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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수필 - 최선희 -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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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08회 작성일 15-01-0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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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293년 우중충한 초여름 어느 토요일. 바느질쟁이로 소문난 우 리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좀 큼직한 양양여고 교복을 입고 뽐내며 집으로 들어서다가 딱 걸렸다.

 

닷새마다 오는 양양장날이긴 하지만 장보러 다니시는 큰아버지가 아니시다.

 

뜰 밑에 큼직한 흰 고무신이 놓여있다. 방안에는 조산에 사시는 큰아버 지께서 오랜만에 와계신다. 바지저고리에 흰 두루마기로 정장을 하신 큰 아버지 옆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같이 계신다. 나는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쳐다보시는 큰아버지의 표정과 눈빛이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한 참 후에 “너 어디 갔다 오니?” 엄숙하게 물으신다. “저 학교 다녀왔습니 다.” “뭐 지즈바(계집애)가 고등학교까지 또 들어갔어? 아들덜도 못 다니 는데.”

 

각오는 했지만 나만이 아니라 부모님들까지 아무 말씀 못하시고 큰 죄 를 저지르신냥 고개를 숙이고 계신다. 큰아버지께서 찾아오신 목적은 동 생이 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장날 막걸리 맛보러 오신 것도 아니다. 강 릉 최씨 문중족보(門中族譜)를 만들기 위해 가족에 대한 자료를 적으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한 필요한 내용만 적으신다. 큰댁 오빠들은 적었는 데 나 최옥규(崔玉圭)는 물어보지도 않으신다. 잊고 그냥 가실까봐

 

“아버지! 나는 왜 안 적어요?” 여쭈니 대답은 큰아버지께서 큰 목소리로 “지즈바가 무슨 족보에 올라가?”하신다. 나는 같은 강릉 최 씨가 아닌 가? 고추붙이지 못하고 태어난 계집은 가짜 최 씨인가? 너무 덜덜 떨리고 분하다. 그러나 대대로 여자는 무시당하며 살아온 우리나라의 역사를 원 망하며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하였다. 밤새 괘씸함을 풀지 못한 나도 마음 이 비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왜 내 이름을 항렬 따라 규(圭)자를 넣 어 옥규(玉圭)라고 지었는가? 그럼 족보에 올려야지. 나는 엄마 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하였다. 내 이름 바꿔 달라고.

 

며칠 후 어머니는 어느 철학관에 가셔서 개명(改名)을 해 오셨다. 남자 동생도 볼 수 있는 이름이면 더욱 좋겠다고 하셨단다. 결국 효과는 없었 다.

 

이름은 최옥규(崔玉圭)가 최선희(崔仙熙)로 바뀌었다. 시원섭섭하였지 만 마침 어머니 외사촌이 양양 등기소 소장을 하셨기에 법원을 모두 거쳐 17년 만에 호적상 최선희가 되었다. 학교에도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부 터 생활기록부의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지금도 초등학교나 중학교동창 들은 “야! 옥규야!”로 부르며 우정을 나눈다. 왜 나는 무남독녀로 태어나 외로움으로 자라 형제간 다툼 연습도 못해보고 자랐다. 친구와 기분 나쁘 거나 억울한 일이 있어도 따져서 해결을 못보고 그냥마음에 묻어 참고 지 내야만 하는가. 항상 밝지 못하고 얌전하기만 하던 나였다. 며칠에 한 번 씩 아들을 못 낳아 아버지로부터 주정을 당하는 불쌍한 엄마의 모습을 보 고 고추를 못 달고 태어난 나 자신을 원망 안할 수가 없다.

 

과학적인, 아니 생리적인 기본 상식이 부족했던 옛 부모님들은 무조건 아들을 못 낳은 원인 제공자가 여자들이라고 죄인 취급을 당해야만 하였 다. 딸은 키워 성씨가 다른 남의 집으로 시집을 보내야 하니 물론 섭섭하 겠지.

 

우리가 아닌, 내 엄마 아버지께서 나를 중고등학교 교복을 입히고 친척 들로 부터 많은 미움을 받았다. “계집애는 살림이나 잘 가르쳐 괜찮은 집에 시집 보낼 생각이나 해야지 또 무슨 학교야.”하는 비웃음의 소리들.

 

그러나 불효녀 나는 11명의 양여고 졸업식후 대학교의 욕심을 버릴 수 가 없었다. 일주일정도 잠도 잘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부 모님께 감히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형제자매 없이 얌전하게 자란 나는 군것질이나 필요이상 낭비는 안하는 성질이다. 몇 년 동안 이래저래 생긴 한푼 두푼 용돈을 엄마가 다 쓰신 큰 크림빈병을 창고 바닥에 묻어 꼬깃 꼬깃 숨겨 저금하였다. 그 비상금과 용돈 좀 더 받아 가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부모를 욕되게 하는 불효녀이기에 며칠간 친구 집에 다녀 온다는 핑계로 양양에서 하루 1회만 운영하는 서울발 완행버스로 새벽 다섯 시에 출발하였다. 옷이 없어 겨울 교복에 흰 카라만 떼고 처음 가보 는 서울을 차멀미로 반은 죽어가며 시커먼 석탄가루 묻어있는 신설동에 도착하였다. 나이 들어 옛일을 회상 해 보면 그때는 철이 덜 들었는지 겁 도 없었다.

 

촌티를 줄줄 내며 길을 물어 하왕십리 파출소를 찾아 얼굴도 모르는 경 찰관 고종사촌형부를 찾아 나를 밝혔다. 소사 총각 뒤를 따라 언니한테 갔다. 깜짝 놀란 고종사촌언니와 의논하여 추가 신입생모집 대학교를 찾 아 시험을 보고 합격 명단을 확인하고 또 대학교까지 다니게 된 욕먹는 계집애 되었다.

 

기가 막힌 부모님들은 고집을 부리는 딸아이라도 아들대신 키워보자고 할 수없이 등록금을 보내주는 희생부모가 되셨다. 친척들이 와서

 

“옥규는 어디 갔느냐”고 물으면 강릉 외가 갔다고 핑계를 대다가

 

“다 큰 지즈바가 뭐 그렇게 외가 가서 오래 있느냐”고 야단도 많이 듣고 드디어 꼬리는 잡혔다.

 

이렇게 여자는 부모를 괴롭히며 성공 하여야 하는가?

 

불효녀는 부모님 괴롭힘으로 손에 교사자격증과 발령장까지 받아 교단 에 서게 되었다. 딸을 결혼시키고, 딸이 아들 대행을 시작한지 몇 년 안되어 아버지는 아버지의 책임완수 다 하셨다는 듯 이젠 편한 곳으로 가시 겠다고 젊은 연세에 갑자기 냉정히 떠나셨다.

 

묘지 앞 비석에는 친자식 하나뿐인 내 이름은 없다. 집안 어른들이 딸 은 비석에 이름을 새기는 것이 아니란다.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신 후에 도 딸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히려 본인 의사도 묻지 않고 법적으로 아들 도 아닌 큰아버지의 작은 아들을 비석에 이름을 새겨주었다. 벌써 43년 전 억울하고 분하다.

 

올해도 딸이지만 아들처럼 명절과 부모님 제삿날에는 모든 준비 다하 여 양양산소 부모님을 찾아 제사를 올리고 옛 이야기와 새 소식으로 대화 를 나눈다. 보이지 않는 부모님 모습을 그리며 마음을 푹 쏟고 온다.

 

하지만 많이 배우고 세련된 교육계에 근무하면서도 여교사는 무시당하 는 교단생활이었다. 나는 여자라고, 여교사라고 상사나 남교사들로부터 부족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병설 유치원 겸직을 하면서도 방 학이면 자료개발과 연구에 신경을 써서 승진에 필요한 점수를 차곡차곡 쌓아 갔지만 여자라고 점수가 필요한 부장을 임명하지 않아 많이 괴로웠 다.

 

고성군의 벽지학교를 속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로 출퇴근하면 서 벽지점수도 확보되었지만 부장 점수가 많이 부족하였다. 나이는 많아 퇴직은 가까워지고 교감승진이 급해 용기를 내어 새로 부임하신 낯선 교 장선생님이 계신 교장실을 찾았다.

 

“교장선생님! 저 교사 최선희입니다. 경력도 많고 승진에 필요한 연구, 벽지점수 거의 준비되었는데 부장점수가 너무 부족합니다. 부장 시켜주 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부탁의 말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뭐 여자가 부장 달라고? 웃기고 있네. 이 학교에 남교사가 그렇게 모자라? 나가봐.” 후들후들 떨리고 뛰는 가슴을 움켜쥐고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왔다. 결국 고참 여교사 최선희는 또 점수 없는 1학년 주임이고 교단에선지 몇 년 안되는 총각 남교사가 부장 임명을 받았다. 여교사들이 따져 봐야 된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이미 끝났으니 할 수 없다고 겨우 자재를 시켰다.

 

얼마 후 교육감님이 시,군 교육청 방문 때 고성군 여교사회장 자격으로 참석했던 나는 손을 들어 건의를 하였다.“ 교육감님! 여교사는 부장자격 도 없습니까? 각 시,군에 부장 여교사들이 몇 퍼센트나 되는지 교육감님 과 장학사님들 알고 계십니까?” 목숨 걸고 억울한 여교사의 하소연을 풀었다.

 

다음해에 분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도내 부장 여교사들이 많아졌다는 소식 들었다. 그렇게 무시당하고 떼를 써서도 교감을 4년이나 근무시키 고, 할 수없이 벽지학교 교장 1년 경력으로 어물어물 정년퇴임을 하게 되 니, 하고 싶은 교육관을 펼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미안하 고 가슴 아픈 여교사의 추억이 아쉽다. 이제는 무시당하는 여교원의 세대 에서 많이 탈피되었다는 현직 여교사들의 반가운 소식이 고맙다. 여성들 이여 힘내자. 문화가 향상된 요즈음 세대 남녀부부는 아들, 딸 전혀 관계 없이 한, 두명을 낳아 잘 성장시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범들이 되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남녀는 평등하다. 여성도 국가의 리더자격 충분하다. 무시당했던 여성들이여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