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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소설 - 이국화 - 풍곳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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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35회 작성일 15-01-0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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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변두리인 이곳을 사람들은 풍곳이라 불렀다.

도심에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이 밥을 벌어먹기 위해 값싼 땅을 찾아 다니며 뒤지고, 작은 공장을 짓고 살다가 더 좋은 곳, 나은 자리 찾아 또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나가 버려 바람풍(風)자 풍곳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 제일 오래 버티는 사람이 태임이네 구멍가게와 반찬 공장 ‘신선’이었다. 신선 반찬 공장에서는 특별한 기술 없어도 되는 인력을 싸게 구할 수가 있었고, 태임이네 구멍가게 두 노인은 이제 너무 늙어 신천지를 찾아갈 기력이 없어 눌러 앉은 것이다.

 

날이 밝았다. 상쾌한 오월의 아침…

어버이날을 지나고 세 번째 되는 마침 일요일이었다.

숙희는 이불 속에서 기지개를 켜다가 시계를 보았다. 매일 일어나던 시간보다 십 분이 늦어 있다. 새 직장을 위해 전의 일터를 그만 두어서 늦잠을 실컷 자보려고 맘먹었는데 습관은 끈적한 손길로 그녀를 잡아 일으켰 다. 그녀는 하품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TV 위 작은 유리컵 속에 어머니가 꽂아놓은 붉은 카네이션 한 송이가 ‘나 아직 살아있어. 언니. 새 일자리 축하해’ 하면서 반긴다.

 

숙희는 반찬 공장 시절을 떠올려본다. 언제나 옆집 명이와 함께 다니던 그 길…

그 신선 반찬공장은 태임이네 가게 앞을 지나 북쪽으로 십 분쯤 걸어가 면 있었고, 그녀들 집은 가게 동남쪽으로 걸어 삼십 분쯤 되는 곳, 연립 지하에 있었다. 아! 얼마나 많이 지나친 그 길이던가!

 

여고 2학년을 중퇴하고 어느 새 육년의 세월이 흘러간 게 아닌가.

여고 졸업장 한 장 쥐어주지 않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야속 하다가도 화물 자동차에 치받친 허리의 후유증을 앓으며 비닐하우스에 야채씨를 넣던 구부정한 아버지의 등을 떠올리면 언제고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 어졌다.

그래서 매번 어버이날에는 자식이 없어 보이는 태임이네 가게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친아버지에게 하듯 꽃을 달아드렸다.

“이게 몇 년째야. 한두 번도 아니고…”

한사코 사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숙희는 하얀 벚꽃 같은 미소를 띄우며 그림자처럼 다가가 앙상한 앞가슴 옷자락에 꽃을 달아드렸다.

“건강하시고 오래 사세요.”

할라치면 거부 못 할 이상한 힘이 숙희에게서 풍겨 나와 두 노인을 꼼짝 못하게 했다.

“차라리 그럼 꽃값을 받지 말던가…”

할머니가 영감님께 던지던 그 말이 있은 후로 금년 어버이날에는 숙희가 다른 가게에서 꽃을 사들고 갔을 때였다. 두 노인이 이미 커다란 붉은 카네이션을 한 송이씩 가슴에 터억 달고 있는 게 아닌가!

숙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리도 아들 딸이 있다우. 먼데 살아 그렇지’

쓸쓸하게 뇌이곤 하던 그 말을 먼 기억에서 떠올리며

“자녀분들이 다녀가셨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노인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명이의 말을 들으니 그게 아니었다. 명이 아버지가 건축 현장 자재 지킴이를 하고 집에 오는 길에 가끔 가게 평상에 앉아 소주도 한 잔하고 할아버지와 말벗도 하며 쉬시다가 들은 얘기라고 했다.

원래 태임이네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아들이 딱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집을 나가 소식 없는 지가 십 년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그 때가 할아버지 가 중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여 탄 퇴직금을 남도 아닌 사촌 동생의 사기에 걸려 몽땅 날려버린 그 시기였다는 것이다.

며느리는 남편 돌아오길 기다리다 못해 달랑 남은 손녀 하나 데리고 개가를 해버렸다. 그래서 아들 찾아 떠돌다 호구지책으로 풍곳에 눌러앉아 구멍가게를 시작했단다.

태임이란 아들 이름이 아니고 정년퇴임하여 가게를 하니까 퇴임이네 가게라 붙인 이름이 그만 발음이 쉽게 돌아가는 대로 태임이네 가게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럼 꽃은 누가 달아드렸을까?”

“음, 언니가 해마다 꽃을 달아드리는 바람에 미안해서 이번엔 당신들이 손수 언니 오기 전에 빨리 달자하여 단 것이래.”

숙희는 오히려 그게 서운하여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까짓 꽃이 몇 푼이나 한다구… 왜 사람의 마음을 몰라주고 돈을 떠올렸을까.

어쨌든 이제 그 일도 계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새 직장 가까운 데로 이사갈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음으로…

 

숙희는 방을 나와 설거지대 앞에 선 어머니의 등뒤로 돌아가 겨드랑이 밑으로 살그머니 손을 넣어 어머니의 젖을 만졌다.

말랑한 홍시 같은 그 그리운 엄마의 젖…

“에그 징그럽다. 다 큰 애가…”

어머니는 질겁을 하며 돌아서더니 징그럽다는 말과 다르게 딸을 끌어 안았다. 잔등을 토닥여주며

“얘야. 이보다 더 큰 어버이 날 선물이 어디 있다니? 공무원 시험 합격 이라니… 네가 공무원이 된다니… 언제 그런 공부 할 짬이 있었길래… 이 젠 맘 놓고 신랑감 골라도 되겠다.”

“엄마. 난 시집 안 갈 건데? 엄마 모시고 살게요. 그러니까 큰 오빠랑 올 케랑 불효라고 서운해 마시고 저랑 살아요.”

“오빠 얘긴 이 좋은 날 접어두고… 그래 이번처럼 시침 뚝 따고 있다가 어느 날 착실한 신랑감 하나 더불고 오너라. 그래야 어미가 맘 놓고 눈을 감을 수 있지.”

“엄마.”

모녀는 끌어안고 벅찬 감격으로 한참이나 말을 잃었다.

마침내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숙희야. 아침 먹고 우리 남대문 대도 백화점 안갈래? 너 출근하려면 구두랑 새 옷 정장 한 벌은 있어야지.”

“엄마가 뭐 돈 있수?”

“있구 말구. 이만큼 많이.”

허리에 차고 있던 두둑한 지갑을 툭툭 쳐보였다.

“네가 반찬 공장 근처에도 절대 오지 말래서 엄마는 너 몰래 양말 공장엘 다녔단다. 발가락 부분 코 잡아 마무리 하는 일 어렵지 않더라.”

이 세상에 어렵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랴!

더구나 숙희는 돋보기 없이는 글 한자도 못 읽고, 바느질도 못하는 어머니의 노쇠한 시력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가슴 속으로 찌르르 아픔의 전류가 흘러갔다.

‘엄마, 이제 나 방송통신대학 다니고 싶어요’하는 말 대신 숙희는

“엄마, 우선 태임이네 가게랑 공장 수위 아저씨께랑 인사 하고 올게요.”

“암, 그래야지 얼마나 인정 많은 분들이라고…”

 

숙희는 스물다섯 숙녀인지 소녀인지 모르게 파마기 없는 단발머리로 어린애처럼 나풀나풀 걸어 태임이네 가게로 갔다. 간밤에 살짝 내린 비로 먼지가 날지 않는 가게 앞엔 일찍 내다 편 비치파라솔 밑으로 비닐장판을 씌운 평상이 놓여 있었다.

지금부터 가을까지 많은 사람들이 바람처럼와 앉아 쉬었다가는 바람 처럼 떠나가는 길가 사랑방일터였다. 그래서 풍곳에 있는 평상은 바람풍 (風)자 풍상이라고 해야 된다고 누가 주장했다는 일화까지 있는 들마루였다. ‘평상’ 그것도 좋고 ‘풍상’ 뭐 그것도 나쁠 건 없네. 라고 숙희는 중 얼거렸다.

아버지도 살아계셨다면 이 마루에 앉아 태임이네 가게 할아버지와 만고풍상 살아온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며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그래 웬 일인가? 오늘은 틀림없이 지각인 걸.”

“교장 선생님 할아버지. 그동안 비밀이었는데요. 저 C 구청에 발령이 나서 보름 뒤부터는 그리로 출근해요. 자주 못 뵐 것 같아요. 그래서 인사 드리려고 왔어요.”

말이 끝나기 전에 안에 있던 할머니가 급히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 무슨 소리야. 섭섭해서 어쩌나. 나는 오명가명 색씨 보며 사는 게 기쁨이었는데… 요즘 사람답지 않게 얼마나 착하고 예쁘던지… 우리 손녀도 저만큼 컸을른지… ”

눈으로 손이 올라가는 할머니를 향하여 할아버지가 약간 언성을 높였다.

“아이고 이 주책 할망구야. 얼마나 잘 된 일인데 축하부터 해야지. 정말 축하 하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라니…”

“얼마 전에 알았는걸요. 이렇게 고생이… ”

“다 내 팔자소관이지. 세상 물정 모른 채 살았으니 그럴밖에…”

숙희는 제 일처럼 가슴이 저렸다.

가게 할아버지의 꾸부정한 어깨 뒤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냥저냥 밥 한 술은 먹으니… 또 자꾸 움지적거리니까 운동이 되어서 인지 건강하다오.”

“아무쪼록 건강하셔야지요.”

그리고 어버이 날 손수 달으셨다는 꽃 얘기는 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식 없는 우리가 날마다 가게 앞을 지나는 색씨를 보는 게 낙이었는데… 가슴에 꽃을 달아 줄때는 정말 딸 같고 손녀 같았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없는 아들을 생각하는 양 노인이 먼 산에 눈을 주었다.

“맘 대로면 잡아두고 싶지만 풍곳 사람들이야 좋은 일로, 나쁜 일로, 참 급히도 떠날 일이 많이 생기지. 그런데 참… ”

할머니가 입을 열자 숙희가 귀를 쫑긋 세웠다.

“색씨는 아버지가 계신 줄 알았는데…”

“돌아가신 지 여러 해 째예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 저희가 이 풍곳으로 이사 온 거예요.”

“쯧쯧 그런 것도 모르고 매년 우리 가게서 네 송이 꽃을 사길래… 두 송 이는 우리 두 양주에게 달아주고 두 송이는 부모님 드리려고 가져가는 줄 알았지.”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행해 눈을 흘겼다.

“왜 색씨 아픈 데를 건드리나? 우리 같은 외론 사람 누구에겐가 또 달 아주었겠지. 참 기특도 하지. 요즘 같은 세상에…”

숙희는 말없이 미소를 띄운 채 서 있었다. 두 볼이 발갛게 물이 들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 가지고…”

“나쁜 일엔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고, 꽃 한 송이 사랑이 이 세상을 밝히는 횃불도 되는 것을… ”

할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침 가게 앞으로 명이가 오고 있었다.

“명아, 잔업 걸렸어?”

“까짓 서푼 짜리 일… 일 안 하고 먹으면 죄가 된다고 목사님이 그러셨 잖아. 그래서 아무거나 일하는 거야 언니.”

“그보다 건강해서 일 할 수 있는 게 더 좋은 일이지.”

“암튼 언닌 좋겠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반찬 공장 나는 언제 떠날까.”

숙희는 언젠가 명이랑 같이 출근하여 타임카드를 체크하는 체인지 하우스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며 명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언니, 우리 옷 공장 같은 데로 옮기자. 맨날 일해야 깜장콩 장조림하고, 마늘쫑 잘라 절이고, 김 구워 포장하는 일… 이력이 붙나, 기술을 인정받나… 안 그래 언니?"

“그렇긴 하지만…”

“옷 만드는 기술 없어도 첨엔 실밥 따는 일부터 하다가 미싱으로 옮겨 앉게 된대. 거기다 저 꺽다리가 괄괄 고함치며 설쳐대면 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구.”

꺽다리란 사장의 조카뻘 된다는 공장장 조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씨는 삼십이 넘었는데 키가 커서 겉늙어 보이고 미혼이랬다, 기혼이랬다 혹은 이혼한 홀아비라 하면서 여자들을 무던히 괴롭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다 거짓부렁. 사기 공장 공장장이 제일 알맞지.’

하면서 뒤꼭지에 대고 욕하던 일이 생각나서 숙희는 죄없이 명이 앞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이가 말머리를 돌렸다.

“언니, 쉬는 중일 텐데 가게엔 왜 나왔어?”

“응. 아는 어른들께 인사하려구.”

“언제부터 출근하는데?”

“출근은 두 주일 뒤부터야.”

“언닌 좋겠네.”

명이가 발걸음을 떼어놓자 숙희도 옆에와 나란히 섰다.

십분이 허용된 길에서 꼭 해야 할 요긴한 말이 무엇일까 생각 중에 그 녀들은 한 마디도 못하고 신선 공장 정문 앞까지 왔다.

행길에 늘어선 한창 푸른 옷을 갈아입는 은행나무만 멍청히 올려다보 면서.

“그래. 내가 공부하던 책을 다 네게 줄게. 열심히만 하면 된단다.”

그 때 수위 아저씨가 민칠민칠 그녀들 옆으로 다가왔다.

“늦었네. 하지만 오월은 젊은이들 세상이니 내가 특히 봐줌세.”

수위 아저씨는 정문 기둥 사이 가로로 길게 드리운 쇠사슬을 걷어 한쪽 으로 비켰다. 사람 좋은 미소가 날아왔다.

“글쎄 돈이 많아야 새 마누라를 얻지. 요즘 여자들은 돈 아니면 상대를 안한다니까 할 수 없지 뭐.”

사람 좋은 미소 뒤로 언젠가 했던 수위 아저씨의 넋두리가 떠올랐다.

아들은 외국에 돈 벌러 나가서 지금은 홀아비로 자취를 한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숙희의 어버이날 꽃 한 송이는 수위 아저씨의 몫이었다.

반찬 공장에 일 나오는 과부들 중에 하나를 꼬셔 볼란다는 계획은 아직도 미완성인 채로였다. 수위 아저씨가 술 한 잔 걸치면 되풀이 늘어놓는 각본이라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왜 과부들은 돈만 안다고하시는지…

참 과부들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숙희는

“아저씨, 저 여기 그만둔 거 모르시죠?”

“문지기가 소식을 몰라서야 되나. 제일 먼저 안다네. 섭섭해서 어쩌나. 오월 되면 누가 내 가슴에 꽃을 달아주나… ”

명이가 나섰다.

“아저씨. 제가 달아 드릴게요. 숙희 언니가 해오던 태임이네 구멍가게 할머니 할아버지께 꽃 달아드리는 일도 제가 맡을 거예요.”

수위는 아저씨라 불려도 뭐로 보나 육십 중반은 착실히 넘어보였다.

수틀리면 먼 촌 아우뻘 된다는 사장도 벌벌 기게 만든다는 의협의 기질 이 그를 젊게 만들기는 하는 거겠지만… 수위 아저씨는 초소로 들어가더니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고 있었다. 좀 있자 꺽다리 공장장 조씨가 작은 상자 하나를 들로 바람처럼 나타났다.

“히야! 미쓰 코리아들이 어쩐 일이쇼?”

“공장장님도 참.”

“미쓰 김은 나 때문에 사표 던진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요.”

“내가 좀 짓궂어서… 하지만 나 나쁜 놈은 아니요. 말만 많고 손 게으른, 산전수전 공중전에 눈치만 빠꼼인 아줌씨들을 부려먹자니 농지거리도 해야 하고… 자 이 가슴의 꽃을 보시오.”

그는 자기 가슴에 꽂힌 꽃을 손으로 가리켰다.

“자그마치 두 송이씩이라오. 아들 딸 두 놈이 달아준 건데 왕창 시들때 까지 꽂고 다닐 참이요.”

“흉봐요. 나이 많은 어르신들 계신데…”

“글쎄 난 본의 아니게 오해뿐이라니깐… 그래야 우리 애들이 한사코 아비 말도 잘 듣겠다 이거요. 바싹 시든 후에야 녀석들 책상 위에 매단대나.어쩐대나. 거 참.”

조씨는 혼자서 허허허 웃었다.

“영원한 효도의 표시라니 고사리들과 싸울 수도 없고. 허허.”

명이가 쿡 하니 웃음을 터뜨렸다.

“참 미쓰 현, 현명이 새침때기 양. 이달부터 월급 오르는 거 알아요? 신선 반찬 공장 새로 크게 확장하는 거 알아요? ”

명이가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떠보였다.

“술 만들어 파는 일보다야, 쏘시지 만들어 비곗살 찌우는 일보다야, 호텔 세워 불륜 방조하는 일보다야 밥반찬 영양 고루 최고 김치 만드는 공장이 이거야 이거.”

그는 큰 키에 어울릴 만큼 큰 길쭉한 엄지손가락을 꼿꼿이 펴 하늘로 쳐 들어보였다. 명이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 서운한 마음의 표시요.”

그는 작으면서도 묵직한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이 신선 공장에서 만든 신선한 생산품 아니겄소? 하도 보고 만지고 냄새 맡아 먹기에 질렸을 테지만 새 직장 가서 도시락 먹을 때 동료들에게 나눠 주고 대신 그 사람들 반찬을 바꿔 먹으면 된다니까. 하하하.”

그다운 발상이 재미있고 고마웠다. 수위 아저씨의 코치일 테지만…

 

숙희는 가끔 놀러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명이와도 헤어져 행길을 걸어내려 오며 하늘을 보았다.

푸르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 푸른 하늘이었다.

먼 데, 또 가까운데 산들이 온통 연초록 싱그러움으로 감싸여 있었다.

이제 곧 유월이 오면 진초록으로 더 깊이 물들겠지. 이어 아카시 하얀 웃음이 쏟아지겠지.

은행나무가 한창 자라느라고 껑충한 키로 서서 애기 손바닥 같은 이파리들을 흔들었다.

잘 가라는 듯도 하고 또 오라는 시늉 같기도 했다.

기대고 살데가 마땅치 않아 바람 같이 왔다 바람 같이 떠나지만 인정이 넘치는 이 풍곳이란 동네를 가슴 깊이 새겨 넣어 절대로 잊지 않으리 라.

정다운 제2의 고향으로 간직하리라.

그녀는 마음 깊이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