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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수필 - 최효선 - 마지막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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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02회 작성일 15-01-0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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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

 

메마른 대지 위에 반가운 단비가 금빛처럼 내리는 아침.

 

속초 밥사랑 공동체에서 식단 준비가 한창인 오전 9시경에 쭈그러진 우산에 묻은 물기를 떨어내며 초췌한 모습의 할아버지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 서셨다.

 

말 할 기운조차 없으신 듯 가만히 서 계신걸 보고 “할아버지 들어오세 요.” 하고 권하여 자리에 앉게 한 후 따뜻한 녹차를 한잔 권해 드렸다.

 

“나는 요 앞 주공4차에 사는데 할머니가 아파 누워 있어, 나는 밥을 먹고 싶어도 못먹는데 여기 오면 밥 준다고 해서 왔어”

 

“잘 오셨어요, 곧 차려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 후로 할아버지는 매일 빠짐없이 식사를 하시고 간간이 찬과 국을 가지고 가셔서 할머니를 봉양하셨습니다.

 

갈잎의 짙은 녹색이 해묵은 솔잎을 감싸 안아 설악산 자락이 온통 짙은 녹음으로 채색 될 무렵 밥사랑 공동체 벽에 걸어 놓은 복음의 메시지를 할아버지께 전하여 드렸습니다. 그 분은 윤영희 할아버지로 76세이고 귀 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 계신데도 크게 말을 해야 겨우 알아들 으실 정도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벽에 걸어놓은 말씀을 서너 번 읽으시곤 아무 말씀 없이 식 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 이튿날 식사를 마치신 할아버지가 내 손을 이끄시며 “나도 교회에 가면 안될까.”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의 손을 잡고 주일 날 교회로 옮겨가는 발걸음이 너무 가볍고 상쾌하였습니다. 첫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하면서 어떠시냐고 여쭈었더니 귀가 들리지 않아 무슨 말씀을 하는지 듣지는 못하였지만 마음이 훈훈해 지고 왠지 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었습니다. 나는 그 분의 손에 성경책 한권을 선물로 전해 드렸습니다.

 

그 분의 할머니는 작년에 위암 수술을 받으시고 치료 중에 허리까지 아 파 수술을 받고 누워만 계시기 때문에 식사를 비롯하여 집안 살림을 할아 버지가 도맡아 하고 계십니다. 할아버지도 심장병이 있으셔서 활발한 활 동을 못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주일 예배와 매주 금요일에 드리는 속회예 배를 한 번도 빠짐없이 열심히 참석하시고 가르쳐드린 말씀을 집에 가셔 서 꼭 읽고 마음에 담아 두셨습니다.

 

교회 출석 후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기 때문에 2006년 12월 24일 베푸는 세례를 받으시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강릉 아산병원에서 검사를 받았 는데 수술을 해야 된다는 결과를 받고 지레 몸져눕게 되셨습니다. 수술 예약이 2007년 12월 12일로 잡혔습니다.

 

수술 받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우셨던지 급격히 체력이 약화되어 거동이 불편할 정도여서 세례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 후로 간간히 심방을 하여 기도와 위로를 해드리고 말씀 속에 회복의 비전을 제시하여 드렸습니다.

 

1월 중순 무렵 찬과 음료수를 가지고 방문하였는데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아주셨고 방문기도를 마치기 무섭게 편지지 묶음을 내미는 것이었습니 다.

 

그 편지지에는 기도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기도문에는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 피처럼 맺혀있었습니다. 어 느새 할아버지의 심령에 말씀의 싹이 피어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시려는 믿음이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쓰시고 계속 반복하여 기도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할아버지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오늘도 하나님의 은공을 모르고 살아가는 미련한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일용할 양식과 음식물을 내 려 주셔서 감사히 먹고 있습니다만 파평 윤씨 윤영희 계유생 윤 5월 30일 생 과 정선 전씨 전춘열 병자생 6월 12일 생 두 인간들이 몸에 병이 들어 강 릉병원에서 치료 중입니다. 아픈 데는 빨리 낫게 하여 주시고 집에 마귀 일 랑 몽땅 몰아내 주시고 아픈 데가 없이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그 날 할아버지 내외분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의 기도를 응답하여 달라 고 간절히 기도 하였습니다.

 

전춘열 할머님도 누워 계신 채로 손을 모으고 기도하셨습니다.평생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사셨던 분이 이제야 그 분이 누구신지 아시는 것 같았습니다.

 

수술 예약 2일 전에 다시 심방하여 위로를 드리고 수술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드렸습니다. 윤영희 할아버지는 12일 아침 아드님이 오셔서 강릉 아산 병원으로 모셔갔습니다. 출발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전화 연락도 되 지 않아 진행 결과가 궁금하였지만 일과에 마음을 뺏겨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급식준비로 바삐 일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환한 표정으로 불쑥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대뜸 하시는 말씀이 “장로님! 나 수술 받지 않아도 되고 약만 먹으면 된대,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어”

 

이게 무슨 말씀인가 수술 받으러 가신 어른이 집으로 돌아오신 것도 그 렇고 하나님께서 다 고쳐 주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할아버지 손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 자초지종 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말씀 내용을 요약하면 담당 주치의가 수술 전 검사과정에서 할아버지의 상태가 수술 결정을 할 때 보다 좋아졌기 때문에 수술을 하지 않고 약물치료가 가능하다는 재진단을 내리고 거기에 합당 한 처방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좋은 결과를 할아버지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였기 때문에 고쳐 주 신 것이라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빨리 알려주고 싶어 아침 일 찍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지 손을 부여잡고 감사의 기 도를 드렸습니다. 때마침 봉사하기 위하여 오신 교암교회 여선교회 교우 님들에게 사실을 간증하니 모두가 내일처럼 기뻐하였습니다. 아내의 권유에 따라 다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연방 웃으시면 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우리 할멈도 곧 나을 거야” 치료하고 위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시간이 지나 10월 15일 아침 급식 준비를 하느라 한 참 분주한데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찍힌 번호가 낯선데 여인의 목소리 가 다급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내용인데 쓰러진 분이 누군지, 전화 거는 여자 는 또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내가 다시 전화를 하여 차근차 근 이야기를 유도했다.

 

내용은 시부모님이 밥사랑 공동체에서 점심을 드시는 윤영희 할아버진 데 그 분이 갑자기 쓰러지셨고 자기 남편은 허파에 구멍이 뚫려 아산병원 에서 수술 받고 누워있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니까 시어머니가 내 전화번호를 알려 주어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아~ 나도 모르게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지난 주일에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금요일 속회 예배도 오시지 않아 궁 금하여 심방을 한다는 게 미처 찾아뵙지 못했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

 

나는 즉시 119로 응급구조 요청을 하고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갔다. 앰뷸런스가 강릉 아산병원으로 후송하였으나 이미 의식은 없는 상태였다.

 

윤영희 할아버지는 심장질환이 있는데도 약주를 좋아하셨고 평소에 약 주를 드시면 할머니를 못살게 구셨다.

 

그런 할아버지를 설득하여 교회로 모시고 나가 신앙생활을 하시도록 도와 드리고 약주를 드시면 심장병에도 좋지 않으니 끊으시라고 권유한 결과 약주를 끊으셨다. 그 후 근 일 년 반 가량 약주를 입에 대지를 않으 셨는데 전날 저녁 때 옛날 술친구가 찾아와 밖에 나가 함께 술을 마시셨 다. 아침에 일어나 어지럽다고 하면서 털썩 주저 앉았는데 그 길로 일어 나지를 못하신 것이다.

 

강릉아산병원에서 의사 소견이 의학적 조치는 할 수 없는 상태로 다만 호흡기로 호흡만 할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속초의료원으로 모셨다.

 

할머니는 병상을 지키면서 기계에 의존하는 꺼져가는 숨길을 하나하나 세듯 고개를 자꾸 끄덕이신다.

 

“할머니 좀 누우세요.” 보조의자를 정리하여 눕혀드리니 내 손을 꼭 잡 고 하시는 말씀이 할아버지가 술을 끊으신 지난 일 년이 참 좋으셨다고 하셨다.

 

언젠가는 가셔야 할 길인데 술친구의 한 잔 부추김이 종착역을 끌어 당 겼다.

 

나는 마음속으로 “할아버지 이제 무거운 짐 내려놓으세요.” 하며 마른 나뭇가지 같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