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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수필 - 최효선 - 잊을 수 없는 나의 스승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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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25회 작성일 15-01-0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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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전쟁 이후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인 1952년에 충북 충주시에 있는 남산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하였다.

 

그때의 학교는 폭격으로 절반 가량 무너지고, 책상 없는 교실엔 가마니 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탁자 비슷하게 책상을 만들어 책가방처럼 가지고 다니던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신 이상춘 선생님은 3학년 때도 담임을 맡으셨기 때문에 나 뿐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이 셨다.

 

특이한 것은 선생님의 복장이 계절에 관계없이 변함이 없으신 것이다. 셔츠의 소매는 여름엔 짧게 걷어 입으시고 겨울엔 내려 입으셨다. 윗옷은 여름엔 벗고 겨울엔 입으시고 그래도 늘 웃으셨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이 나라가 잘 살려면 너희들이 꿈을 가져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1955년, 그 해에 선생님을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그때 당시 모두의 생활이 어려웠고 그중에서도 보릿고개라는 춘궁기는 정말로 넘기기 어려운 가난의 고비였다.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고 산나물로 연명하기도 하고 덜 익은 보리 이삭을 잘라 먹기도 했던 어려운 시절 나 역시 늘 배가 고파 하얀 쌀밥을 많이 먹어 보 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 해 5월 중순 경 수업을 마치고 하교를 하는데 자꾸 어지럽고 땅이 움 직이는 것 같아 헛걸음을 치게 되어 플라타너스 나무그늘에 잠시 쉬어 가려고 앉았는데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깨어보니 집이었다.

 

어머님이 울고 계셨다. 그 옆에 담임선생님이신 이상춘 선생님도 계셨다.

 

내가 눈을 뜨자 선생님께서 반가워하시면서 괜찮으냐고 걱정스럽게 말 씀하시면서 손을 꼭 쥐어 주셨다. 영문을 모르는 나에게 어머님께서 말씀 하셨다.

 

내가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을 선생님께서 발견하시고 나를 업고 집으로 오셔서 누인 다음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와 응급 치료를 해주셨다고 하셨다.

 

원인은 영양실조에 허기가 져서 쓰러진 것이라고 했다.

 

기실은 그날 아침을 굶고 점심도 먹지 못하였다. 나 말고도 몇몇 친구 들이 도시락을 못가지고 다녔는데 점심시간이면 다른 아이들 도시락을 나누어 먹기도 했지만 대개는 밖으로 나가 놀았다.

 

 

 

어머님께서는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말씀 하셨다.

 

내가 언뜻 선생님의 얼굴을 보니 선생님께서 둥둥 걷어 올린 소매자락 으로 눈물을 닦고 계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상춘 선생님이 황해도 연백에 가족과 어린 아들 을 두고 단신으로 월남하시어 힘들게 지내시면서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날을 위해 근검하게 사셨고 그 때문에 단벌로 지내셨던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점심시간이면 선생님께서 5명씩 짝을 지어 점심 을 먹게 하셨는데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은 친구들을 한 명씩 끼워 함께 식사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반 친구들 중 넉넉하게 사는 어머니들께서 도시락을 2개씩 싸서 보내기도 하셨기 때문에 점심을 거르지 않고 먹을수가 있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도시락을 나누어 주었던 친구들과 돈 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이상춘 선생님께서 가끔 자장면을 사주셨는데 그때마다 북에 두고 온 아들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여섯 살이고 이름은 재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조금 불편한 것이라고 하셨 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하고 떨어져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눈물 을 흘리셨다.

 

그 때는 선생님의 아픔을 알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 아픔이 어떤 것 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중학교에(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곳이 중학교 교정이었다) 입학하 던 날 선생님께서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로 데리고 가서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어려울 때마다 이 일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상춘 선생님이 수원으로 가신 후 소식을 알 수 없 었고 나도 선생님을 잊고 세월이 지났습니다.

 

내가 속초공항으로 부임하기 한 달 전 1998년 3월 초등학교 동문회에 참석하여 친구들로부터 이상춘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다. 순간, 나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선생님 ! 용서하세요.

 

삼가 명복을 빕니다.

 

나는 초등학교 앨범 값을 내지 못해 받지 못했다.

 

선생님 모습이 보고 싶어 친구에게 부탁하여 초등학교 앨범을 복사해서 받았다.

 

복사한 초등학교 앨범 속에 이상춘 선생님께서 활짝 웃고 계신다.

 

북에 두고 온 재민이도 못보고 가신 선생님! 사랑합니다.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