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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추모특집 - 추모시 - 채재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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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44회 작성일 15-01-1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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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한눈판 사이, 잠깐 잠꼬대 하는 사이,
잠깐 소 타고 놀던 사이, 잠깐 불난 집에 머물다
이 삶을 다 던졌다고 하신 그 말씀에 화들짝 놀라
출렁거리는 세상, 깜빡거리는 세상을 건너가시는 선생님을 향해
선생님, 부르면 선생님 댁 마당가에 감나무 잎 사이로
수선화가 노란꽃잎을 펼쳐들고, 때 이르게 찾아든 후투티가
꽃 주위를 맴돌다 날아가는 그 사이로
‘그래’라고 대답하시며 웃으실 것 같은데
이렇게 보내드려야 하다니요
문 밖에 소가 왔나요
코뚜레가 없는 소, 밭이랑 따라 들어온 소, 눈동자에는 구름 향기
두 귀에 나뭇잎 풍경 소리가 나는 소를 따라 걸어가시겠다구요
거품물방울 이 세상
제멋대로 들끓어 아우성치는 이 산을 떠나
40일간의 백두대간 종주,
히말라야를 다녀오시던 그 힘찬 발걸음으로
기어이 소를 따라 가시는군요
4월 공룡능선을 타면 발길 가볍다고 하셨잖아요
하늘이 노을을 내어걸었는데요
설악산에 걸린 흰 구름 한 조각으로 편지를 보내놓고
한 줄만 남아 청봉에 걸려 있는 구름편지를 읽어보라고 하시는
군요
자꾸만 뜰을 쓸어내시곤 하셨지요
세월 조각이 쓸려가고, 피 묻은 마음 이파리도 쓸려가고
저녁 강물이 황혼 거문고를 뜯고
이 저녁 어스름 쏠리는 빈 뜰을 자꾸 쓸어내며 가시는군요
그리운 녹음바다 청람빛 산파도
이 강산 노 저어 풀피리 불며 가시는군요
대청봉의 봄은 살구가 솔새알만큼 자란 다음에야 온다고 하셨
지요
유월에야 반짝하고 핀다고 하셨지요
절벽 나뭇가지도 봄을 터뜨리면
사방을 바라보며 귀 기울이면 봄 피는 소리 천지라고 하셨지요
대청봉의 봄은 아직 먼데
설악산 봉우리들 봉긋봉긋 피어오르는 봄날이라고 서두르시나요
노을 가득한 산기슭을 벗어나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
라봅니다
새는 허공 속으로 날아서 가고
선생님께서는 우주 속으로 걸어가시지만
냉기 서린 바위방석에 앉아 벼랑에 새긴
하늘 파랑 잉크물 찍어 마음 펜으로 새긴 시를,
시를 받아 먹어 볼록해진 산벼랑의 시들을,
있는 힘을 다해 불타오르던 신단풍나무 그 불꽃울음처럼
온몸을 다해 한바탕 시의 춤을 추다 가신 그 길을 기억하겠습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한편 한편의 시를 읽으며
때론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맑아지겠습니다
설악산 철쭉 필 때 오시겠지요 동해가 풀파도로 들떠 있는 이곳
으로
스러지는 저녁 바람과 함께 동해 물결 여울지듯 그렇게 오시겠
지요
토왕성 폭포 부서지는 그곳으로
빛으로 오시겠지요 저녁놀처럼 그윽히 어스름 조금 못 다가간
그런 빛으로 오시겠지요 어느 누구의 한 생이 고스란히 담겨서
다만 조금만 보여주는 그런 빛으로
개울물살 물 아지랑이 밟으며 그렇게 오시겠지요
길 멀어 아득한 날
홀로 마당 귀에 떨어진 나뭇잎을 줍다가
하늘 가득한 별을 보신 적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땐 자신의 별을 찾지 못해
별이 뜰 때까지 반쪽 몸, 반만 울리는 피리라고 하셨는데
이제 하늘에 별이 되어 반짝이겠지요
하늘을 우러러보는 어느 날 깜빡여 주시겠지요. 
나비가 되어 오신다는 약속 기억하며
벼랑 지나 날아오시기를
첫새벽 바다와 하늘 빙긋 열리듯 꽃이 되어 피어있겠습니다
눈물겨운 그런 아롱거림으로 오시리라 믿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