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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수필 - 서미숙 - 에스프레소를 닮고 싶은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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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91회 작성일 15-01-0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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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커피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더치커피와 말레이사향고양이 (paim civet)의 배설물로 만들어진 일명 고양이똥 커피라는 ‘루왁커피’ (kopi luwak)가 커피 매니아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주변 사람으로부터 한 방울 한 방울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든 더치커피를 선물받기도 하고, 아주 귀한 것이라며 받은 루왁커피를 맛본다는 신기한 마음으로 몇 번 마시다가 우연히 루왁커피의 생산과정을 다룬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아주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사향고양이에게 오 로지 커피체리만을 먹여서 커피콩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양이들 이 영양실조와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보이는 장면을 보면서 그만 채널 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십오년 전 어느 크리스마스 날에 있었던 에스프레소 커피 소동이 떠올랐다.

 

그 해 크리스마스는 오전까지는 재미없는 휴일이였다. 아이들은 제각 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정신에 아침 일찍부터 서울과 강릉으로 나가 엄 마는 안중에도 없었고, 만나서 커피 한잔 하자는 친구조차 없는 짜증나는 하루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오후가 되자 하늘에서 굵은 눈발이 비치 더니 세상을 하얗게 뒤덮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어가는 창밖을 보며 슬슬 속이 끓 어 오르던 참에 휴대폰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미숙씨 뭐해?” 갈뫼에서 같이 동인활동을 하는 강릉의 박 선생님 전화 였다.

 

“아예, 선생님! 안녕하세요? 크리스마스 날 어쩐 일이세요?”

 

“글쎄!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라 그러나. 갑자기 미숙씨가 보고 싶기도 하고 그 동안 어떻게 지냈나 궁금하기도 하고, 겸사겸사 전화했지. 지금 뭐해?”

 

“뭐 하긴요. 그렇지 않아도 아무도 없는 쓸쓸한 크리스마스라고 혼자 투덜대고 있는 참이에요.”

 

“그래! 눈이 와서 좀 뭐하긴 한데, 시간 되면 강릉 나와서 나하고 저녁 도 먹고, 멋진 카페에 가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그럴래?”

 

눈 내리는 하늘과 한 시간이나 걸리는 운전길이 조금은 신경 쓰였지만, 무료하게 혼자 있어야 하는 크리스마스 저녁과 오랜만에 뵙는 선생님 안 부가 궁금한 마음이 더 컸기에, 주섬주섬 옷을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

 

생각보다 눈 내리는 길 위의 드라이브가 어렵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답 답하던 마음이 눈발 사이로 비치는 동해바다처럼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댁 앞에 도착해서 전화를 드리니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셨다.

 

“미숙씨! 우리 이 선생도 불러 내자.” 하시더니 바로 전화를 걸으셨다.

 

평상시 내가 좋아하던 선생님들이시고 너무나 나를 이뻐해 주시던 선 생님들이라 부담스러운 마음이 싹 가시고 기분이 좋았다.

 

이선생님 께서 경포대 쪽에 유명한 한정식집 이름을 대시며, 그리로 가 자고 하셨다.

 

토속적이고 정갈한 음식들과 오랜만의 수다로 저녁식사는 꿀처럼 달고 즐거웠다. 오전의 우울했던 기분이 내리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처럼 사라 지고, 두 선생님 앞에서 나는 종알종알 초등학생처럼 떠들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유명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유 명한 커피숍이라 크리스마스라는 대목이 겹쳐 주차장부터 만원이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구수하면서도 진한 커피향이 진동을 했다. 자리가 나 기를 기다리며 실내를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커피콩들이 함지박과 소쿠 리들에 가득 담겨 아기자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인테리어 가구나 소품 들도 텔레비전에서나 볼 듯한 유럽식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한 30여분을 기다렸을까,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 2인용 테이블이 났 는데 거기에 앉든지, 아니면 30여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기다리 기보다는 그냥 셋이서 보조의자를 놓고 앉기로 하고 자리를 잡았다.

 

두 명의 바리스타가 바쁘게 움직이는 주방 앞에는 눈길을 끄는 다양한 커피 잔이 진열되어 있었고, 진열장 안에는 작은 조각 케익들이 알록달록 먹음직한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가져다 준 메뉴판을 보며 우리는 낯선 커피 이름 앞에 서 무엇을 골라야할지 몰라 그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박 선생님은 달 달한 것을 먹고 싶다며 카라멜 이름이 든 커피와 치즈케익을 시키셨고, 이 선생님과 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에스프레소, 그 것도 더블 로 간신히 주문을 끝냈다.

 

그제서야 여유가 생긴 나는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다. 데이트 나온 연인 들과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내려는 젊은 친구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중 년에 접어드는 나와 두 분의 선생님의 그림은 부조화 그 자체였다. 그러 나 우리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 옛날의 어느 한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수다꽃을 피웠다. 갈뫼 이야기며, 자 식 이야기로 수다를 떨다 보니 드디어 우리가 주문한 커피와 치즈 케익이 나왔다. 그런데 세잔 중 박선생님의 커피는 커다란 머그 컵에 잔뜩 넘칠 만큼 담아왔는데, 나와 이 선생님의 커피는 간장종지만한 아주 작은 컵에 담겨 있었다. 메뉴판을 보고 에스프레소 더블이라는 글귀에 더블이 두 배 라 웬지 더 많을 것 같아 그것을 선택했는데 말이다.

 

“아니 뭐야? 왜 이리 작아? 그런데 왜 더블이라고 이름 붙인 거야?” 투덜대며 우리 둘은 낼름 그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입을 대는 순간 나와 이 선생님은 동시에 ‘윽’ 소리를 내며 휴지를 입에 가져가 뱉고 말았다.

 

“무슨 커피가 이리 쓰지? 아 너무 쓰다. 생전에 태어나 한약만큼 쓴 커 피는 처음 일세, 아후~ 못 먹겠지?”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이선생님을 보 시더니 박선생님도 뭔데 그리 쓰냐며 찻숟가락으로 한 스픈 떠서 맛을 보 시더니 “와우~, 뭐 잘못 나왔나 보다.” 하시며 상을 찌푸리셨다. 아르바 이트생을 불러 물을 더 달라고 주문하며 무슨 커피가 이리 쓰죠?’ 하고 물었더니 빙그레 웃으며 ‘저 이건 원래 이렇게 드시는 건데요.’하며 돌아 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쓰다. 못 먹겠다.’

 

우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실 쓰다고 퉤퉤를 외치니 옆의 젊은 사람 들이 수군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설탕을 달라고 했더니 시럽이라고 하면서 참새 눈물만큼 가져왔다. 시럽을 있는 대로 들 이부어도 에스프레소는 여전히 썼다. 물을 더 붓고, 시럽을 더 달라고 해 서 부을수록 커피 맛은 이상하게 더 변해갔다.

 

그리고는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세워 무슨 이리 쓴 커피를 주냐며 불평 을 늘어놓자 아무런 설명도 안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원래 그렇게 먹 는 거라고 짜증만 내고 갔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날 이게 웬 낭패냐며 잘 못 왔다고 값만 비싸고 바가지 썼다고 푸념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모습 을 지켜보던 옆 테이블의 젊은 부부 중 남자가 다가오더니 에스프레소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는 그제서야 소동을 멈추고 급히 앞에 놓인 케익을 입에 넣었다. 커피와 달달한 치즈 케익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촌스러운 나는 처음 먹어보 는 맛에 아 줄 설만 하구나 하고 혼자 속으로 그제서야 마음이 가라앉았 다. 나는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케익을 먹을 기회가 생기면 꼭 치즈케익을 고집한다. 오랜 세월 달콤한 맛에 사족을 못 쓰던 생크림 케익은 그날 이후 작은 치즈 케익에 밀려난 것이다.

 

케익으로 간신히 쓰거운 입맛을 달랜 우리는 그곳을 서둘러 빠져나왔 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많은 젊은이들이 말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와 나이가 지긋하시고 멋스런 두 사람 그렇게 앉아서 쓰다고 투덜대며 촌스 럽게 연신 시럽과 물을 쏟아 붓는 모습을 지켜보며 킥킥 거렸을 생각을 하니 뒤통수가 가려워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기가 머쓱했다.

 

그 날 눈 속을 한 시간정도 운전하며 돌아오는 내내 나는 에스프레소의 그 쓴 맛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눈 오는 날이거나, 커피숍에 갈일이 있으면 에스프레소라는 이름은 나에게 빙그레 미소를 띠게 만드는 존재였다.

 

더구나 이제는 그 에스프레소의 맛을 알아 어디든 가며 즐겨 마시는 나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집에서도 아침을 보내고 집안 청소를 하고서 내 가 좋아하는 차이스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음악을 집안이 쩡쩡 울리도 록 틀어놓고 이 커피 향을 음미하면서 마시곤 한다.

 

내게 있어서 에스프레소의 그 진향 커피맛은 나의 엔돌핀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같이 공부를 하는 다중지능 스터디그룹의 선생님들과 학부모연수를 기획해서 실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첫날 강의를 맡으신 선 생님이 동기유발 자료로 ‘에스프레소 맨’이라는 동영상을 틀어주셨다.

 

‘모든 커피 메뉴의 기본은 에스프레소에서 시작한다.’ 라는 멘트로 시 작된 동영상은 나에겐 충격적이였다. 에스프레소에 우유 거품을 넣으면 마키아토, 설탕과 생크림을 얹으면 콘 파냐, 우유거품과 캐러멜 시럽을 얹으면 캐러멜 마키아토, 따뜻한 우유와 섞으면 카페 라떼, 따뜻한 물로 희석하면 아메리카노, 우유와 넣고 우유거품을 올리면 카푸치노, 생크림 과 초콜렛 시럽을 넣으면 카페 모카, 휘핑크림을 올리면 비에나, 등등

 

우리가 카페의 메뉴판에서 보는 모든 커피의 이름이 모두 에스프레소 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야구의 정현욱 같은 중간 계투 투수인 미들 맨, 축구의 박지성처럼 공격수를 뒷받침하는 미드필더, 유명한 영화와 배우를 뒷받침하는 스태프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에스프레소 맨’ 이 되라고 당부한다.

 

그 동영상을 보고나서 나는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다보게 되었다. 나는 과연 내 주변 사람들에게 에스프레소 같은 사람이였을까?

 

지금 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스 터디 모임, 한국화 모임, 재봉 모임, 갈뫼모임 등 무언가를 배우는 일과 성당이나 봉사하는 일등 하루하루를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제 나는 우리 집의 귀한 두 아이에게도, 내가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모임 에서도 에스프레소 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드러내지 않으나, 없으면 안되는 모든 커피의 기본 ‘에스프레소’커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지금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 이 많아도 열심히 하루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