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4호2014년 [ 추모특집 - 故윤홍렬 고문 추모특집 - 회고담 - 이은자 - 『갈뫼』 서울 대합실 ]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33회 작성일 15-01-13 16:03

본문

사랑하는 나의 은사님께서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습니다. 이제 그리운 마음으로 지난 일들을 추억하며 이 글을 적습니다. 나는 출향인으로써 『갈뫼』 제 8집에 단편 소설 「사표」를 들고 입회했습니다. 윤 회장님은 고교 3년 간 우리들 고문古文선생님이고 학생과장이셨습니다. 윤 선생님께선 내가 서울에 살 동안, 전화나 편지 혹은 인편에,

‘누구 누구가 서울 가니 편의를 봐 주라. 동인 중에 누가 언제 어디서 문학상 받으니 꽃 들고 가서 『갈뫼』를 대신 하라. 누가 등단 축하식을 하니 가서 거들라. 함께 식사라도 대접하라. 며칠 묵어 갈 자리 마련해 주도록 하라.’ 등
등 많은 지령을 내리셨고, 나 역시 두말 않고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에 거쳐 간 동인이 여럿 있습니다. 나는 우리 집이 『갈뫼』 가족의 서울 대합실이기를 기뻐했었습니다. 내가 서울에서 미용실을 내면서 간판에 『갈뫼』를 빌어 갔습니다. 그 해 겨울 월례회 자리에서 전체 회원의 동의를 받아 그 이름을 얻어다가 정릉에서 5년,
평창동 서울예고 앞에서 15년간 ‘갈뫼 미용실’을 열어 동인지 『갈뫼』의 존재를 널리 알릴 수 있었습니다. 10년 전에 떠나온 마을인데 그 마을에 가면나는 여전히 ‘갈뫼원장’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갈뫼』제호를 빌린 대가로, 그날 저녁 회식비를 몽땅 부담했었지요. 평창동 ‘갈뫼미용실’엔 작가, 교수, 법조인과 예술가들이 주 고객이었으므로 『갈뫼』의 뜻을 물어보는 사람이 많았고 그때마다 나는 내 고향과 동인지 『갈뫼』와 그 제호의 의미를 설명하며 뽐냈습니다. 내 사업장 역시 그 마을 대합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회고 합니다. ‘갈뫼’를 욕보이는 일은 전혀 없었노라 자부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12월 하순에 치르는 『갈뫼』 출판기념식 초청강사님 모시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알다시피 7~80년대 서울과 속초는 아주 멀었습니다. 도로 형편과 교통사정이 열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강호삼 동인이 서
울 기상대로 전근 간 뒤론 물치비행장을 많이 이용해 강사님들을 모셨는데, 물치비행장은 날씨 탓에 결항이 잦았습니다. 고속버스 또한 대관령 아흔아홉 고개를 아슬아슬 굽이돌아 강릉을 거쳐 다시 속초까지 두어 시간 더 달려야 했습니다. 눈이 잦은 겨울철, 그것도 한 해 막바지에 『갈뫼』책은 완성되었고 서울 손님들은 목숨 걸고 눈길을 와 주어야 했습니다. 한 번은 대형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최명길 동인이 등단, 시집 『화접사』를 출간한 그 해 겨울
‘『갈뫼』행사’차 서울에서 이원섭, 이원수 두 분을 모시고, 나와 강호삼 넷이 길을 떠났습니다. 예정된 비행기가 기상 악화로 결항이었기 때문이지요. 일행 넷은 급히 강남고속버스에 가서, 자리를 간신히 얻어 내려오던 중 첫눈이 내리고 ‘가남휴계소’를 막 지난 지점에서 차가 전복되었습니다. 다행히 천길 벼랑에 떨어지지 않아서 살아났습니다. 그 와중에 노 스승님 두 분께선 발걸음을 되돌리지 않고 기어이 속초 행사에 참석, 문학강좌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죄송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윤 회장님의 집념으로 중앙 문단의 거장들은 거의 한 두 번씩은 모셨던 것 같습니다. 해마다 두세 분씩.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문학의 풍토에서 서울과 지방, 그것도 속초는 더 시골구석이었지요. 윤 회장님은 서울에서도 함부로 못 모시는 분들을 이 벽촌까지 모셔오고, 새내기 글 지망생 『갈뫼』의 싹들에게 햇볕을 만들어 주려고 애쓰시던 스승님이셨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갈뫼』 초창기 동인 중에 지금은 전국에 이름을 올리고 큰 재목이라 칭함까지 받는 이가 한둘이 아니지요. 지금이야 중앙문단과 지방이 큰 편차를 두지 않고, 작품이 좋으면 얼마든지 얼굴 내밀기회가 많지만, 그 시절은 아예 달랐습니다. 그 턱을 넘겨주신 은사가 바로 윤홍렬 회장님이신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오직 윤홍렬 회장님의 덕망과 후학들을 위한 애정, 열정의 결과물입니다. 선생님께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정의 빚을 진 제자가 어찌 나 한 사람 뿐이겠습니까 마는, 나는 그 중에서도 더욱 각별한 정을 받은 제자이므로 선생님 말씀이면 힘껏 이행하려 했던 것이다. 가난한 피난민 내 아버지의 힘으론 진학이 불가능 했을 때, 서울 모 대학에서 4년 전액 장학생으로 나를 입학시켰으나, 그 계약을 학교 재단 측의 일방적인 파기로 나는 중퇴 낙향했었습니다. 내가 철들어서 처음 겪는 열패감, 좌절감이 너무 커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때에도, 선생님께선 나를 불러내어 영랑호반을 함께 걸으며 당신의 젊은 시절 굴곡을 들려주시며, 인생에 대해서 문학에 대해서 또

‘포기하지 말 것과 내일은 또 있다.’등등... 2007년 ‘예총 훈춘 행사’차 길을 떠나던 날 선생님께선 ‘동춘호’ 선착
장에 몸소 나오셔서 내손에 슬며시 봉투하나 들려주시며

“가서 쓸 데가 있거들랑 써어”
 사양할 틈도 아니 주시고, 남의 이목을 살피시기에 그냥 받았습니다. 돌아와서 그 돈으로 나는 동창생들과 밥 먹으며 그날 밥값의 출처를 밝혔습니다.몸져 누우시기 전 까지만 해도, 우리의 작품 중에서 한자漢字표기가 잘못된 곳을 짚어 내시고 바로잡아 주곤 하셨지요. 지금 우리 곁엔 즉석에서 그렇게 잡아 줄 분이 안 계십니다. 의정부 ‘성 베드로’
 병실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 “선생님 제가 서울 살 적에 오셔선 안 그러셨는데, 제가 속초에 가서부터는 제 밥을 정녕코 아니 드셨어요. 그게 못내 아쉬워요.”

 선생님께선
빙그레 웃으시며 고개도 끄덕끄덕

“이담에 내가 속초 가거든 그때 꼭 먹지.”

우리는 종이에 큰 매직펜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눈길과 미소, 그리고 어루만짐으로 모든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과연 지금 나는 뒤 따라오는 후학들에게 그런 선배로 살고 있는가? 내가 죽는 날까지 그리워 할 선생님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