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4호2014년 [ 추모특집 - 추도사 - 동문성 - 홀연히 떠나신 묵경 선생님 ]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97회 작성일 15-01-13 16:21

본문

선생님!
묵경 윤홍렬 선생님!
몸이 불편해 계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 다시 한 번 뵐 수 있는 기회마저 마련하지 못하옵고 홀연히 떠나보내시다니 이 불충의 죄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다음 해인 1954년 고 서창하 교장선생님에 의해 건립된 속초고등학교에 첫 교직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남북 간에 밀고 내려오고 또 밀고 올라갔던 속초는 6·25 전쟁의 격전지였고 그야말로 잿더미였습니다. 서창하 교장선생님의 창학 이념을 받들고 속초고등 교육의 현장에서 선생님은 평생을 함께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속고1회 선배들이 3학년일 때 부임하셔서 다른 학교로 전출했던 몇 년을 제외하고 30회 졸업생들을 가르친 것까지 우리 모교에서 20여년을 재직하신 남다른 기록도 갖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일찍이 동국대학교를 다니시면서 당시 우리나라에 고전문학계 태두셨던 고 양주동 박사에게 사사하셨기 때문에 고전문학, 국문학사 강의는 명강으로 널리 소문나 있었으며 선생님께 이를 공부했던 80의 노제자들은 지금도 자리를 같이 하면 선생님의 명강의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의 재학시 3년 내내 저희들을 담임하셨고 훈육주임의 직책도 겸임하셨습니다. 우리가 졸업하던 졸업반 사은 후에서 선생님이 화장실에 감금됐던 비화는 너무나 유명했습니다. 1954년 무더운 여름날 휴업종이 나기 전에 학교와 조금 떨어진 화장실에 볼일 보러 왔었습니다. 바로 그때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습니다. 학생들이 화장실에 우르르 몰려와 화장실이란 화장실은 모두차지하고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한 그것도 다른 학생이 아닌 선생님이 담임한 A반 학생들이 였습니다. 선생님이 용무를 끝내고 나온다면 다 붙잡아 벌해야 하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그 무더운 여름 대낮에 감금을 달게 받았다는 비화는 유명한 일화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교단에서 후학들을 길러내면서도 창작활동에 심취하셨으며 동호인들과 뜻을 함께 하여 일찍 우리지역에 설악 문우회를 결성하시고회장직을 직접 맡아 하시면서 지역문화 창출에 앞장서 오셨던 사실들은 지역사회가 공인해온 사실이기도합니다. 동호인 회원지 『갈뫼』를 발간하시고 그 책자가 발행호수가 늘어갈수록 인쇄비를 제때에 충당하지 못해 애쓰던 모습이며, 관계기관에 협조를 청하러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허탈한 모습으로 발길을 옯겼던 때도 한 두번이 아니였음은 동호인들은 널리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역사회가 긍지를 느끼는 것은 선생님께 뒷날 현역에서 은퇴하시고 손을 뗀 다음에도 우리지역 문화예술인들에 의해 그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동인지 『갈뫼』는 계속 발행돼 금년에도 발행호수 44호를 기록한다는 것은 우리지역의 자랑이며 자부심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 사모님과 사이에 2남 3녀를 훌륭하게 키워 사회에 배출하셨습니다1996년 반려자인 사모님이 타계하신 후에도 간혹 제자들의 초대모임에도 참석하고 규칙적인 운동도 제자들에 권하기도 하면서 늘 스승의 자리를 지켜오셨습니다. 또 선생님께서는 속초지역에 수백 쌍의 주례를 맡으시며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운 신혼가정을 탄생케 하여 주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묵묵히 밭을 간다는 뜻으로 묵경 이라는 아호를 쓰셨으며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살아오셨습니다. 누가 인생을 전광석화라 하셨지요?


인생은 어느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지역 문단의 큰 별로 상징되는 선생님도 우리 곁을 떠나게 되는 군요. 못다 이룬 꿈일랑 아들, 딸들에게 맡기고 문화 예술분야의 소원은 문단의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모든 시름일랑 훨훨 벗어 던지시고 하늘나라에서 영면 하옵소서. 그리고 선생님의 영결식을 정중하게 준비하여 주신 예총속지부장님과 문인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4년 7월 5월
제자 동문성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