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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시 - 권정남 - 세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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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79회 작성일 15-01-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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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담벼락 회색 화선지에
흘림체 몇 줄과 한 폭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온 몸, 붓이 되어 올라간 흔적이다


지난 가을, 잎 떨어진 담쟁이 줄기가
혈육을 떠나보내고 쓴, 비문碑文같은 문장과
까칠한 소나무와 잣나무 몇 그루, 그 아래
고즈넉한 초가 한 채가 구름처럼 걸려 있다
영락없는 세한도歲寒圖* 한 폭이다


허공을 움켜잡고 올라간 마른 줄기들
육탈한 몸으로 벼랑에 그려놓은
푸르른 날 목숨 같은 이력이다
생生의 걸작, 끊어질 듯 이어진
무수한 시간의 화석들
마디마디 피가 묻어 있다


낭길 담벼락에 걸려있는
흘림체 몇 줄과 세한도 한 폭
초겨울 석양이 낙관을 찍어주듯
지그시 붉은 손도장 누르고 있다.



*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지에서 그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