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4호2014년 [ 추모특집 - 작품연구 - 박명자 - 갈뫼의 아버지, 그 희생의 발자국을 기리며_2. 설악문우회 『갈뫼』 창간호 출간 ]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29회 작성일 15-01-13 15:14

본문

1969년 10월 3일 속초교육청에는 14명의 발기인 회의가 열리게 되었으며 그 모임의 이름을 ‘설악문우회’라고 지으셨으며 이듬해 4월에 『갈뫼』창간호를 탄생 시키셨다.『갈뫼』의 갈 자는 칡 갈葛의 뜻을 따왔으며 뫼자는 산이라는 옛 이름으로 칡뿌리가 산에 깊이 내리듯 속초라는 척박한 땅에 문학의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창간호 제자題字는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님께서 써주셨다. 윤홍렬 선생님은 『갈뫼』 창간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셨다.
단체이름도 동인지의 제호도 박명자씨의 제안이었다. 등 떠밀리 듯이란 말처럼 나는 할 수 없이 설악문우회 회장이 되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회장이 되었다. 그러니 나의 체면으로 보나 문우회원들의 체면으로 보나 허명무실한 문우회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무리한 질주(迭走)였다. 그러나 회원들의 열정이 모여 『갈뫼』가 나온 것이다. 모처럼의 기회에 예술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고장에서 동인지가 나온 바에는 좀 더 의미있게 ‘설악문우회’ 존재를 널리 알리자는 생각에서 『갈뫼』 발간 행사를 갖기로 했다. 나의 개인적인 연고로 조연현(趙演鉉)씨를 『갈뫼』 창간호 발간축하행사의 초청 강연 연사로 초대하였다. 지금은 없어진 중앙다방에서였는데 지하실이었다. 대성황이었다. 연사로 참여한 조연현씨가 문덕수, 성춘복씨들과 함께 왔었다. 행사 시작 전 점심과 저녁식사를 겸해 그 당시의 ‘서울’식당에서 회식을 하였는데 『갈뫼』 1호를 보더니 놀라워하던 말이 기억난다. 책을 펼쳐보더니
“등사본인 줄로 생각했는데 인쇄본이네”  하셨다. 그 말이 어찌나 기뻤던지 행사를 마친 다음에 기회 있는 대로
‘인쇄본타령’을 되풀이 하였었다.
『갈뫼』 창간호는 1970년 4월 25일 시내 문화인쇄소에서 국판 125쪽으로 창간되었다. 『갈뫼』 창간호에는 창간 회원인 김철홍, 박명자, 최명길, 이성선, 박진서, 김종영, 김영규, 김현문, 최준지 시가 실렸으며 강호삼, 박명자, 정영자, 김현문의 수필과 송병승의 평론 그리고 윤홍렬, 강호삼, 정영자, 장태근의 소설이 실렸다. 속초시 여러 기관과 독자들의 축하를 받고 가야다방에서 『갈뫼』 창간호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윤홍렬 초대 회장님의 창간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구地球는 둥글다  - 회장 윤홍렬 -


지구는 둥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발가락 끝이 이 땅덩이의 시발점인동시에 종착점이기도 하다. 더불어 한국이 세계적인 변두리도 되려니와 동시에 핵심적인 중심지대도 되는 것이다. 다만 기준점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서 변두리도 복판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 고장 속초를 흔히들 예술의 不毛지대 凍土帶라고들 한다. 지극히 관념적이고 독선적인 견해이리라 하나의 自己卑下症的인 독단이리라 우리는 음악하면 < 빈 >을 미술하면 < 빠리 >를 연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전국을 연상의 대상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음악도 미술도 그밖에 예술 어느 분야도 사과나무에서만 사과가 열리는 그런 고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예술은 인생 생활의 사치품으로
서의 장식물이 아니라 의식주만으로는 부족한 생활방편상의 필요에 의한 소산이라고 본다. 다만 동기와 조건의 이르고 늦은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삶에 있어 자기표현이 예술 이라는데 그렇다면 인생이 있는 곳에 삶이 있고 삶이 있는 곳에 예술이 있기 마련이다. 단 성실한 인생체험과 끈기 있는 노력이있을 때는 말이다. 예술이 어느 국가나 겨레의 전유물이 아닌 까닭이 여기에 있다. 또한 예술의 不毛地도 凍土帶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의 근거다. 어떠한 것이든지 그것이 싹트고 여무는 시기가 있다. 天地는 돌기 때문이다. 몇몇의 園丁 지망생이 모여 『갈뫼』를 가꿔 보기로 하였다.
노력으로 가꿔 보자는 것이다. 영원한 젊음과 생명을 상징하는 東海의 물을 길어다 뿌려 주고 名山 雪岳의 정기를 부어가며 곱게곱게 키워 보자는 것이다. 束草도 공간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지가 될 수 있듯이 『갈뫼』가 고이고이 자라나이 나라 문학의 상징적 존재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만 워낙 서투른 원예사들인지라 한국문단의 한 귀퉁이나마 착실하고 정숙하게 차지하는 존재라도 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