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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소설 - 강호삼 - 쉼(,)표와 마침(.)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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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47회 작성일 15-01-0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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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와 마침(.)표

 

바쁜 출근시간임에도 사람들은 지하철 입구에 즐비하게 세워져 있는 무가지(無價紙) 거치대에서 저마다 신문을 한 부씩 집어 든다. 어느 신문 이나 기사 내용이 거의 비슷비슷 할 텐데도 종류마다 한 부씩 챙겨서 옆구리에 끼고, 나중에 집어든 신문을 펼치면서 굴려 내리듯이 지하철 계단 으로 내려간다. 아침 출근시간마다 되풀이 되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지혜도 낚아채듯이 무가지 한 부를 챙겼다. 읽으려고 챙겼다기 보다 출근 시간 때마다 만나는 노인에게 폐지를 보태주기 위해서다. 오늘도 노인은 불편한 다리를 절름거리며 전동차 안을 돌아다니면서 폐지를 모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뉴스에 굶주려 있는 것 같다. 신문의 종류도 많고 뉴스 가 무진장으로 넘쳐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마치 뉴스를 보지 못하면 죽기라도 하듯이 뉴스에 목을 맨다. 요즘 들어 부쩍 더 심해졌다. 며칠 전부터 신문을 장식하는 내용은 단연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다.

그녀는 여러 면에서 주목을 받는 인물이다. 단군 이래 첫 여자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영구집권을 노렸던 아버지 박정희가 그녀의 배후에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경제발전 과 함께 좌와 우, 보수와 진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갈등은 30년 군사독재정권의 소산이다.

 

북한이라는 나라(?)가 참으로 골치 꺼리다. 지난해 연말에 위성발사가 성공하더니 세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김정일이가 죽자 대가리에 피가 겨우 마른 것을 세습군주로 옹위하고 다시 3차 핵실험을 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핵폭탄을 만들어서 그걸 어디에다 쓰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너죽고 나죽자는 자폭용이 아니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다. 그걸 개발하는 비용으로 굶고 있는 인민들 배나 불릴 일이다.

남쪽의 신문 방송매체가 그걸 비아냥 섞어서 보도하자 공화국의 존엄을 훼손했다고 밑도 끝도 없이 정전협정 폐지를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전쟁상태에 들어간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를 보도하는 북한 티브이 방송이 더욱 가관이다.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지만 촌티 나는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자 아나운서가 나와서 남자처럼 목소리를 있는 대로 높이고 가성을 써서 주먹질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된소리를 내질렀다.

도대체, 그들의 훼손당했다는 존엄이 무엇인지, 그게 또 세계를 향해서 핵전쟁을 일으킬 만큼 중요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처음에 사람들은 모두 심상하게 생각했다. 대물림을 하면서 으레 해오던 수작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돈을, 그것도 국민의 혈세를 국민의 동의도 없이 이 나라의 지도자라는 것들이 몇 수십조씩이나 몰래 갖다 주며 핵개발을 지원할 때도 그들은 상투적인 위협을 계속해 왔다.

그러던 것이 명박이 정권은 한푼도 주지 않았으니 얼마나 목이 타고 괘씸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렇다고 정전협정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전쟁을 하겠다니 미처도 단단히 미친놈들일 수밖에 없다. 전쟁 일으켜 불바다 만들면 순진하게 남쪽 사람들은 두 손 붙들어 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도 놈들이 기세를 올리고 거기에 케이블 방송인가 종편방송 인가 하는 데서 시청률 올리느라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북의 장사정포 포탄이 날라 오고 서울이 불바다가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다 보니 평소에 침착하고 냉담하던 서울시민들도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 전쟁이 터지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조금씩 불안해 한것도 사실이다. 오랜 학습효과 덕분에, 만에 하나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죽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도 현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권력을 쥔 놈이나 있는 놈은 여차하면 외국으로 냅다 뛸 구멍을 마련해 놓고 있겠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민초들은 쌀과 밑반찬거리를 평소보다 조금 더 여분으로 들여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고작이다.

한반도에 전쟁 터지기를 부추기라도 하듯이 외신기자들이 흉년에 떼거지들처럼 서울로 몰려들었다. 뭔가 한 건 하려고 왔으나 의외로 태연한 당사자들을 보고 오히려 놀란 건 그들이다. 지혜에게도 엘에이 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 거기서 얼른 들어오지 않고 뭐하는 거야. 이것아! 빨리 들어와. 여기선 거기에 곧 전쟁이 터질것이라고 야단들이야.”

그녀의 어머니는 전화기에 대고 호통을 치다말고 읍소까지 한다. 전쟁이 터져서 딸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지혜는 실소를 하면서 엄마를 달랬다.

“엄마! 여긴 괜찮아. 걔들 뭘 좀 달라고 떼쓰고 말로만 공갈치는 거야.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판에 전쟁은 무슨 놈의 전쟁, 걔들 전쟁할 능력도 없는 애들이야. 참 엄마, 허리는 어떼? 수술하고 나서 많이 나아 졌어?

“이것아! 들어오라니 왜 엉뚱한 소릴 하니. 내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냐?”

“엄마! 정말 여기는 괜찮테두 그러네.”

과년한 딸 시집도 가지 않고 한국에 혼자 나가 있으니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버지가 전화를 바꿔 들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네, 아버지세요. 전화 자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여긴 정말로 아무 일도 없어요. 거기가 더 난리인 것 같은데요.”

“그래, 그렇다면 안심이다 만 여기선 이번만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들 이 돌고 있다. 미국이 스텔스기와 폭격기를 보내고 핵잠수함과 항공모함 까지 보내고 있지 않느냐. 왠만하면 너희 엄마 말대로 들어오는 게 좋지 않겠니?”

현지의 한국방송도 전쟁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모 양이다.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아버지마저도 그녀의 귀국을 은근히 종용 하고 있는 판국이다. 도대체 이렇게 난리를 치게 만들어 놓고 김정은이 그 개자식 일당은 뭘 얻으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버지 염려마세요. 뉴스에서 사람들이 괜히 흥분해서 떠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저엉 급하면 들어갈게요. 거긴 한밤중이죠. 그만 전화 끊으시고 주무세요.”

지혜네 가족이 미국에 영주하게 된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엘에이 은행 지점에 근무하고 있을 때부터다. 갑자기 박정희가 죽고 난데없이 소도둑놈 같이 생긴 놈이 연일 뉴스 시간마다 티브이 화면에 클로즈업되어 나타 났다. 대낮에 참모총장 관저에서 총성이 울리고 육군참모 총장이 연행되고 이를 저지하던 총장의 보좌관이 전두환의 졸개들 총에 맞아 죽었다.

남침을 저지하는 중요 요충지인 문산 축선(軸線)의 휴전선을 지키는 병력과 탱크들이 한밤중에 캐터필러 소리도 요란하게 북쪽이 아닌 남쪽을 향해 내려왔다. 연신내 고개를 넘어 독립문을 지나서 경북궁과 정부청사 앞에 얼굴 두껍게 진을 치고 국민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노태우 휘하의 병력들이었다. 무방비로 구멍이 뚫린 휴전선은 전두환이나 노태우 일당이 알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북한군이 남침을 하거나 말거나 오직 눈앞에 있는 권력에만 눈이 뒤집혀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군사독재 치하에서 그처럼 고대하던 민주주의의 봄이 이제야 정말로 오는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지혜 아버 지도 마찬가지다. 국내 은행의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음에도 사표를 내고 그대로 엘에이에 주저앉고 말았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거리를 가득 메운 데모대와 최루가스가 가득한 서울을 떠나서 어디로든지 탈출하고 싶어 했다. 다행히 지혜의 아버지에게 자연스럽게 그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전통적인 가치관과 정의가 박정희에 이어 다시 한 번 총과 칼을 든 자들 앞에서 무참히 유린당하고 왜곡 당한 것이다. 분노한 국민들의 저항이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일어났다. 사망자만 165명이었고 행불자 65명에 부상자는 3139명에 달했다. 나라를 지키라고 혈세로 무장시킨 총칼로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은 광주시민을 죽이고 난자했다.

“광주 사람들은 참 착해. 만약에 내 가족 중에 누군가가 그 때, 광주에서 총맞아 죽었다면 나는 일년 365일, 전두환의 연희동 자택부근에 숨어서 기다렸다가 그 뻔뻔한 놈의 대가리에다가 총알을 쑤셔 박고 말았을 것이야.”

어려서 당시의 상황을 잘 모르는 지혜에게 준이 처참했던 광주사태를 설명하면서 씹어뱉듯 한 말이다.

 

지혜 아버지는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다. 엘에이가, 서부 캘리포니아 전 지역이 사막지대라는 것에 착안했던 사업이 적중한 것이다. 옥외행사가 많은 엘에이는 햇빛과 강한 자외선을 차단해 주는 그늘막이 필수품이었다. 기존의 생산 공장과 유통망이 있었지만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중국에서 OEM 방식으로 만들어 미주 전역의 마트 등에 납품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지혜 아버지는 온갖 정력과 노력을 다 쏟아 부었다. 설계기술을 새로 배우고 중국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면서 자제와 제품 생산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물건을 써 본 사람들이 꾸준히 찾으면서 물량이 달리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서 주문서를 보내왔다. 중국 공장의 생산 물량을 늘리고 인터넷을 열어 직접 주문을 받으면서 사업이 제 궤도에 올랐다. 사람을 고용하고 창고를 임대했다. 사업을 시작한지 4년 만에 미국의 상류층들이 사는 오렌지카운티 지역에 수영장이 달린 집도 마련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뉴스가 점점 더 재미있어진 것은 박근혜 정부의 내각 인선이 시작되면 서부터다.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고르고 고른 장관후보라는 사람들의 치부가 언론 앞에서 발갛게 벗겨졌다. 숨겨져 있던 그들의 부와 권력을 향한 행태가 낱낱이 드러났다. 후보로 거명된 인물들은 판사나 검사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주권자인 국민은 그들의 손에 민주주의의 한 축을 받치는 사법부의 중요한 책무를 위임했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정체를 민주주의로 하는 국가에서 법은 억울한 자들의 마지막 보류다.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피의자들을 기소하고 법정에서 죄를 묻고 공정한 판결을 함으로써 그들의 권위와 지위의 당위성을 담보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잘난 법지식을 악용하거나 지위를 이용해 스스로 법질서를 교란하고 권력 남용을 일삼았다. 퇴직해서는 전관예우니 뭐니 하는 저희들끼리의 편법과 야합으로 민주주의 기본질서까지 무너뜨렸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진 자들의 도덕성의 잣대가 어느 수준인가가 부분적이나마 밝혀진 것이다.

 

전동차의 문이 열리자 한꺼번에 사람들이 플랫폼으로 쏟아진다. 6호선 을 바꿔 타려는 사람들이다. 뒷사람에게 떠밀려 저절로 밖으로 나온다. 숨통이 트인다. 자칫 잘못하면 지각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녘에 슬그머니 지혜의 배 위로 올라온 준을 밀쳐내지 못한 것이 지각을 자초한 꼴이다. 준의 음경이 질속을 헤집고 들어와서야 잠을 깼다. 떨쳐내려다 잠깐 망설였다. 잠자리를 피한 것이 이주일이나 되었다. 준은 강압적으로 그녀를 껴안고 팬티를 벗기려고 시도했다. 지혜는 그런 준을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경멸하는 척 했다는 표현이 옳다.그런대로 준은 꽤 괜찮은 남자다. 그는 사십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였고 수컷으로서 결코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왕성한 종족보존의 본능을 가진 사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의 준에 대한 연민이 사랑이라면 지혜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동안 지혜의 기세에 눌러 눈치를 보다가 오늘 새벽, 준은 작심하고 곤히 잠들어 있는 지혜를 덮쳤다. 가슴이 답답해서 눈을 뜬 지혜는 자신 의 배 위에 올라와 있는 준을 의식하고는 잠시 어쩔까를 망설였다.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 동안 일부러 준을 멀리하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자신의 질속에 자리 잡은 그가 싫지만은 않았다. 싫어졌다기보다는 그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혜의 두 눈 꼬리로 말간 눈물이 주르르 흘려 내렸다.

지혜는 두 사람의 관계가 더 추해지기 전에 서로를 위해서 준의 곁을 떠나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다. 의원 보좌관을 그만 둔 뒤로 준은 하루도 빠짐없이 술에 취해 들어왔다. 심할때는 오피스텔 계단에 노숙자보다 더 초라한 몰골로 쓰려져 잠이 들어 있기도 했다. 지혜가 울면서 만류해도 듣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심한 욕지거리와 손찌검도 마다하지 않았다. 갑자기 사람이 백팔십 도로 변해버렸다. 그러다 정신이 들면 눈물을 흘리면서 빌었다.

지혜는 이제 준의 곁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냉각기가 필요했다. 어쩌면 영원한 이별일 수도 있다. 떠날 때는 떠나더라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준은 썩어 문드러진 한국의 정치현실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계기만 주어진다면 준은 그녀와의 관계에 연연해하지 않고 반드시 다시 제자리로 돌아 올 것이다.

지혜는 이미 엘시아에게 연락을 하고 비행기 표를 예약해 놓았다. 오피스텔 처분은 준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필요해서 그가 오피스텔에 계속 머물겠다면 그대로 쓰고 그럴 필요가 없다면 팔아서 그녀의 통장에 넣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지혜는 허리를 비틀어 준을 떨어트리는 대신 두 팔을 들어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그가 좀 더 깊숙이 그녀에게 들어올 수 있도록 다리를 벌렸다. 의외의 반응에 일순 움찔하던 준은 거세게 몸을 밀어 붙였다. 그 동안 참았던 것을 한꺼번에 만회하려는 듯 거칠었다. 지혜도 몸이 더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하고 신음을 토해내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비명까지 내질렀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고 그가 털썩 지혜의 풍만한 젖무덤사이에 얼굴을 내려놓았다. 깎지 않고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턱수염과 콧수염 때문에 젖가슴이 따가웠다.

지혜는 오랜만에 몸이 가뿐해진 것을 느낀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지각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미처 멈추지 않는 헐떡거림과 수축과 이완을 계속하고 있는 감미로움과 나른한 여운을 즐겼던 것이 잘못이었다. 축 늘어진 채로 한 동안 가만히 있던 준이 얼굴을 들더니 다시 기운을 차리고 기세 좋게 거침없이 질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설핏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일곱 시가 지나 있었다. 준은 욕심스럽게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쥔체 코까지 드르렁거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지혜는 준의 손을 급하게 밀쳐내고 후다닥 일어났다. 아침밥 챙길 겨를이 없었다. 누운채 아무렇게나 밀려나 있는 팬티부터 찾아 두 다리에 꿰어 입었다. 어제 벗어 걸어두었던 구겨진 흰색 블라우스와 엉덩이 쪽이 반질반질한 까만 스커트를 그대로 걸치고 핸드백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전철역까지 걸으면서 립그로스를 꺼내 입술에 문질러 바르고 꽁지머리의 매무새를 손으로 대충 다듬었다.

지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함께 얼굴을 찌푸린 최부장이라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통 가늠을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가끔 그녀를 훔쳐보는 시선을 의식하고 돌아보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좋으면 좋다고 할 것이지 별것 아닌 일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 그게 최부장이 라는 사람의 그녀를 좋아하는 나름대로의 표현 방법인지도 모른다. 이제 재수없게 생긴 최부장의 상판때기를 볼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지혜가 맡았던 프로젝트도 끝나가고 있다. 월말쯤 원장에게 자신의 거취를 이야기 할 작정이다.

지혜는 손에든 핸드폰에 시선을 꽂는다. 시간이 빠듯하지만 6호선 지하철이 제때 와준다면 지각은 면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 진다. 거의 달음질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정작 6호선 플랫폼에 도착하자 지하철은 이제 바로 전 지하철역을 떠나고 있다는 표시가 전광판에 떴다.

한 참을 기다린 끝에 전동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온다. 문이 열리자 사람 들이 내린다. 사람들이 미처 다 내리기도 전에 성급하게 나오는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전동차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다 내리고 나자 생각보다 붐비지 않는다. 서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소의 여유가 있다. 보다가 두고 내린 무가지들이 아무렇게나 선반 위에 얹혀 있다. 지혜도 전동차 안을 살펴 본 뒤 손에 든 무가지를 선반 위에 얹고 비교적 사람사이가 듬성한 쪽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고 섰다.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거두는 노인을 처음 본 것은 지혜가 영상원에 출근을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다. 흑백 영화<청춘의 십자로>라는 영화가 상영되던 날이다. 영화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흑백 무성 영화인데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 영화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동안 복원 작업을 거처 그 날,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영화 종사자들과 학계에서 온 사람들까지 관람객들로 만원을 이루었지만 독특한 차림 때문에 노인은 금방 지혜의 눈에 띄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영상원에서 노인을 보았다 흘러간 영화가 상영되는 날에는 어김없이 언제나 흰색 정장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 미뤄 보면 노인은 그 전부터 영상원의 단골 관객이었던게 분명했다.

지하철이 효창공원 역을 지나 공덕역으로 가는 중이었다. 앞 쪽의 전동차 문이 열리면서 깡마른 노인이 들어왔다. 일흔은 훨씬 넘은 나이다. 실 제로 노인의 나이는 여든 둘이다. 나이에 비해서 몸놀림이 무척 민첩하지만 왼쪽 다리를 조금씩 절뚝거린다. 그 민첩함이 오직 몸뚱이 하나만으로 살아온 노인의 고단한 삶을 짐작케 했다. 청색 티셔츠에 누런 낚시용 조끼를 위에 입고 머리에 때묻은 흰 운동모자를 썼다. 통이 넓어 마른 다리에 감기는 카키색 바지에, 뒷굽이 다 닳아빠진 운동화를 신었다.

사람 사이를 능숙하게 비집고 들어온 노인의 시선이 곧장 선반위로 향 했다. 선반 위에 얹힌 무가지(無價紙)를 발견하자 발을 곧추 세워 잽싸게 집어 내렸다. 노인의 겨드랑이에 이미 상당한 부피의 무가지가 들려있다. 무가지를 거두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노인과 지혜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지혜는 조심스럽게 노인의 출현을 지켜보고 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출근하는 전동차 속에서 거의 하루건너 노인을 만나지만 아직 한 번도 정면으로 눈을 마주친 적이 없다. 지혜가 의식적으로 노인의 시선을 피했다. 따라서 노인은 지혜의 존재를 까맣게 모른다. 오늘 오후에도 노인은 영상원(映像院)에 올 것이다. 영상원의 일주일 스케줄을 노인은 지혜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노인이 지혜의 뒤를 스치듯이 지나 선반 위의 지혜가 얹어둔 무가지를 보고 다시 키를 뻗는다. 노인이 다음 전동차로 옮겨가자 그제서야 지혜는 시선을 돌려 노인이 사라진 쪽을 본다. 노인은 저쪽 전동차 안에서도 선 반 위에 얹힌 무가지를 거둬들이고 있다. 다행히 오늘 이 지하철 안에서 만은 노인의 경쟁자가 없다. 평소 같으면 여러 노인들이 경쟁하면서 무가 지를 거두려 돌아다녔다.

노인들은 이렇게 무가지나 폐휴지를 모아 수집상으로 가져가서 용돈을 번다. 판매가격은 킬로그램 당 70원 정도이고 100킬로를 모아야 7천원 이다. 아무런 수입이 없는 노인들에게 7천원은 큰돈이다. 경쟁자가 많은탓에 하루에 아무리 바쁘게 쫓아 다녀도 100킬로를 모으지 못한다. 잘 모아야 60킬로 70킬로이다. 5천원도 손에 쥐기 벅차다. 지혜는 전동차 안이 아닌 시내에서도 가끔 손수레에 종이 상자와 회사에서 버려진 폐지를 가득 싣고 길을 건너는 노인을 볼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영상원에서 영화 상영이 없는 날이다.

영상원에 오는 날 노인의 모습은 무가지와 폐지를 줍는 때와는 백 팔십 도로 차림새가 다르다. 지혜가 처음 노인을 봤을 때처럼 아래 위가 하얀 양복 정장 차림에 양말과 구두까지 흰 것을 신었다. 머리에도 역시 흰색 의 맥고모자를 쓰고 윗저고리 주머니에는 선홍색의 빨간 손수건까지 꽂 았다. 단장까지 쥐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했다. 한 껏 멋을 부린 차림이지만 어딘가 희화적이고 광대 같은 모습이었다. 1960년대 서울의 명동에서 세칭 명동신사라는 사람들의 차림이다.

더욱이 눈썹 위의 쥐 눈이 콩알만 한 사마귀 같은 점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그머니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쥐 눈이 사마귀가 지혜에게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무가지를 모으던 노인과 영상원에 영화를 보러 오던 노인과 동일 인물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영상원(映像院)에서 몇 번이나 노인을 보았지만 전동차 안에서 무가지를 모으던 노인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어떤 식으로 연결을 해봐도 그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지혜는 노인이 전동차안의 노인과 동일 인물임을 알게 되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폐지를 주어 근근이 생활을 해나가는 노인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어떻게 영화 스케줄까지 꼼꼼히 챙기면서 영화를 보러 영상원에 오는지 궁금했다. 어떤 날은 노인 한 사람이 관객의 전부일 때도 있다.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 노인 혼자서만 영화에 깊이 심취해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노인이 흘러간 옛날 영화에 그처럼 집착하는 것은 반드시 영화가 재미있어서만은 아닌 무언가 특별한 사연이 있어 보였다. 간혹 영화관을 나오는 노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젖어 있기도 했다.

 

대학건물은 로마네스크 풍의 중후한 유럽풍 건축 양식이다. 파란 잔디밭과 갈색 건물 벽이 잘 어울린다. 본관 건물 앞에 높직이 매달린 성조기가 미풍에 맥없이 펄럭였다. 여러 가지 식물로 조경이 잘된 화단과 나무 아래서 시간마다 컴퓨터로 제어되는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햇빛에 반사된 물방울이 만든 작은 무지개가 아름답다. 멀리 콜로라도 강에서 끌어 온 물 덕분이다.

교정에서 준을 만난 것은 학기가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다. 교내 식당에서 접시저울에 달아서 파는 샐러드와 피자 한 조각으로 점심을 먹 고 예술대학 앞 잔디밭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잔디밭에는 지 혜 말고도 여기저기 누워서 책으로 얼굴을 덮고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는 학생이 여럿이다. 예술대학 건물 앞답게 여러 점의 조각상이 있다. 졸업 생들이 기증한 작품도 있고 엄청난 크기의 사람이 걸어가는 다리를 조각 한 것은 로댕과 헨리 무어의 작품이다. 조금 구석진 자리에, 가슴과 엉덩 이를 몇 십 배로 과장한 나부상이 있다. 그 나부 상을 볼 때마다 지혜는 웃음을 베어 물었다. 거꾸로 세워놓은 삼각형의 예각 쪽 성기의 과장이 너무 심하다. 작가는 다산이나 창조의 의미를 강조했는지 모른다. 조각상 들 위로 5월의 햇빛이 눈부셨다.

지혜는 강의시간이 비었을 때는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거나 거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엘에이의 하늘은 언제 나 파란 빛이다.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만큼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성큼 성큼 걸어왔다. 설마 했는데 정말 지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 식당에서 그녀의 바로 뒤에 줄 을 섰던 남자다. 동양인치고는 키도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스럽게 잘 생겼 다. 가까이 와서는 조금 주춤거렸다.

“혹시 한국분이 아니세요?”

발음이 정확하고 또렷한 한국말이다. 분명히 남자는 이민 온 한국계 교 민이 아니다. 줄을 서고 있을 때 지혜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가 중국계거 나 일본인으로만 생각했다. 오랜만에 온전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남자에 게 지혜는 신선함과 함께 향수 같은 것을 느꼈다. 남자의 억양에 한국의 남쪽 지방의 사투리 액센트와 약간 콧소리가 섞인 부드러운 음성이 묘하 게 섹시한 느낌이었다. 지혜는 한쪽 손을 잔디밭에 짚고 반쯤 몸을 일으 키면서 미소 띤 얼굴로 남학생을 올려 다 보았다.

“예, 저 한국사람 맞는데요. 그러나 반쪽짜리 한국 사람이에요.”

“제 짐작이 맞았습니다. 반쪽짜리 한국 사람이라는 말 무척 재미있네요. 이곳 교민이시군요. 저는 한국에서 온 강병준이라고 합니다. 이번 학 기부터 여기서 학위 등록을 했습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길고 여자같이 섬세한 부드러운 손이 었다. 지혜는 몸을 완전히 일으켜 그 손을 잡으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지혜는 짜릿한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남자가 그 녀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남자는 한국에서 정치학 석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정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지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자에게 빠르게 경도되려는 자신의 마음이 싫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하려고 일부러 시계를 보았다. 곧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영화사 시간이었으므로 한 시간 쯤 빼먹어도 되는 강의였다. 지혜가 일어서자 남자도 같이 따라 일어났다.

“곧 강의가 있어서요.”

“저기 전화번호라도…….”

남자는 몹시 아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혜는 메모지에 전화번 호를 적어주고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목례를 보낸 뒤 돌아섰다. 보이지 않 아도 남자의 시선이 줄곧 뒤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았다. 주위에 사람이없으면 지혜는<앗싸 - !>하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도록 기분이 좋았다. 영화사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헤이! 너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 옆자리에 앉은 엘시아가 땅딸보에다 가운데 머리가 모두 벗겨진 영화 사를 강의하는 교수의 뒤통수를 일별하면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엘시아 는 아일랜드계다. 눈이 고양이 러시아 불루 같이 짙은 녹색이고 얼굴이 죽은 깨로 뒤덮인 백인이다. 긴 황금색 머리칼이 금실처럼 빛이 나는 전 형적인 미국 처녀다. 강의시간에 우연히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가 단짝 이 되었다. 엘시아도 그녀와 같은 시나리오 필름 과다. 강의 첫 시간에 엘 시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너 말이야. 네가 모나리자 닮은 걸 알고 있어?”

“……………?”

뜬금없는 소리였다. 지혜의 얼굴이 모나리자를 닮았다니. 모나리자가 유명한 미술품이긴 하지만 미추(美醜)로 만 따진다면 그다지 잘 생긴 얼 굴이 아니다. 뭔가 모호한 그런 얼굴인데 바로 그런 모호한 얼굴이 사람 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포인트다. 엘시아가 지혜를 모나리자와 닮았다는 것은 모나리자의 얼굴에서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느낌을 받았기 때문 일 것이다. 특히 검은 머리칼과 계란형으로 생긴 둥그런 얼굴이 그렇다. 엘시아는 상업 디자인과의 데이비스라는 남자아이와 한창 열애 중이었 다. 데이비스의 페니스 크기까지 이야기 해줄 정도로 친했다.

“옛-써-ㄹ!”

그녀도 작은 목소리지만 맞장구치듯 짓궂게 씨-익 웃으면서 대답했다.

“너 남자 생겼구나.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 해 줘.”

“아직까지는 그럴 단계가 아니야. 나중에 진도 나가면 그 때 이야기 해 줄게.”

“오케이!”

캠퍼스에서 남자를 만난 지 삼일 째 되던 날 오후에 기다리던 전화가 왔 다. 지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혜의 예상이 적중했던 것이다. 이후 부터 남자와의 관계는 제동이 풀린 기관차처럼 속도를 냈다. 준을 알지 못했다면 지혜의 대학생할은 참으로 무미건조 했을 것이다. 조금 더 친해 졌을 때 준은 자신이 정치과를 택했던 이유를 우회적으로 말했다.

“경제는 발전했지만 정치는 후진성을 못 면하고 있는 것이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 전혀 안돼있는 거죠.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만 하더라도 200년의 역사가 있는데 한국은 불과 60년의 역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군사독재 정권 30년을 빼고 나면 불과 30년입니다. 처음부터 미국이나 영국 같은 민주주의를 바란다는 것은 무 리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그냥 두고 만은 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누 군가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기득권 세력에 물들지 않은 젊은 정치인들이 많이 나설 때라는 생각입니다.”

준은 자신이 그 젊은 지망생 중에 한 사람이라고는 굳이 말하지 않았으 나 지혜는 그의 말 중에 그가 강력히 한국정치에 뛰어 들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혜는 그에게 점차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제 준과 같은 젊은 사람들이 한국정치의 전면에 나설 때인지도 모른다. 젊은 정치 지망생들이, 아버지가 한국뉴스를 볼 때마다 개탄하던 한국 정 치를 바꿔 놓을 수 도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이미 한국 사람이 아니다. 미국시민권을 가진 미국 시민으로 한국 정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없는데도 한국의 뉴스만 보면 공연히 흥분하고 역정을 냈다.

 

지혜는 이제 준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어정쩡한 상 태로 동거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은 두 사람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약하기 힘든 일이지만 먼 후일 다시 준을 만난 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어떤 전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그가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게 천천히 배려하는 지혜가 필요 했다.

준은 학위를 하고 그녀보다 먼저 귀국해서 바로 3선 국회의원 000의 보좌관이 되었다. 000는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실정 법을 어기고 북한으로 밀 입북해서 통일일꾼이라는 김일성의 환대를 받 고서 귀국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 동안 실형을 살았다. 소위 양 심범에 속하는 인물이지만 어설픈 양심범이 국가를 위기 속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혁혁한 투쟁(?) 이력과 3선이 라는 관록 때문에 당내에서도 소장파를 지휘하면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 지고 있었다. 2년 후 지혜도 준의 뒤를 따라 귀국했다.

아무튼 국회라는 곳은 전과자라야만 국회의원 자격이 주어지는 곳으로 착각할 만큼 전과자가 많은 집단이다. 사기횡령. 조세포탈. 배임 뇌물수 수 등 범죄별로 본다면 온갖 잡범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다. 그 중에도 더 욱 황당한 것은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죄수복을 입고 교도소를 들락날락하 던 인물이 사면이라는 것을 받고 다시 국회의원이 된 일이다.

이런 일을 보면서 국민들은 어리둥절하다 못해 황당하기 까지 했다. 이 권에 개입해서 뇌물을 받아먹고 들통이 나지 않으면 그 뿐이고 설사 들통 이 났다고 해도 정치적 모함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재수가 없어 정식 기 소가 되면 몇 개월 징역을 살다가 나와서 사면을 받고 다시 의원 선거에 나선다. 그래서 국민들은 전과가 있어야만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고 착각 할 지경이다.

“이번에 선배가 당선되었으면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나가기로 약속이 다 되어 있었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잖아. 누가 그곳에서 낙선할 줄 예 상했겠어. 거긴 전통적으로 00당의 텃밭이었거던. 어떻게 그곳에서 여당이 당선될 수 있어?”

“아니, 그것보다 유권자들의 마음이 돌아섰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좌로 치우치고 나중에 종북 좌파정당으로 알려진 이o희의 000당과 연합까지 하면서 국민들이 몹시 불안했던 거 아닐까?”

준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몹시 낙담했다.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입문의 발판을 삼으려고 했던 것이 성사 일보 직전에 좌절 됐다. 결국 그 자리는 밀입북해서 김일성의 환대를 받고 온 임oo라는 여 자의 차지가 되었다. 그 여자는 등원하자마자 탈북자들에게<변절자>라고 막말을 해댔다. 그 여자의 말은 자유를 억압당하고 굶어죽더라도 김정은에게 충성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한마디로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려면 북쪽으로 밀입북해서 김정은의 환대를 받고 실컷 이용당한 뒤 반공법 위반으로 교도소엘 가서 훈장이나 달고 나오던가 아니면 돈이 많아서 공천헌금을 많이 내든가 판사나 검사 라도 지내야만 가능한 것이 한국적 현실이 되고 말았다.

준이 부모와 의절하디시피 사이가 멀어진 것은 준의 정당 선택 때문이 다. 골수 보수인 그의 아버지는 준이 000당으로 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당인 000당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000당은 가진 자들과 기득권을 누리는 30년 군사독재 정권의 전신이라고 생각하 기 때문이다. 여당인 000당도 싫지만 그의 아버지의 지론은 한마디로 야 당인 000당은 빨갱이들이 득실거리는 종북 좌파 정당이라는 것이다. 소 득 재분배도 좋고 복지도 다 좋은데 내 아들이 빨갱이들과 영합해서 나라 를 절단 내는 당으로 가서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준은 000당은 아버지가 알고 있는 그런 당이 아니고 국민이 골고루 잘 살게 하려는 당이라고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공산당이 아니고 뭐냐면서 막무가내였다. 그는 어떻게 40퍼센트 이상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당이 빨갱이당일 수 있느냐고 설득했으나 아버지는 아예 귀를 막고 들으려하지 않았다.

신포에서 명태를 잡아 큰 재산을 모았던 준의 할아버지는 부르조아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하자 북한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1.4후퇴 무렵 가족들을 범선에 싣고 동해바다로 해서 주문진까지 왔다가 내친 김에 부산까지 내려왔다.

깡통과 보루박스 등으로 영주동 산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국제시장에서 헌 군복 옷가지를 어깨에 둘러메고 장사를 시 작했다. 몸에 지니고 나왔던 금붙이를 팔아 작은 점포를 마련했으나 국제 시장의 대화재로 쫄딱 망해버렸다. 낯선 남한 땅에서 그의 할아버지가 재 기하기까지는 피눈물 나는 고초를 겪었다. 피난 당시 열두 살이었던 준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그런 가족사를 가지고 있는 준의 아버 지가 빨갱이라면 이를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준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판 다투고 난 뒤 집 을 나와 독립했다. 그 동안 돌봐준 부모님께는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준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혜의 인생은 좀 달라져 있었 을 것이다. 어쩌면 허리우드로 진출해서 니콜키드만이나 디카프리오, 아 니면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같은 영화배우들과 자신이 쓴 시나리 오로 영화를 찍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녀가 쓴 시 나리오가 한 두 편쯤은 감독의 눈에 들어 영화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 의 졸업 작품인 단편영화가 전미 학생아카데미에서 당당히 금상을 수상 했다. 그건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졸업도 하기 전에 허리우드에서 같이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콜이 들어왔다.

학생 아카데미에 입선도 못했던 엘시아도 지금 파리에서 영화를 찍고 있다. 엘시아로 부터 전화가 왔다. 파리에 놀러 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영화를 찍고 있긴 하지만 자신이 직접 찍는 것이 아니니까 시간이 많다고, 지혜가 오면 같이 온 파리를 누비고 다니자고 했다. 엘시아는 데이비스와 헤어진지는 오래였다. 그 사이 남자친구가 세 번이나 바뀌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디카프리오 같은 남자라면 몰라도 당분간은 연애할 생각 없어. 그 자 식은 지금 자기보다 열 여섯이나 어린 모델하고 연애를 하고 있거던.”

그리고는 송화기에 대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지금 찍고 있는 영화의 주 연이 디카프리오라고 했다.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엘시아의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모습을 생각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월말에 파리로 가 겠다고 하자 펄쩍 뛰면서 좋아라 했다. 지혜의 계획은 우선 엘시아와 함 께 파리를 헤집고 다니면서 그동안 울적했던 심신의 피로를 풀고 심기일 전해서 엘에이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거기서 공부를 좀 더 한 뒤 허리우 드와 관계를 복원하고 준 때문에 유보했던 자신의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 이었다.

 

준은 사흘 동안이나 오피스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준에게 제법 긴 편지 를 남겼다. 서로에게 냉각기가 필요하다는 것과 오피스텔 처분 같은 실무 적인 일들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이미 사무실의 책상 정리를 하고 연속성이 있는 업무의 미진한 부분은 일일이 메모해서 찾기 쉬운 곳에 놓아두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자신이 영상원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회식이니 뭐니 하는 것이 번거 롭고 사람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는 일들이 내키지 않았다.

노인에게 사고가 일어난 것은 원장에게 사표를 제출하기 하루 전날이 다. 영화관의 입 출입과 안내를 맡은 여직원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 무실로 뛰어들었다. 노인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몇 안 되는 관객들은 모두 밖으로 나왔는데 노인만 그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날 상연된 영화는 ‘석가모니’라는 영화였다. 장일호 감독 작품 으로 상영시간은 93분에 1964년에 제작되었다. 당시로서는 제작비가 엄청나게 투입된 총 천연색 시네마스코프였다. 왕년의 스타배우 신영균 과 박노식. 김지미. 최지희 등이 출연했다.

여직원은 전에도 더러 그런 일이 있었던 터라 조금 기다렸다가 노인 곁 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고개를 아래로 깊숙이 떨 군 체 앉아 있었다. 처음 에는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었거니 생각했다. 불러도 깨지 않았다. 아무 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여직원이 가볍게 노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 러자 노인의 몸이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노인은 숨을 쉬지 않았다. 급 한 대로 비치되어 있던 제세박동기로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119 구급대원들이 도착해서 노인의 죽음을 확인했다.

“참 딱한 노인이네. 노인네 저 세상에서도 자기가 나온 영화를 열심히 볼라나 모르겠네.”

최부장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노인이 흘러간 영화를 열심히 보러 오는 이유에 대해서 이미 뭔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최부장은 분명히 노인이 나온 영화라고 했다. 그렇다면……?.

“부장님! 자기가 나온 영화라면 그 노인이 영화배우였다는 말씀입니 까?”

“아, 아직도 그걸 몰랐어요. 그 노인, 왕년에 신성일이가 깃발 날릴 때 주연은 못했지만 조연으로는 꽤 이름이 있었던 영화 배우였어요. 옛날 우 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영화에는 조연으로 안 나온 영화가 없었을 정도로 말이오. 오늘 상영한 영화에도 단역이지만 조연으로 나왔을 거요. 그런데 구구로 가만히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5공 때 입바른 소리하다가 보안 사에 끌려가서 좆나게 당하고 나온 뒤로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고 집안이 거덜이 났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다리를 저는 것도 그 때의 고문 후유 증이고.”

“그렇다면 이곳에는………?”

“물어 볼 것도 없는 거 아니요. 한심하게도 왕년에 자기가 조연이나 단 역으로 출연했던 영화를 보러 왔던 거 아니겠어요.”

“아 - !”

지혜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 같은 작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제 서야 그 간 베일에 싸여있던 노인의 행적이 얼마만큼 이해가 되는 것이었 다. 노인은 자신이 조연으로 출연했던 흘러간 영화를 보면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옛날을 꾸준히 되찾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앞좌석의 등받이에 달린 모니터에 파 리의 드골공항까지 이정과 거리가 마일과 킬로미터로 번갈아 표시되고 있었다. 8991킬로미터, 멀고 먼 여정이다. 기창으로 서해바다의 일몰이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태양이 바다 밑으로 잠기고 하늘이 검푸르스름 한 색깔로 바뀌었다. 비행기가 순항고도를 잡자 그녀는 준비한 멜라토닌 을 입안에 털어 넣고 목구멍으로 삼켰다. 물을 가지고 온 승무원에게 깨 우지 말 것을 부탁하고 이내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승무원이 담요를 가져와 어깨를 덮어주고 스티커를 붙쳤다. 그녀가 잠이 깰 무렵이면 파리 와 좀 더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2013년 6월 18일 토지문화관에서 집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