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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2014년 [ 추모특집 - 회고담 - 강호삼 - 강원문단의 대부 윤홍렬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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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46회 작성일 15-01-1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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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부음을, 해군함정 향로봉호에서 선생님의 제자이자 『갈뫼』동인인 김춘만 시인이 문자 메시지로 알려왔다. 함정이 독도 부근 바다에 이르렀을 때였던 것 같다. 2박 3일 예정의 협회 독도 세미나 출발 이틀 전에 선생님을 병원으로 찾아뵈었다. 주문진의 큰 따님 댁에 계시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 강남의 아드님(윤강준)이 경영하는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오래 전부터 지병으로 고생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차일피일하고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속초에서 일부러 올라온 시인 권정남 설악문우회 회장과 병원으로 달려갔다. 기관지 절제수술 직후여서 병문안이 어려웠으나 병원 측의 배려로 병실에 들어설 수있었다.
수술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경과가 매우 좋다는 간호사의이야기를 들었다. 아드님이 박사이고 주치의인 만큼 의식회복은 시간문제라고 안일하게 생각했고 예정대로 이틀 후, 독도 세미나 일정으로 동해로 가서 해군함정에 올랐다. 남쪽에는 날씨가 궂어 비가 내린다고 했으나 동해상이나 울릉도 부근은 비교적 좋은 날씨라고 했다. 일행들은 이번에야말로 숙원인 독도에 상륙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모두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러나 웬걸! 해상에 갑자기 낮은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파도가 점점높아지고 있었다. 낯선 선실의 침대와 에어컨의 쿨쿨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을 때였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는 신호음과 함께 섬광처럼 불빛이 들어왔다. 선생님의 부음 소식이었다. 바다에 구름이 모여들고 파도가 높아지면서 에어컨 소리에 숨 막혀 하던 것들이 모두 선생이 이승을 떠난다는 전조였던 것이었을까.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지고 생(生)이 있으면 사(死)가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사람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오랜 투병생활을 끝내고 훨훨 이승을 떠난 선생님의 명복을 빌면서 해군함정 선실의 좁은 침대에서 40여년 선생님과의 인연을 회상했다.1969년 겨울 강원도 속초에서 선생을 처음 만났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을 나온 선생은 이곳 속초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대부분 피난민으로 이루어진 속초는 38이북의 소도시로 명태와 오징어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형편이었다. 통일만 되면 모든 것을 훌훌 내던지고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 갈 생각들을 하고 있어서 문화적인 기반이 전혀 없었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선생님은 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틈틈이 문화적인 소외 상태에 있는 속초와 영동지역에 문화를 심기 위한 작업을 모색 중에 있었다. 드디어, 선생님은, 1970년 초 평소에 눈여겨보고 있었던 제자들을 불러모아 문학동인을 결성하였다. 속초시 교육청에서 첫 모임을 가지고 동인의 명칭을 설악문우회로, 발간될 동인지를 『갈뫼』로 정했다. 1970년 말, 첫 동인지 『갈뫼』의 창간호가 출판되었다.


강릉과 춘천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동인활동은 그 중심 역할을 맡았던 인사들이 서울로 옮겨 가면서 흐지부지되고 있던 무렵이어서 속초에서 새롭게 시작된 동인활동은 전국의 이목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조연현. 오영수. 이범선. 이원수. 이원섭. 김윤성. 황금찬 선생 등 중앙문단의 인사들이 초청되고 해가 거듭되면서 문화의 불모지 속초에 문화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속초의 동인활동이 강원문단은 물론 전국의 지방문단까지도 덩달아 자극을 받아 지방문단의 동인활동이 활발히 재개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흙 속에 묻혀있던 진주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성선. 박명자. 최명길. 이상국. 이충희. 이구재. 김종영. 김춘만. 고형렬. 제씨들이 신춘문예와 유수 문예지를 통해 속속 중앙문단에 등단하면서 마침내 이들이 중앙문단을 견인하기에 이르렀다. 말 할 것도 없이 이들 뒤
에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이 독려하고 가교 역할을 해서 중앙문단으로 나간 시인 작가들만 해도 이십여 명을 헤아린다. 강원 도내에서 아무도 하지못했던 엄청난 일을 선생님이 해낸 것이다. 독도에 상륙하기로 되어있던 함정이 파도 때문에 울릉도에도 상륙하지 못하고 되짚어 동해로 선수를 돌렸다. 일행들은 독도와 울릉도에 상륙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필자는 속으로 얼마나 다행스러워 했는지 모른다. 울릉도에 상륙해서 날씨가 나빠지면 이튿날 섬을 빠져 나올 가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일기예보는 내일 날씨를 더욱 나빠질 것으로 예보하고 있었다. 하늘이 선생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할 수 있게 해 준 것일까.


밤 늦게 동해시로 돌아와서 이튿날 아침, 속초로 왔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200여개가 넘는 화환이 복도와 식당까지 꽉 메우고 있었다. 그 중에 한국소설가협회의 백시종 이사장의 화환도 눈에 띄었다. 이사장은 일행들을 인솔해야했기 때문에 필자에게 대신 문상을 부탁했다. 영전에 재배하고 상주들과 인사했다. 선생님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속초에서 길 하나 건너 이웃해 살았기 때문에 자제분들과도 아는 사이다.속초는 시 승격 이후 처음으로 사회단체장인 예총장으로, 속초시장을 비롯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엄숙하게 영결식을 마쳤다. 강원도와 속초는 한 시대의 참 스승을 잃었지만 선생님의 빈자리를 자제분들이 대신하겠다는 답사를 들으면서 선생은 아직도 우리곁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을 실은 영구차가 영결식장을 빠져 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배웅하고 명복을 빌면서 필자도 발길을 돌려 지친 몸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2014년 10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