가는걸 볼 수 있었다. 남,북 군인들이 서로 쏘아대는 총과 대포의 불빛이었다. 또 동쪽 먼 수평선에는 거대한 군함들이 유유히 뱃머리를 북쪽 으로 향해가는 모습이 보이고 때론 전투기 편대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청대산 동네에는 하루 종일 쿵쿵하는 대포 소리와 웅웅 하는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청대산 신작로에는 쉴 새 없이 탱크와 포차, 군용 트럭이 오고 갔다. 국군의 행렬도, 유엔군의 행렬도 끊이지 않았다. 청대산 마을로 미군이 지나가는 날은 청대산 동네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날이다. 나가서 손만 흔들고 헬로만 외치면 무언가 생각지도 못하는 귀한 물건 하나는 건 진다. 때론 뜻밖에 구두라든지, 장화. 코트 같은 어마어마한 물건도 얻는다. 미군이 던져 주는 선물의 종류가 날이 갈수록 다양해 졌다. 그러다 갑자기 선물이 멈췄다. 그런 행위는 좋은 게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미군도 자제하고 선물을 얻으러 나가는 주민들도 자제하게 되었다. 하지만 걸음마를 겨우 띈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미군이 지나가다 길가에 서 있는 어린아이를 보면 장난감이나 초콜릿 정도는 던져주고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미군들이 지나가면 민호 또래 아이들이 나가 헬로 헬로를 연발하며 미군들에게 손을 흔들게 되었다.

민호도 한참 손을 흔드는데 어디선가 날아왔는지 떨썩 하는 소리와 함 께 민호 발앞에 종이 뭉치가 떨어졌다. 민호는 얼른 뭉치를 주웠다. 빳빳 한 기름종이 뭉치였다. 민호는 종이에 붙여있는 테이프를 뜯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노란 생고무로 만든 코끼리 인형이었다. 코끼리의 코가 종이 밖으로 자꾸 삐져나오려고 했다. 민호는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정말 신기하고 이상한 선물을 받았다. 민호는 트럭에 앉아 멀어져가는 미군병사들의 모습을 찬찬히 보았다. 코끼리 인형을 던진 미군아저씨가 누굴까. 하지만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민호를 보고 던진 건 사실이나 민호는 알아차 리지 못했다. 민호는 사라져가는 트럭을 향해 계속 손을 흔들었다.

“헬로. 헬로.”

민호는 얼른 집으로 뛰어왔다. 엄마에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엄마가 웃으며 민호를 안았다.

“우리 민호, 오늘도 한건 했네”

엄마가 종이 뭉치를 다 헤치자 아까보다 더 통통하고 예쁜 코끼리가 나타났다. 엄마 두 손 합친 거 보다 조금 더 큰 코끼리인형은 바닥에 세워놓아도 쓰러지지 않았다. 민호가 코끼리 몸통을 잡자 삐익 하는 휘파람 소리가 났다.

“어머, 신기한 코끼리네. 소리까지 내고.”

민호는 몸통을 계속 눌렀다. 코끼리는 그럴 때 마다 삐익삐익 하고 소리를 냈다. 얼굴에 가만히 대어보니 부드러운 생고무의 촉감이 느껴졌다. 특유의 고무냄새와 앙증맞은 모습에서 나는 삐익 소리와 함께 코끼리인형은 민호가 잠시도 손에 놓을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초저녁이 되어 아빠가 오셨다. 아빠는 며칠에 한번 오신다. 어떤 때는 거의 한달 만에 오시기도 한다.

“어, 우리 민호, 그새 많이 컸구나.

아빠가 민호를 덜렁 안았다. 민호의 손에 들린 코끼리인형에서 삐익 소리가 났다.

“어, 뭐야. 멋진 코끼린데. 어디서 났어?”

아빠가 놀라며 코끼리인형을 쳐다보다 민호를 보았다. 민호는 가만히 웃었다. 엄마가 대신 오늘 일을 이야기 해 주었다.

아빠는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간다고 했다. 민호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무서운 마음도 들었다. 아빠는 군인이시다. 부대의 보급을 총 맡아 하신다. 전선에서 전투하는 군인은 아니지만 후방에서 군인들의 식량과 생필품을 전방으로 차질 없이 보내는 일도 전투하는 사람만큼이나 힘들고 중요하다. 지금은 한국전쟁의 막바지다. 작은 봉우리 하나. 조그만 들판 하나라도 더 빼앗아야 하는 심각한 상태다. 휴전이 되면 그대로 끝이다. 민호는 그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다. 코끼리인형을 쥔 손에 땀이 배었다. 마음속으로는 아빠, 가지마. 하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민호는 안다. 안다는 것 보다 느낀다가 맞다. 아무리 작은 어린아이라도 무서운 전쟁이 계속되고 이 상황 속에 아빠가 있다는 엄청난 현실을.

“이번에는 피해가 많았어.”

아빠는 최근의 전선 상황을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덮여 있었다.

“351고지를 탈환해야 하는데 실패했어. 워낙 쟤들이 죽기살기로 대드니 우리 측도 피해가 많았어.”

351고지는 금강산 바로 남쪽 고지로 그 근방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351고지만 빼앗으면 금강산도 찾을 수 있다. 북한에서도 금강산은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저항 했다. 351고지는 아침에 국군이 빼앗으면 저녁에 북한군이 빼앗고 다시 저녁에 빼앗기면 아침에 다시 찾기를 여러 번 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고지위에 엄청난 포탄이 떨어지고. 산 정상이 몇 미터나 깎였다.

“백마고지는 찾았다는 소식이야.”

중부전선에 있는 백마고지 역시 빼앗고 빼앗기는 엄청난 전투로 양쪽 군인들의 많은 희생이 나고 있었다. 민호는 어른들이 걱정하는 그 공포가 고스란히 자기에게도 스며들고 있음을 느꼈다.

“이번에 좀 오기 힘들 것 같소. 저 351고지를 끝장내야 하거든.”

아빠는 입술을 지그시 물더니 민호를 다시 한 번 안았다.

“민호야. 코끼리랑 잘 놀아. 아프지 말고.”

“아빠, 가?”

“민호가 튼튼하게 코끼리랑 잘 놀면 아빠는 금방 또 올 거야.”

아빠가 민호를 내리주면서 엄마에게 얼굴을 돌렀다. 엄마의 눈에 눈물이 하나 가득 고여 있었다.

아빠는 그 밤으로 다시 전선으로 떠나셨다. 민호는 웅웅거리는 하늘과 쿵쿵거리는 대포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어두운 밤에 엄마 곁에서 코끼리 인형을 볼에 대고 죽은 듯이 숨을 쉬며 잠을 청했다.

민호가 다시 눈을 떴다. 청대산소나무가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친구들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도 잠을 자는 건지, 자는 척 하고 쉬는 건지. 아니면 청대산소나무의 말을 알아듣고 나처럼 자기의 기억을 따라 여행하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청대산소나무는 다 알고 있다. 적어도 이 삼백년의 세월을 살면서 청대산 아래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다 보았으니까. 그리고 묵묵히 속으로 이 야기를 쌓아두었고 있다가 이야기를 해달라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청대산 소나무는 그 사람이 원하는 만큼의 이야기를 해주며 기억의 그곳으로 여행도 함께 한다는 걸 민호는 믿었다.

민호는 반 바퀴 휘어졌다 올라 간 넷째 소나무를 껴안았다. 역시 우웅 하는 울림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넷째는 민호의 코끼리인형 마지막 이야 기를 말해 주었다.

민호 아빠는 그 후 두 달이 채 안되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주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돌아오셨다. 휴전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것이다. 351고지는 결국 다시 찾지 못했다. 그래서 금강산도 찾지 못했다. 지금은 모두 북한 땅에 있다. 코끼리인형은 그 후로도 칠년을 민호와 함께 지냈다. 어느 날 코끼리인형이 사라졌다. 혼자 걸어 나갔는지 누가 데리고 갔는지 그걸 아직도 모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