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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꽁트 - 이은자 - 어업인의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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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365회 작성일 15-01-0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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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인의 날

 

2013년 4월 1일 강원도 속초시 어업조합 앞 공터에서 삼십여 년 묵혔 던 ‘어업인의 날’ 행사를 갖게 됐다. 오래 전에 없애버렸던‘어업인의 날’ 행사라니? 웬 뚱딴지같은?

진즉에 이런 행사를 이어오며 어부들의 시급한 애로 사항을 타결해 주었어야 맞다. 그렇더라도 오늘 열리는 이 대회야 말로 아주 의미 있고 고무적임에 틀림없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농업인에 비견해서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보호망이 열악하기 그지없던 세월이 꽤 길었다.

어부들에겐 그 흔한 보험도 등을 돌렸다. 게다가 기름, 얼음덩이조차 부족해서 출어를 못하는 배들이 많았다. 그런 시기에 이들을 보호하고 후원해주던 기술혁신에 국가는 소극적이었다. 겨우 어선 감축정책이 고작 이었다.

일본과 바다 영역을 놓고 가를 때도, 우리 어부들 입장에서라면 전적으로 불리한 협상을 체결했다. 바다의 면적만 크게 잡으면 뭐하나, 고기들이 다니는 해역이 거의 일본 쪽에 넘어갔는데 말이다.

‘해양 수산부’가 새로이 생기는 것은 너무 늦었으나 이제라도 다행이다. ‘국토를 푸르게’구호를 외쳐대면서‘산림청’을 없앤 지도 오래전 일 이다. 대학에‘임학과’는 왜 있는가? 그 존재의미가 무색했다. 임학도들 이 뜻을 품고 국토에 좋은 수종을 배양 관리해야 함에도 그들은 졸업 후 겨우 구파발 변두리 화훼단지의 작은 땅 비닐하우스 안에다 원예업을 차리는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강원도 속초 설악산 일대만 해도 소나무 군락지 곳곳에서 누렇게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목재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가. 과거 5~60년대만 해도 수복지구 최북단 거진, 대진항을 비롯 속초항엔 500 여척의 어선들이 하루에 잡아오는 명태가 15만 톤에 달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명태 못 먹어본 사람은 없지 싶다.

그 시절 어부들은 12월에서 다음해 3~4월 까지, 불과 서너 달 명태를 잡은 돈으로 일 년을 살았다. 집집마다 야트막한 집 윗방에는 천장에 닿도록 쌀가마를 쟁여 놓곤 했다. 쌀가마의 높이는 그 어부의 경제사정을 상징하는 잣대였다. 그 뿐만 아니었다. 여름철엔 오징어작업 또한 지금과 는 비교가 안되게 풍어였다. 마침내 속초에는 마치 미국 서부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노다지를 따라 꾸역꾸역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속초읍 작은 어촌이 수복지구에서 민정으로 이양 된지 얼마 안 가서, 인구 5만을 넘었으므로 시(市)로 승격 오늘에 이르렀다.

명태 배는 새벽 2~3시경에 출항해서 당일 저녁 5~6시경에 부두로 돌아온다. 500여척 배가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밝히며 떼 지어서 내항(청초호)을 떠나 축항 끝을 돌아 바다로 나가는 관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어협 앞을 지나‘임검소’에서 출항계를 받고 나간다. 갯배 물목은 언제나 병목 현상을 빚었다. 저녁 6시를 전후해서 생태는 조합에 의해 입찰을 거쳐 전국 각 처로 나간다. 대부분 생태는 변두리 덕장에 실려 간다.

어부들은 낚시함지를 식구에게 내 맡기고 반주를 곁들여 이른 저녁밥을 먹고 잠에 빠진다. 헝클어지고 엉켜 떡이 된 낚시를 가족들이 둘러 앉아 왼 종일에서 늦어지면 밤중까지 하나하나 풀고 당기고 빙빙 돌리고 해서 ‘쪼삣대’에다 차곡차곡 가지런히 꿴다. 그 행위를‘낚시 가린다’라고 한다.‘쪼삣대’는 청대산 자락에 자생하는 대나무로 만든다. 얼마든지 있다. 쪼삣대 한 대에 대략 150여개의 낚시를 꽂는다.

가려진 낚시는 짠물을 슬쩍 헹궈내서 빨래처럼 줄에 얹어 한나절 말린 다. 말린 낚시를 널판자로 키(곡식 까부는)처럼 만든 함지에다 소금에 절인 고등어 혹은 양미리를 미끼로 꿰어 가지런히 담는다. 낚시찍기라 하는데 함지 하나에 쪼삣대 네개 분량의 낚시를 놓는다. 낚시 숫자로 따지자면 총 600개, 한 사람당 네 함지이니 2400개가 된다. 이런 작업은 온전히 아낙네나 아이들의 몫이다. 농촌 아낙들의 베삼기나 모시삼기에 버금 가는 고단함과 솜씨가 요구된다. 그럼에도 풍어와 만선이란 희망이 있어 기꺼이 해간다.

오늘 같이 좋은날 식전 행사가 없으면 되겠냐며 진행을 맡은 사람은 간단한 식전행사를 구상했다. 속초를 대표하는 극단 ‘굴렁쇠’ 대표에게 그 임무를 의뢰했다.

“저는 극단 굴렁쇠를 이끌고 있는 K라고 합니다. 내빈과 관계기관의 여러분들께서 아직 미참한 이 시간에, 우리끼리 옛날 좋았던 시절을 회상 하면서 완전 함경도 말로 한바탕 웃어보겠습니다. 오늘 나올 사람은 모두 세 분인데 청호동 아바이마을 분들입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K는 며칠 전부터 청호동 노인정을 부지런히 넘나들어 겨우 세 사람을 얻어냈다. 그들에겐 <어업과 관련 있는> 독특한 별명이 있어서다. 사회자 K가 인사말을 마치자 박수가 요란했다.

“자. 자 조용히, 여러분 제일 처음 나오실 분을 소개합네다. 청호동 아바이 마을에 사는 ‘김 쪼삣대 아즈바이’ 나오시기요. 박수치오 짝짝짝... ” 깡마른 중늙은이 남자는 엉거주춤 단상에 올라 꾸벅 인사를 한다.

 

“나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이리 깽 마른 몸뚱이 땜에 벨메이 쪼삣대가 됐습매다. 나는 우리 아바이 손을 잡고 피란 나와서리 속초 사램이 됐지만, 원 고향은 함경도 신포하구도 ‘짜꼬찌’란 데요.

배를 타며 늙었지마는 옛날 생각하면 요새 바다사정은 영판 다르단 말일매. 그 시절이라면 요맘때가 춘태바리를 막 끝내고 꽁치그물 일구고 꽁 치잡이도 쏠쏠 했지비. 머니머니해도 동삼에 하는 맹태바리가 제일이었지비.

아, 그 우리 아바이덜 맹태배 탈 적엔 어업조합 판장에 산데미 같이 멩태르 퍼다 부었지비. 안메이 있는 집 아아덜이 바께쯔 가지고 생선좀 달라하면 마리수를 세에 보기는커녕 장화 신은 채로 한쪽 가에 쓰윽 덜어내 주면 아아덜이 바께쯔에 주어 담아 갔으이 말임매. 청호동서는 개덜도 천 원짜리 도늘 물고 댕긴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재이요. 그 흔하던 멩태 가 흐지브지 어느 틈에 한 마리도 안 나니 과연 페렵지 않소? 우리 고향 신포쪽에서는 멩태를 낚시로 잡는 벱이 없고, 그저 그물로 왕창왕참 퍼 올렸다 이말이오. 속초 와서 멩태 낚시니 쪼삣대니 하는 거로 작업하자니 영 아잘이 없게 생각됐지비. 마이 웃었습매다.

모르긴 해도 이북 아아덜은 안직도 멩태는 그물로 잡을기요. 어저는 그것도 모자라서리 중국 아덜까정 끄러다가‘쌍끄리’잡아 재친단 말 들었지비. 하이까디 그것덜이 남쪽바다까정 당도할리 만무하지비. 더 한심한건 멫해 전부터 고성, 거진에서‘명태축제’를 벌이는 일이지비, 연극 하는 거도 아이고 멩태가 마이 잽히지 아이하는데 무시기 맹태축제란 말임매?

외지 사람덜이 모여 든다니 원 참 낯부끄거워서리, 그렇다고 배를 몰아 그음(어로저지선)을 넘어 북쪽 바다로 괘기잡이 갈수도 없으이, 거저 빨리 남북이 통일이 되어서리, 네바다 내바다 없이 배질을 할 날만 기대릴 수 뿌이 없다 이말이오, 이만하겠소.” 박수가 짝짝짝...

국가에선 1957년 11월 15일 북위 38도 26분, 즉 고성군 거진 이남으로 제한했던 동해안 ‘어로저지선’을 휴전선까지 북으로 확장하여 최대한 어획고를 올린적도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어선 피랍사건으로 1959년에 가선 어로제한선이 다시 남하하기도 했다. 그 후로 현재는 성어기 한 철에만 제한적으로 ‘저도어장’조업이 허용된다. 이런 시기엔 ‘어로순시선’은 물론 ‘해안경비정’까지 동참하여 철저한 감시와 지원을 하고 있다.

“다음은 역시 신포마을 이 광주리 아바이 나오시겠슴매다.”

“나는 신포마을 좌상 이광주리 올시다. 내가 이까(오징어) 광주리가 된 이유는 덩치만 크지 실속이 술술 빠져 나간다고 해서리 그런 벨메이 붙지 않았겠지비, 오늘 나는‘도르매기’를 좀 말해 볼라 합네다. 요지간에 와서는 뭔느므 괘기덜이 시도 때도 모르고 나는가 말임매. 이게 예삿일이요? 원래 가아덜은 추버서 손끄시 얼얼할 적에 나야 할 건데, 동삼이 다 지난 지가 얼맨데 여태 잽히니, 이런 변고가 어드메에 또 있단 말임매, 그러이 까디 제 갑슬 받기나 하는가 말임매, 맛도 제철 맛이 아이나지비, 고성 수협에서는 냉동창고에 그득 쟁겨놨다 아이하오? 그래가지구서려 가슬에 농민들의 싸르 농림부에서 대신 파라주더시, 전국에 도르매기 파라주기 운동인가를 하잔소, 그 일도 어저는 러시아 멩태를 받아야 하이까 창고를 비워야 할 처지라 하니 여간 골칫거리겠소. 남의 얘기 그만하고 우리 속 초도 냉동창고라던가 건어물 보관창고를 더 많이 맹그러서 어민덜 괘기 값이나 지켜주는 페이 옳다고 여기는 바이오, 내말이 어떻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박수 칩새.”

군중이 한꺼번에 와아 하며 짝짝짝...

이 광주리 아바이가 줄달음으로 단상을 떠났다. 사회자가 나섰다.

“여러분 이제 마지막으로 ‘송소래’ 아지미를 소개하겠습네다. 박수 침새” 짝짝짝... “

이북에서 ‘소래’라 하면 함지박을 여기서는 ‘다래’라 하지비. 내 몸집 이 풍성하다 해서 그런 별메이 붙었째이오. 얼마 전에 ‘현대’라는 큰 회 사가 유람선을 타고‘금강산’구경을 가게 했지비.우리덜은 얼매나 부애가 났는지 모르지비. 똑같은 바닷길인데 유람선은 가도되고 정작 뱃사람 괘기잡이는 가선 안된다니 앞뒤가 안 맞는 처사지 머이요. 작업하다가 보면 괘기떼만 쫓다가 자칫 월선이라도 했다 하며는, 그 문책은 말하기도 끔찍했지비. 빨갱이 취급 받아서리 자석덜 앞길까지 맥히지 아이했소? 그뿐 이요? 북한 아아들에게 잽혀갔다하면 죽는 페이 낫다고 아이 했음매? 되돌아 와도 죄인, 못 돌아오면 남아있는 가족덜이 더 고통이재이요? 나 자신이(노인)덜 말마따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비. 배부른 사람덜 태운 유람선만 사람이고 어부는 사람도 아이란 말임매? 한때 우리 속초 애덜이 서울 가서 공부하며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사실 한 가지가 있어요. 오징어를 왜 돈 주고 사먹어야 하는가? 길에 널린 게 오징어 이까요. 마을 어느 집에나 매달려 있는 그 이까를, 그 흔하고도 갑업시 먹던 것을 돈 주고 사다니? 했드랬지비.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이 젤로 조왔다 싶재이요.”

앞자리에서부터 사람들이 벌떡 벌떡 일어서서 “옳소. 옳소 모두 박수치 기요.” 짜 짜 짜...

한바탕 넋두리 마당이 끝나갈 즈음, 시장님을 비롯 어업에 관계되는 기관장, 해경장과 수산물 가공 유통 업자들까지 내빈석에 자리했다. 군중은 사뭇 진지하고 조용해졌다.

“지금부터 삼십년 만에 열리는 ‘어업인의 날’ 기념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국기를 향해 서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의례에 이어 어업인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