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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4년 [시-박명자]강릉 위촌리 달집태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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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갈뫼
댓글 0건 조회 2,789회 작성일 05-03-26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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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날 밤.
강릉 위촌리 우리 마을에서는 휘영청 달 하나 느티에 걸어놓고
마을사람 모두의 손을 모아 달집을 만들었다.
마른 대나무 기둥 세우고 짚솔가지로 지붕 만들고
동으로 문을 냈다.
짚으로 둥근 보름달을 얼기설기 만들고 계수나무도 곧추 세워
두었다.

먼저 동네 풍물패들의 마당놀이가 한바퀴 지신을 밟았다
절름발이 용팔이도 꽹과리 울리며 마을을 둥글게 돌아 나오는데
오늘따라 그의 고개 짓이 더욱 흥겹다

드디어 보름달이 새 옷 떨쳐입고 밝은 웃음을 마을 안에 고루
보낸다.
달은 느티나무에 올라앉아 마을 안을 유유히 내려다본다

이장님께서「점화!」싸인을 보낸다
짚가리에 불이 어느새 확 붙는다
불은 드디어 불춤을 추며 길길이 솟구친다.

마을 구석구석 흉흉한 소문들 어둠의 갈피갈피 숨은 악귀들
차례차례 삼킨다
농약 마시고 자살한 김가네 원혼.
검색어 1602개의 사이트가 차례로 불길 속에 사루어진다.
잉크 냄새 가시지 않은 조간신문 사회면 웃기는 기사들
가슴속 뿌리내린 근심의 잎새들 모두 사루어진다
음지에 숨어 피는 천 개의 병원균도 타버린다

머리풀고 타는 불길 저 너머에는 어둠의 긴 코트 자락과
낡은 관념의 껍데기들이 사라진다.

낯선 문자들이 옆구리에 피 흘리면서
긴 밤 잠들지 못하는 노시인의 아픔도 쓸어간다

타는 불길 마주보며 누구나 소멸의 신선한 부위를 깨물고 있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뒷산 자락에서 은은히 들리는가
타는 불길을 열고 누가 도회로 가는 기차표를 던진다

거센 바람이 혓바닥 내밀고 건너 지났다
마을과 마을 사이 팽팽한 줄이 건너지른다
비명을 안으로 삼킨 원혼들이 그 줄에 매달린다

진동 계곡 관광객들과 주민들은 하나의 마음으로
목청 높여 노래하며 타는 달집을 바라본다

깊은 밤까지 풍물패들은 둥글게 마을을 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