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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추모특집 - 작품연구 - 박명자 - 갈뫼의 아버지, 그 희생의 발자국을 기리며_4. 갈뫼 四十周年, 회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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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35회 작성일 15-01-1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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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도에는 『갈뫼』도 불혹의 나이가 되어 사십 주년 행사를 아남프라자 연회장에서 내빈객들을 모시고 크게 행사를 가진바 있다. 그때 윤홍렬회장님의 회고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갈뫼』 四十周年 윤 홍 렬

사십 주년…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나무도 사십년 생이라면 상당히 우람한 덩치로 자라고 우리들 생활 주변에서는 사십년의 연치를 쌓은 동물이 별로 없다. 소, 돼지, 개, 닭…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들 치고 사십년의 세월을 생존하는 동물이 없다. 모두 사십년을 못살고 세상을 뜬다. 사십 년의 세월이 무척 길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인생만이 많은 세월에 걸쳐 이승을 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세월에 걸쳐 산다 할지라도 百세 전후다. 그리고 보니 사십년의 세월이 길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百살 전후를 산다 할지라도 평탄한 생애를 누리고 가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波瀾萬丈)으로 비유될 수 있는 정도의 험한 마디를 거듭 겪어가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래서 삶의 방식이 흔들리게 된다. 시행착오(施行錯悟)가 생기고 허덕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공자도 인생이 사십세가 되면 불혹(不惑)해야 한다고 교육했던 것이다. 즉 부질없이 망설이거나 무엇에 마음이 홀려서 비뚜루 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었는데 인생의 중요한 고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0세가 말이다. 이제 우리의 『갈뫼』가 마흔 살이 됐다. 69년 10월 3일, 개천절이다. 공휴일이었다. 그 당시의 교육청 2층 강당에서 박명자씨. 강호삼씨 최명길씨 필자 등 22명이 모여 앉아 ‘문학’의 창달을 모색하고 ‘동인지’ 논의를 벌였다.강호삼씨의 창작 소설 ‘여심있는 향목’이 기폭제가 됐었던 것이다. 속초 시내의 ‘가야다방’에서 ‘여심있는 향목’을 놓고 독후감도 아니고 작품 비평도 아닌 말하자면 자유방담의 성격을 띈 이런저런 이야기가 교환됐었다. 그 모임에 참석했던 인사로는 작고한 이성선(李聖善), 최명길(崔明吉) 강호삼(姜鎬三)그리고 필자. 이런 사람들이 몇 차례 모여 앉아 객담처럼 의견을 나누었는데, 그 몇 번째인가의 모임 끝에 필자가‘동인지’를 거론했다. 참석했던 인사들이 모두 찬동을 했다. 그러나 필자는 ‘동인지’에 참여할의사는 없었다. 공자의 유훈인 지명(知命)의 경지인 48세였다. 그리고 필자스스로의 능력이 문학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재목은 아니라고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동인지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그 인원 구성 대열에서
는 빠지겠다고 하였다. 나의 의견 용납 여부는 미결인 채로 앞서 밝힌 ‘교육청 강당’모임이 이루어졌다. 이런 저런 의견이 교환된 끝에 동인지 발간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필자의 의견이 완전히 거부된 상황에서 필자가 추진 대표로 선임되었다.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 자신의 의견은 완전히 배제 된 채 회장, 단체 이름은 ‘설악문우회’
 그리고 제호 『갈뫼』가 결정 됐다. 이후 40년, 세월의 변천과 더불어 『갈뫼』도 많이 변했다. 문우회 창설 인
원이 22명이었는데 지금은 40명이다. 문우회 창설인원으로는, 박명자, 강호삼, 윤홍렬… 이렇게 세 명 뿐인데 40명이라니…증감이 무상하였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변화는 거듭되는 발전이어야 한다. 『갈뫼』가 40호를 발간하기에는 많은 인사들의 협조와 후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회원들의 열정어린 노력의 결과이기도하다. 앞으로 몇몇 40주년을 되풀이하더라도 ‘설악문우회’는 항상 젊고 신선한 문학의 산실이기를 간절히 빈다. 사람은 가더라도 『갈뫼』는 길이 전해져 한국문단의 큰 별이기를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