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34호2004년 『갈뫼』의 追憶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갈뫼
댓글 0건 조회 2,770회 작성일 05-03-26 13:42

본문

1970년 봄부터 갈뫼와 因緣을 맺었으니 꼬박 34
년이 흘렀다. 1970년 늦봄 詩人황금찬선생이 詩
몇 편을 건네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던 순간이
지금도 선연하다.
속초에 사는 한 知人이 詩人이 되고자 한다면서 그곳이 비록
동해안 북단 작은 漁港이지만 文學의 열기만큼은 남부럽지 않다
고 당신의 고향을 자랑했던 일이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받아든 詩들을 그 자리서 읽고 곧장 4편을 季刊『문화비평』여
름호에 싣겠다고 약속했고 詩人이 되자면 詩만 좋으면 되었지 속
태우게 하는 등단(登壇)이란 관문(關門) 따위가 문슨 소용이냐
고 했더니 詩人황금찬선생께서 내 손을 덥석잡던 감촉도 지금
생생하다 그리고 황선생은 속초에서『갈뫼』라는 문예지가 나온다
고 귀뜀해 주고 작가 윤홍렬이란 분이『갈뫼』를 창간해 속초문단
의 터를 닦고 있다는 소식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때만 해도 속초는 외진 데였다. 가난이 몸서리칠 때 文藝誌

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인지 나도 경험하고 있던
터였다. 1967년부터 준비해서 1969년 4월에『季刊문화비평』創
刊號를 낸뒤로 마음 편할 날이 거의 없었던 까닭이다. 維新體制
發動機여서 걸핏하면 오라가라하고 걸핏하면 筆禍로 몰아붙였던
터라 윤홍렬이란 분이 대단하다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휴전선 턱
밑 속초에서 문인들을 모아『갈뫼』를 내자면 그분도 査察깨나 당
할 터라는 말을 걸자 황선생께서 나를 초대해 그 먼 속초로 가느
라 자갈길에서 차멀미로 시달렸던 기억도 역력하다.
1970년 초겨울 윤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윤선생께서도 황선생
처럼 웃음이 일품이었다.
속초 文人들은 山河의 德을 입어 文學할 因緣이 있구나 싶었다.
삶 앞에 웃음을 지을 줄 알아야 노래를 부를 수 있다. 文學이란
삶 앞에 올리는 노래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하여튼 첫 만남에서
속초에 문학을 일구겠다는 윤선생의 뜻이 확고함을 믿을 수 있었
다. 有名稅을 타자면 서울이 필요하지만 진실로 문학을 하겠노라
면 오히려 서울이 거북살스럽다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友
誼을 다졌던 일이 34년이 지났어도 생생하다. 황선생 윤선생은
이제 여든이고 나는 이제 일흔이니 인생은 늙어가지만 서로 만났
던 흔적만은 인연(因緣)의 고리를 지어 염주알처럼 뀀지를 일군
다 싶다. 그래서인지 늘『갈뫼』는 여늬 문예지(文藝誌)와는 달리
내 기억들을 알알이 드러내준다.
내가 시작했던『季刊문화비평』은 6년을 버티다 여러번에 걸친
筆禍로 1974년에 강제로 폐간당하고 말았다. 그해 겨울 윤선생께
선 나에게 갈뫼를 보내줬을 때 용케도 잘 버티면서 큰 일을 하고

있구나 實感했었다. 이렇게 實感하는 까닭을 지금 젊은 文人들이
알리 없지 싶다. 維新體制를 다지려는 터라 文藝誌일지라도 査察
의 서슬이 날세운 칼이었던 그 시절에 더구나 休戰線턱 밑에서
『갈뫼』를 내느라 안해도 될 고생을 당하리라 짐작했던 그 때의
기분이 지금도 묻어난다. 요새는 돈만 있고 뜻만 있으면 誌面을
당국의 간섭 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달랐다. 설령 돈이 있어도 사찰(査察) 당국의
눈에 나거나 비위에 거슬리면 치도고니를 당하고 그만 두어야 했
었다.
아마도『갈뫼』를 둥지로 삼아 창작생활을 누리고 있는 속초의
젊은 문인들도 70년대 윤선생이 남몰래 겪었을 査察강박(强拍)
을 알아채지 못하리라 싶다. 아픔일수록 겪지 않으면 그 저림을
절실하게 모르는 법. 70년대『갈뫼』의 제작비를 마련하느라 마음
고생한 것 이상으로 윤선생게서도 매서운 査察의 눈초리를 견뎌
야 했음을 나는 以心傳心으로 알고 있다. 70년대를 거쳐 80년대
를 보내면서 해마다 한 두 번은 만나서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인연 덕으로 윤선생께서 속초의 문학을 위해 헌신한 사
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알고 고마워하고 있다. 그러나『갈뫼』를
위해 쏟는 윤선생의 勞心을 속초의 젊은 문인들이 기억해주었으
면 한다는 게다. 특히 70년대 윤선생이 겪었을 이런저런 勞心이
없었더라면 속초에서 문인들이 엄청나게 배출되지 못했을 것이
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혹시라도 저어할 문인이 속초에 있을
지 모르지만 윤선생께서 터전을 일구어 가꾸게 한『갈뫼』의 햇볕
을 쪼이지 않았다고 단언할 문인은 속초에는 없을 거란 말이다.

『갈뫼』는 속초의 문학을 있게 해준 밭이다. 속초에서 문학의
씨앗을 심어 자라게 해 주고 여물게 해준 갈뫼는 속초를 文鄕으
로 일구어준 텃밭일 것이다. 어느 다른 곳보다 속초에는 엄청 많
은 문인들이 살고 있다. 이는『갈뫼』덕이란 생각이다. 전국을
살펴보더라도『갈뫼』만큼 수명이 긴 한 지역 文藝誌은 없다. 34
년을 지속해온 文藝誌는 아마『現代文學』誌를 빼고 나면『갈
뫼』밖에 없다고 본다. 속초에서 이런 문학의 밭(갈뫼)을 개간해
서 일구어내 오늘을 누리기까지는 윤홍렬선생의 옹고집 덕이라
고 말해두고 싶다. 좋은 옹고집은 씨앗을 맺고 못된 옹고집은 옹
이만 남긴다는데, 윤선생의 좋은 옹고집 덕에 속초에서 갈뫼가
34주년을 맞게 되었고 속초는 文鄕이 된 셈이다. 이는 참으로 놀
라운 일이다.
전국에서 수 없이 문예지가 명멸해 왔다. 그래서 創刊號·續
刊號·廢刊號란 말도 생겼다. 길어야 한 3년 내다가 열기가 식
으면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간 文藝誌들이 얼마나 많은가. 10년
이면 강산도 변하는 데 한결 같이 34년 동안『갈뫼』가 속초에서
문학을 일구어내는 밭 구실을 해왔으니 속초市史의 한몫을 맡고
있는 중이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 탓인지 서
울에서 나오는 文藝誌를 중하게 여기고 고향에서 나오는 文藝誌
를 얕보려는 경향이 있는 줄 잘 알고 있다. 이런 성질머리는 조
선조 유물이지 싶다. 서울 바닥에 있는 이른바 中央誌面에 작품
이 나오면 돋보이고 地域誌面에 작품이 나오면 쑥스럽다고 여기
는 문인이 있다면 그런 문인은 문학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유명해

지려는 욕심 탓이라 해도 욕될 게 없다. 문학을 자신 있게 터 나
가는 문인이라면 誌面따위를 차별할 리 없고 오히려 故鄕의 텃
밭 誌面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안다. 속초의 문인들은 이런 이치
를 갈뫼를 통해서 터득했으리라 믿고 싶다. 두손이 맞아야 손뼉
을 친다. 아무리 윤선생이 혼자 갈뫼를 위해 땀흘린다 해도 속초
文友들이 얼싸안지 않아 준다면『갈뫼』가 34주년을 맞이하기 어
려웠을 터이다. 속초의 문인들이 윤선생을 중심으로 서로 友誼을
다지면서 문학의 텃발인 갈뫼를 울력해 온 덕으로 휴전선 턱밑에
위치한 束草를 文鄕으로 어우러지게 할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갈뫼가 앞으로 줄곧 연륜(年輪)을 더해가리라. 몇 년 전 윤선
생을 만나 자리에서 이제 年老해져 가는 데『갈뫼』를 뒷받침하기
가 얼마나 힘드냐고 위안을 드렸더니 은근 슬쩍『갈뫼』의 뒷돈을
보태주는 아들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대를 이
어 충성한다더니『갈뫼』에도 해당되는구나 싶어져 속으로 미소지
었던 일이 있었다. 윤선생의 자제 분이『갈뫼』의 제작비를 감당해
준다니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父子의 情이 통하
지 않고서는 이런 美德이 맺어질 리 없음을 世波를 헤쳐본 사람
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문학이 없는 황무지에『갈뫼』를 일구어
땀흘려 개간하고 터를 넓혀온 아버지의 뜻을 아들이 절실히 안았
기에 그런 미더운 일이 실현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비화(秘
話)를 속초시 당국에서도 알고 있었으면 한다. 관광도시가 문향
(文香)일수록 그 品位가 드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런 역할을 갈뫼
가 묵묵히 해왔으니 속초시는 톡톡히 신세를 지고 있는 편이다.
『갈뫼』가 거두어 온 노래(文學)들이 속초에 아름다운 山河로 눈
여기게 生氣를 전국에 펼쳐왔기 때문이다
詩人朴明子女史덕으로 <갈뫼의 追憶>을『갈뫼』의 誌面에다
싣게 되었다. 朴女史는 속초문학에 대한 윤홍렬선생의 愛情을 누
구보다도 잘 이해하고『갈뫼』에 받친 윤선생의 헌신을 진솔하게
존경해 마지않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詩人이다. 정성어린 마음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시샘하기 좋아하는 세태(世態)와는
달리 속초문학을 위해 평생을 勞心한 윤선생을 지극히 대하는 朴
明子詩人이『갈뫼』를 돌보고 있다니 윤선생과 더불어 덩달아 나
또한 무척 반가웠다. 文藝誌와 맺혀진 사연들이 많은 까닭이다.
자기만 생각하는 문인은 문예지를 이용할 줄은 알아도 키울 줄은
모른다는 것도 뼈저리게 경험해본 탓에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한
평생 한 고장에서 문학의 밭을 일구어 가꾸고자 勞心焦思한 윤홍
렬선생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게 되었다. 그러
나 누군가는 해두어야 할 터라 거리낌없이『갈뫼』의 誌面속에다
내가 34년 동안 줄곧 인연을 맺어온 <갈뫼의 追憶>을 담아두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준 詩人朴明子女史께 고맙고 특히
여든살(80) 고비의 인생을 보내면서『갈뫼』를 하염없이 바라볼
윤홍렬선생의 얼굴이 내 앞에 생생히 떠올라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