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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동화 - 청대산의 소나무 / 이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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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58회 작성일 16-02-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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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희 갑]


우리나라 도시에서 속초만큼
아픔을 딛고 일어선 도시가 있을까.
한국전쟁이란 기막힌 운명에 태어난 도시
수복된 땅에 터 닦느라 힘들었고
열악한 어업으로 수많은 아버지들을 바다에 수장시켰고
남한에서 오지라고 뒤로 내쳐짐 당했던 도시.
그러나 속초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보다 강하다.
끈질긴 삶의 진수를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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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의 줄거리>


연휴를 맞은 선유는 아버지를 따라 청대산으로 간다. 지난봄 청대산에 큰 불이났을 때 매우 안타까워했던 아빠다. 아빠 고향이나 다름없는 청대산을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 선유는 아빠로 부터 청대산과 함께 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거기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중학교 시절과 가뭄으로 모내기를 할 수 없는 농촌에 물 찾기 봉사활동이야기가 있다. 당시엔 국가적으로 학생과 공무원이 물 찾기 봉사활동에 많이 동원됐다. 봉사활동이 끝나면 아이들은 늘 눈앞에 우뚝 선 청대산으로 향하곤 했다. 청대산에는 칡이 많았다. 굶주림으로 살아야 했던 시절 칡도하나의 먹을거리로 중요했던 시기였다. 선유 아빠인 민호는 특히 친했던 네 친구들과 함께 했다. 다섯 친구들은 청대산 산속에서 가재도 잡고 칡도 파면서 끝내는 청대산 정상의 소나무 아래까지 가서 놀곤 했다. 청대산 정상에는 처음에 소나무 일곱 그루가 있었다. 산 아래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수사슴의 늠름한 뿔처럼 보이는 소나무들이다. 그래서 청대산의 소나무는 청대산 아래 사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늘 하나의 표상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면서 청대산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모양으로든 청대산소나무가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민호는 친구들과 파온 칡을 먹으며 청대산소나무 아래에서 나른한 낮잠을 즐긴다.
봉사활동과 칡 파느라 지칠대로 지친 몸은 이내 솔솔 풍기는 소나무향이 수면제나 되는 양 소르르 꿀맛 같은 낮잠에 빠지기도 한다. 자리에 누운 아이들은 얼굴위로 거대하게 뻗은 소나무를 바라보기도 하고 바람결에 우웅 하고 울음소리를 내는 소나무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을 떠올리기도 했다. 청대산 소나무의 잎에서는 파도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는 점점 꿈나라로 아이들을 인도했다. 아이들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서 청대산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시 한 번 만나게 된다.
민호아빠는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때 청대산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청대산 마을은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에 속했지만 한국이 수복한 상태였다.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터라 휴전선 근방에서는 전투가 계속 중이었다. 청대산에 오르면 땅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한국군과 북한군의 치열한 전투의 광경이멀리 어렴풋이 보이곤 했다. 민호아빠는 국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민호는 아버지가 전쟁터에 간 동안 아직도 전쟁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은 수복된 땅 청대산 동네에서 아빠를 기다리며 전쟁의 분위기 속에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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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거대한 함성이 들리는 언덕


쏴아아
한바탕 바람이 소나무 바늘잎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눈을 감고 있던 현수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현수는 머리를 이리저리 휘돌리면서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현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하지만 잠시 뒤 현수는 큰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먹구름만큼이나 어두운 얼굴빛이 현수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현수는 다시 누웠다. 어떤 친구는 벌써 코를 씩씩 골고 있었다. 현수는 찔끔 눈을 감았다. 꼭 감은 두 눈 사이를 비집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냈다. 친구들과 신나게 놀 때 물러갔던 생각들이 다시 현수를 조여 왔다.
“우리 현수 저렇게 말을 더듬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 되갔어?”
현수 아빠는 자고 있는 현수를 흘낏 쳐다보고 두꺼운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현수 아빠, 오늘은 좀 쉬겠다고 선장에게 말해보세요.”
현수 엄마는 현수 아빠의 뒤에서 따라오며 말했다.
“안 돼, 명태 배는 팀이 딱 맞아야 혀. 나 하나 안나가면 우리 배는 오늘 출항 못하는 거여.”
“그러니까 선장에게 말해서 오늘만 배 쉬자고 해 봐요.”
현수 엄마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며 아빠를 설득했다. 잠을 자던 현수가 눈을 비비며 부스스 눈을 떴다. 하지만 전등불에 눈이 부셔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저진 앞바다에 명태가 무진장 잡힌다잖아. 명태가 우릴 순순히 기다려줄깐데? 고놈들 도망가기 전에 우리가 확 낚아채야제.”
현수 아빠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펴서 몇 번 흔들더니 문을 열고 나섰다. 밖은 어둠으로 꽉찼다.
“현수 아빠-”
현수 엄마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걱정이 되었다. 현수 아빠는 며칠 째 심한 몸살감기이다. 현수 아빠는 현수가 말을 더듬는 것이 혓바닥에 잘못이 있거나 어쩌면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애매한 소견을 받고 이번 겨울 명태 벌이가 좋으면 도회지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가 확실한 원인을 알고 치료를 할 계획이었다.
현수의 두 귀는 아빠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아빠의 걸음과 함께 골목길을 따라 나섰다.
아침이 조금 지나자 아이들이 불렀다. 현수는 얼른 썰매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중학생이 되었으면 다른 걸 해야지 아직도 애들처럼 썰매냐?”
엄마의 목소리가 따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현수는 서둘러 밖으로 튀어나왔다. 민호, 태영이, 형근이가 현수네 집 앞에 서 있었다.
“저 저 정 정훈이는”
현수가 또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정훈이 형이 서울에서 왔어. 그래서 오늘 못 온대.”
형근이가 말했다. 정훈이는 오늘 현수에게 썰매를 지칠 때 쓸 새 송곳 꼬챙이를 주기로 약속했었다.
아이들은 동네에서 제법 떨어진 작은 호수로 갔다. 논에서 썰매 타는 것보다 훨씬 넓어 재밌는 곳이다.
새해가 지난 지 하루가 되어서 그런지 썰매 터에 색동 한복을 입고 나온 여자아이들도 보였다. 겨울 날씨지만 점심때로 갈수록 따스해졌다. 얼음판이 녹기 시작했다.
“이제 배도 출출한데 집에 갈까?”
태영이가 바지가 다 젖은 채로 말했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합창을 했다.
“집에 가자.”
아이들이 고개 하나를 넘었다. 근데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벌어졌다.
언덕 꼭대기마다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한두 군데가 아니다. 동네크고 작은 언덕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우아아 어후!”
언덕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언덕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는 소리였다. 아이들은 탁 걸음을 멈췄다. 뭔가 이상하다. 기분이 안 좋았다.
이런 함성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그 소리는 절망이 섞인 탄식 소리였다. 아이들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우아아. 어후 어 - 어 -”
사람들의 함성은 계속되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쨍하고 그릇이 깨지는 현상을 현수는 느꼈다.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왜냐하면 언덕 위에 선 사람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동쪽,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현수가 갑자기 달려 나갔다. 아이들이 갑자기 튀어나가는 현수를 보고놀라 한참 어리벙벙 쳐다보고 있었다.
“현수야, 현수야.”
아이들이 불렀지만 현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현수의 모습이었다.
현수는 달려가던 가장 가까운 언덕길로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턱에 걸려 헉헉 소리가 났다. 현수가 언덕에 올라 가장 먼저 바라 본 것은 바다였다.
“헉!”
현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여태껏 자기가 바라본 바다와는 전혀 다른 바다가 출렁거렸다. 바다 위에는 짙은 구름이 내려앉았다. 바닷물이 요동을 쳤다. 마치 끓어오르는 물 같았다. 아니면 거대한 괴물이 바다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바다 위에는 괴물의 혓바닥 같은 허연 너울로 가득했다. 하지만 현수의 눈을 믿을 수 없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그 바다 위에 작은 배들이 떠 있다는 사실이다. 마구 날뛰는 파도 자락에 작은 배들은 이리저리 뒤뚱거리고 있었다. 배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파도의 골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가 파도의 등을 타고 다시 솟아오르고 있었다.
현수는 새벽에 명태잡이 나간 배들인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언덕 위에서 사람들은 고기잡이배가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것 같으면 어 어 어 우아우아 함성을 지르고, 위험을 피해 다시 배가 반듯하게 서면 어휴어휴 하고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
현수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대체 ”
아이들이 어느새 따라와 현수 옆에 섰다. 아이들은 현수를 쳐다보지 않았다. 아이들의 눈은 방금이라도 배들을 다 뒤집어 놓고 말겠다고 미쳐 날뛰는 바다 위에 꽂혀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아이들 옆에 선 어느 할머니가 가슴을 치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청대산 마을 앞바다에는 방금 명태를 잡고 돌아오는 배들이 줄을 이어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악마로 돌변한 바다는 배들을 당장이라도 뒤집어 놓으려는 듯 날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온 세상이 들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 어 아이구”
“저걸 어떡해.”
청대산 언덕배기 위에 올라선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터져 나온 탄식이었다. 바로 명태 배 한 척이 기어코 바다 위에서 뒤집혔기 때문이다. 어부들이 배에서 튕겨 나갔다. 바다에 떨어진 사람들은 잠시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머리가 나왔다. 그 어부들은 이내 헤엄을 치거나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곧 다른 파도가 덮쳤다. 방금까지 까만 점으로 물 위에 떠 있던 어부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배에 실었던 물건들이 쏟아져 배 주변 바다에 흩어져 떠돌았다. 언덕에서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은 저마다 외마디소리와 비명을 질렀다.
“아 아 어떡해.”
언덕 위 사람들 중에 흐느끼는 사람도 많았다.
“얼른 저 사람들 구해요.”
어떤 사람은 마구 소리를 질렀다. 언덕 위에 올라선 사람들마다 소리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사람들이 내지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거대한 함성이 되어 청대산 마을 전체를 울렸다. 거대한 함성은 청대산소나무 위를 넘어 하늘로 퍼져나갔다. 방금까지 물 위에 떠 있던 어부들이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참혹한 광경은 청대산 마을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거리 때문에 떨어져 있던 언덕 위의 함성들이 시간을 두고 아이들 귀로 속속 들려왔다. 그 소리는 너무도 끔찍한 소리로 변했고 소름 끼치는 소리로 몸을 휘감았다.
현수는 어쩔 줄 몰랐다. 방금 뒤집힌 배는 멀리서 봐서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분명 아빠가 탄 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상황이 끝난 건 아니다. 다른 배들도 다 위급한 상황이다. 바다 위에는 아직 예닐곱 척의 배가 항구로 머리를 향하고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중에 현수 아빠 배가 없으란 법이 없다. 현수는 숨이 턱 막혔다.
‘아버지’
현수는 발을 동동 구르다 다시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아이들이 또 한 번 깜짝 놀라 현수를 따라 갔다.
“현수야, 현수야, 어딜 가.”
현수는 이번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보다 더 빠르게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온 현수는 바다와 가장 가까운 언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도저히 현수를 따라갈 수 없었다. 현수가 저렇게 빠를 줄이야.
현수는 바다가 바로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달려 올라갔다.
막 언덕 위로 올라서는 순간 언덕 위에서 다시 한 번 엄청난 함성이 터졌다.
“아이고, 어떡해.”
또 한 척의 명태 배가 방금 사람들이 빤히 바라보는 데서 뒤집혔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언덕 위를 휘저어 나가는 듯 했다. 사람들을 거의 미친 듯이 울부짖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 사람이 죽어 간다. 구할 수가 없다. 빤히 보고도 사람 죽는 걸 구할 수 없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인가. 언덕에 서 있는 청대산 사람들을 제 정신이 아니게 바다는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언덕을 흔들고 현수의 작은 몸도 흔들었다. 현수는 바다에서 날아오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를 맡았다. 숨이 콱 막혔다.
뒤집힌 배에서 어부 두 사람이 바다로 헤엄치고 있었다. 젊은 사람 셋이 달려 내려갔다. 파도가 부딪치는 바위까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헤엄쳐 오는 어부들을 향해 튜브를 던졌다. 하지만 튜브는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들은 잠시 어떡해야 할지 몰라 그냥 서 있었다.
그러다가 서로 몸을 엮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바위 아래까지 헤엄치던 어부 한 사람이 젊은이의 손을 붙잡았다.
“와, 살았다.”
거대한 함성이 다시 언덕 위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했다.
파도가 바위를 덮쳤다. 젊은이 세 명과 방금 구조된 어부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들은 파도 물을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바위 틈새로 밀려갔다.
파도 물이 스며들자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네 명 모두 살아있었다.
와아 와아 ~
언덕에서 거대한 함성이 뒤따랐다.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금방 뒤따라오던 어부 한 사람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우어어 우~
언덕 위는 다시 거대한 탄식소리로 진동했다. 아이들은 너무나 참혹한 광경에 몸을 떨었다. 태영이가 먼저 훌쩍거렸다. 그러자 민호와 형근이도 따라 훌쩍거렸다.
“어, 현수가 사라졌어.”
아이들은 어부가 구조되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현수가 사라지는 걸 놓치고 말았다. 아이들은 현수를 불렀다. 현수야. 현수야 하고 아무리 불러도 현수한테서 대답이 없었다. 하긴 아이들이 현수를 부르는 소리는 지금언덕 위 사람들 함성에 비하면 모기소리보다 더 작았다. 그러니 현수가 거기 있어도 들었을 리 없다. 아이들은 기어코 현수를 놓치고 말았다.



11. 돌아온 아버지의 배


현수는 바닷가 언덕에서 내려와 부둣가로 달렸다. 이미 부둣가로 가는 길은 사람들로 완전 메워졌다. 응급차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부둣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경찰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사람들 소리에 묻혀 있으나마나 한 상황이었다. 현수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어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현수의 입 속에서는 아버지 소리가 끝없이 맴돌고 있었다.
겨우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나간 현수가 부둣가에 도착할 때 마침 명태배 한 척이 항구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배가 닿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곳곳에서 아우성 소리가 들렸다. ‘홍진호’ 배 이름이 젤 먼저 현수의 눈에 들어왔다. 아빠 배는 아니다. 현수는 왠지 한숨이 나왔다. 저 배는 무사히 들어왔지만 아빠 배는 어디쯤 있을까.
홍진호 선원들이 내리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홍진호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부두에 정박하여 잔물결에 흔들거렸다. 그러나 박수치며 환호하는 소리 사이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가족들이 맘 졸이고 있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이나 아빠, 혹은 남편을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풍호’는 어디 있는가. 현수는 아빠의 배 이름을 중얼거렸다.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저기 봐, 배 한 척이 또 들어온다.”
사람들 틈에서 남자 어른의 억센 소리가 들려왔다. 앞바다에서 항구로 들어오는 구부러진 바닷길 때문에 배가 보이질 않자 사람들이 우르르 부두 위편으로 몰려갔다. 잠시 후, 와- 하는 소리가 들리다 박수소리가 우렁차게 부두를 흔들었다. 그 배도 무사히 들어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풍호, 대풍호, 현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빠가 탄 배가 부두로 들어오길 바랐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몰랐다. 현수는 자기 눈에 눈물이 괸 것도 몰랐다. 괴물이 된 앞바다를 무사히 통과한 명태잡이 배들이 그 시간 속에서 점점 늘어났다. 부두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현수의 흐릿한 눈에 마치 꿈의 환상처럼 움직였다.
현수는 썰매 타다 젖은 발이 점점 시려왔지만 그걸 느끼지 못했다. 기다리던 대풍호는 아직도 항구로 들어오지 않았다. 현수는 아까 바닷가 언덕의 광경을 다시 한 번 떠 올렸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데 왜 자꾸 머릿속에서 맴도는지 짜증이 났다.
“배가 또 한 척 들어온다.”
누가 지른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다시 술렁거렸다.
“대풍호다”
현수는 분명히 아빠 배 이름을 들었다. 그러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태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을 거면 지금도 아니라는 생각이 앞섰다.
“대풍호다 대풍호.”
사람들의 소리가 웅웅 들려왔다. 현수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현수의 머릿속에는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는 생각이 현수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배가 부두에 정박했다. 사람들이 배 앞으로 몰려들었다. 배는 모진 풍랑을 뚫고 온 흔적을 여기저기 남기고 있었다. 배 선미에 또렷이 보여야할 배 이름이 해초 더미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배 위에 쌓아 둔 어구들은 모두 배 한쪽으로 쏠려있거나 파손된 모습이었다. 선장 아저씨의 몸은 아직도 배 뒤 키에 묶여 있는 상태다.
현수는 선장을 쳐다보았다. 김 씨 아저씨다. 김 선장. 대풍호 선주이자 선장이다. 분명 대풍호가 맞다. 현수의 머리를 누가 탁 치는 것 같았다.
현수는 정신이 번쩍 났다. 아, 대풍호. 아빠 배. 현수는 탄성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현수는 배 앞으로 달려갔다. 그 때였다. 현수 앞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한 아주머니가 배 앞에서 선장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아주머니는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선장을 향해 마구 흔들고 있었다.
현수는 깜짝 놀랐다. 엄마였다. 엄마다. 엄마가 왜.
“현수 아버지, 현수 아버지.“
엄마의 목소리는 이미 엄마 목소리가 아니었다. 반 미친 사람처럼 엄마는 이상하게 변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어어 엄마!”
현수가 엄마에게 달려갔으나 엄마는 이미 흐물흐물 무너지고 있었다.
“어어어어어 엄마!”
너무나 놀란 현수는 말더듬이가 심해져 엄마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엄마는 현수가 붙잡기도 전에 배와 부두 사이에서 푹 쓰러졌다.
사람들의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엄마에게 달려오는 사람. 아직도 대풍호 배 위에서 우두커니 아래로 내려다 보고 있는 김 선장 아저씨를 보고 뭐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로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어어어어어…”
현수는 엄마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엄마를 붙잡았다. 현수는 엄마의 머리를 팔로 안았다. 하얗게 질려버린 채 눈을 감은 엄마의 얼굴이 들려졌다.
“빨리 응급차, 응급차.”
사람들이 마구 소리치자 현수는 왕~ 하고 울었다.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분수가 터지듯 현수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현수가 울면서 배 위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김 선장이 정신 나간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임씨 아저씨. 최씨 아저씨, 수훈이 삼촌, 용애 할아버지가 선장과 같이 멍하니 엄마와 현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 한명, 아빠의 얼굴은 거기에 없었다.
“장 씨는 어딨소?”
사람들이 물었다. 하지만 대풍호 선원들은 한결같이 얼이 빠진 사람처럼 우뚝 서 있을 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현수는 그 때 그 시간이 자기 생애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고 후에 두고두고 말하곤 했다.
경찰이 왔다.
“대풍호 선원들 내려, 하선 해”
경찰이 몇 번인가 날카로운 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얼음처럼 굳어 있던 선원들이 움직였다. 선원들은 배에 내렸고 경찰들이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대풍호 선원들은 사람들 사이로 빠져 나가면서도 현수와 엄마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들 틈에 사라지는 대풍호 선원들은 전에 본 아저씨들이 아니었다. 전혀 다르게 변한 사람 같았다. 특히 김 선장과 수훈이 삼촌은 연실 눈물을 닦느라 제대로 걷지 못했다.
잠시 후 응급차가 왔다. 엄마가 응급차에 실렸다. 응급차 직원들이 현수가 아들인 줄 모르고 엄마만 태우고 떠났다.
“삐오 삐오 삐오~~”
현수는 응급차가 엄마마저 데리고 가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12. 가장 긴 하루


현수의 메말라버린 목구멍에선 거위 울음소리만 나왔다. 이 상황이 대체 무엇인가. 현수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직도 부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이야기가 현수의 귀에 쏙 들어왔다.
“장 씨가 들어오다가 뱃전에서 떨어졌대”
“저런, 왜 장 씨만 떨어졌어.”
“선장이 키를 잡다 놓쳤다나 뭐나.”
요동치는 바다를 만나 대풍호는 사방에서 일어나는 파도를 정면에서 맞아야 했다. 자칫 파도가 배 옆을 치면 그 순간 배는 뒤집어지고 만다. 배를 운전하는 선장은 배 선미를 파도에 맞추기 위해선 키를 수없이 정면 방향으로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파도의 힘에 키를 잡은 선장은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결국 생명줄 같은 키를 놓치고 만다. 그러면 배는 끝장이 나고 만다. 파도는 그때를 기다렸다 배를 뒤집어 놓고 만다. 대풍호가 바로 그랬다. 김 선장이 키를 놓치고 배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키를 잡아. 키를 잡아.”
파도에 쓸려 갑판으로 쓰러진 김 선장이 뒹굴면서 소리쳤다. 그때 현수아빠가 달려들어 키를 잡았다. 겨우 배가 뒤집혀지는 걸 면하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달려드는 파도를 선장이 아닌 현수아빠가 감당할 수 없다. 현수 아빠는 선장을 일으켰다.
“장 씨, 날 키에 묶어 줘.”
현수 아빠는 밧줄을 가져와 선장을 키에 묶으려 했다. 요동치는 배 위에서 현수 아빠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선장을 겨우 묶었다.
이제 항구 입구에 있는 방파제만 돌면 안전하다. 방파제는 바로 앞에 있었다. 그때 거대한 파도 하나가 다가왔다. 너무나 빨랐다.
“들어 가!”
김 선장이 소리쳤다. 선원들은 선실로 들어가라는 선장의 강력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현수아빠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선장을 막 묶고 돌아설때였기 때문이다. 파도가 거칠게 대풍호를 덮쳤다. 김 선장은 키에 묶여있는 상태로 내리치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배를 몰았다. 거친 파도가 대풍호를 핥으며 지나갔다. 어구들이 제멋대로 휩쓸리고 여기저기에서 부러지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대풍호는 멀쩡했다. 뒤집어지지 않았다. 김 선장이 정확하게 배를 앞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배는 방파제를 돌았다. 미친듯이 날뛰던 파도는 거기까진 따라오지 못했다. 대풍호는 이제 악마의 소굴에서 벗어났다.
“아~”
김 선장이 소리를 쳤다. 이제 살았다고, 이제 안심이라고 지른 소리가 아니었다. 선실에서 선원들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모두 알아챘다. 현수아빠 장 씨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현수아빠는 그 몹쓸 파도와 함께 바다에 떨어진 것이다.
김 선장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장 씨, 장 씨”
김 선장은 하염없이 바다를 향해 현수 아빠를 불렀다. 선원들도 이미 모습조차 사라진 현수 아빠를 목 놓아 불렀다.
“배를 멈춰라, 멈춰라.”
김 선장의 절규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기관장 용애 할아버지는 발동을끌 수 없었다. 아무리 항구 입구에 배가 들어와도 파도가 밀고 들어온 물길이 거세게 떠밀고 가는데 발동을 끄면 배가 방향을 잃고 만다. 그렇게 되면 위험을 넘긴 모든 수고가 다 허사가 된다,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다.
대풍호는 선원들의 울부짖음을 그대로 안고 서서히 부두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대풍호를 마지막으로 명태 배의 귀항은 더 이상 없었다. 해양경비정이 출동하여 항구로 들어가는 배를 막았기 때문이다. 항구로 들어오지 못한 배들은 꼬박 하루를 앞바다 작은 섬, 조도 뒤 바다에서 머물렀다. 수십 척의 배들이 괴물파도가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 배들은 모두 안전했다. 명태잡이 배들은 조도 섬 북쪽에서 항구로 들어가면 거리가 짧아 평상시에는 그쪽으로 많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폭풍이나 파도가 거셀 때는 조도 섬 북쪽 편 바다는 숨어 있던 하얀 파도가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 곳은 무수한 암초가 있다는 사실을 파도가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어부들은 그런 걸 알았어도 보통 때도 별 탈 없이 잘 다니던 뱃길이었기에 설마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이제껏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괴물파도를 만난 것이다. 암초 바다는 명태를 잡아 가족과 단란하게 살 꿈을 꾸며 들어오는 어부들의 배를 사정없이 뒤집어버리는 참극을 벌리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 되어서 현수 엄마가 집에 왔다. 동네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온 현수 엄마는 완전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울다가 중얼거리다가 거리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현수 엄마를 지켰다.
현수는 불이 꺼진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현수네 집은 여태껏 상상도 하지 못한 암흑의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청대산 앞바다에서 해난사고가 난 날은 새해 다음날인 1월 2일이었다.
그날 새벽 2시에 청대산 마을 명태잡이 배들이 출항을 했다. 240여 척이었다. 아침 해가 뜰 무렵부터 명태 어장인 저진 바다에 너울 파도가 일기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분다는 증거였다. 하늘에도 점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명태는 엄청나게 걸렸다. 당기는 낚싯줄 마다 명태가 주렁주렁 매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이거 날씨가 심상치 않은데.”
오랜 어부 생활이 몸에 밴 김 선장이 말했다. 하지만 자꾸 걸려 올라오는 명태를 도중에 버리고 갈 순 없었다. 대풍호는 어장을 예상 시간 보다 조금 늦게 떠났다. 배는 만선이었다. 배 통마다 명태가 가득 들어찼다. 청대산 앞바다로 가까이 오면서 날씨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겨울 날씨 답지않게 포근하던 날씨가 사납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청대산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로 뼈가 굵은 선원들까지도 예상 못한 돌풍이 바다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명태잡이 배들이 만선의 기쁨을 안고 들어오는 길목에 그 기쁨을 낚아채려는 사나운 파도가 바로 청대산 앞바다에서 지키고 있었다. 명태 배 선장들은 날씨가 더 나빠지기 전에 최소한 빨리 항구로 입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대산 앞바다의 암초바위 위에는 악마의 파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청대산 앞바다의 해난 사고로 5척의 배가 사고를 당하고 24명의 어부가 죽거나 실종되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실종자를 찾았으나 겨우 3명의 시신을 찾는데 그쳤다. 엄청난 사건은 전국으로 알려졌다. 서울의 일간지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수산 도시 청대산 마을의 비극.
청대산 마을이 생긴 이래 최대의 해난 사고.
우우웅
청대산의 소나무에서 소리가 났다. 현수가 눈을 떴다. 현수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날의 참혹함은 어제 일 같이 아직 생생하다. 현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아직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현수는 청대산소나무 한 그루를 껴안았다.
우우우웅, 쏴아
청대산소나무는 현수의 불행을 다 보았고 같이 가슴 아파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13.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청대산 마을


청대산 마을을 향하던 버스가 미시령 아래에 도착했다. 엄마는 미시령을 넘기 전에 꼭 멀미약을 먹어야 한다고 야단이다. 선유와 아빠는 서로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엄마의 수법이 뻔하다. 아빠는 가방에서 멀미약을 꺼냈다. 멀미약은 냉장 상자에 들어있는 캔맥주 하나. 아빠에게로 부터 멀미약을 받은 엄마는 쌩긋 웃으며 이번에는 턱으로 선유에게 신호를 보냈다. 선유는 자기 가방에서 봉지 하나를 꺼내 부스럭 거렸다. 구운 오징어 한 마리였다.
“엄마, 보조 멀미약.”
엄마는 선유에게 윙크를 보냈다. 선유와 아빠는 낄낄대며 웃었다.
“아빠, 그래서 현수 아빠는 끝내.”
선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빠가 슬픈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현수는 그 후로 중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어. 아빠 없이 엄마와 살아가기가 힘들었지. 그래서 일찍이 직장을 얻었어. 현수 아빠 친구가 운영하는 건어물 상회에 나갔지.”
“현수 아저씨는 결국 말 더듬을 완전히 고치지 못했네요.”
선유는 조심해서 말했다.
“그렇지. 사실 말을 더듬는 건 성격이 급하거나 생활 중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해. 현수는 나중에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극복했지.
상회도 잘 다니고.”
버스는 슬슬 미시령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엄마는 혼자서도 멀미를 잘 극복하고 있었다.
“현수는 다니던 상회 주인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갔어. 아빠보다도 먼저 서울에 입성했지. 내가 서울로 대학을 왔을 때 서울 선임자라고 얼마나 유세를 떨든지.”
아빠는 허허 웃음으로 말을 마쳤다. 그러나 아빠 얼굴 위의 어두움은 그대로 있었다.
“그래도 현수의 아픈 고통은 쉽게 가시지 않았지.”
아빠는 다시 청대산소나무 아래에서 나무들의 소리를 들은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선유도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미시령으로 가는 길 밖으로는 가파른 절벽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여름이 시작되는 골짜기에는 이미 온 세상이 초록의 물결로 가득 덮여 있었다.
태영이는 청대산소나무 한 그루 앞에 선 현수를 보았다. 현수의 슬픔은 언제까지 변함이 없는 것일까. 해난 사고는 일 년을 넘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현수의 성격은 안으로만 들어가는 것 같았다. 칡을 파는 일에도 현수만이 특별히 고달팠던 이유는 뭘까. 태영이는 현수의 옆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태영이는 다시 누웠다. 태영이는 현수의 슬픈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태영이는 기쁜 일, 좋은 일만 생각하고 싶었다.
우우우웅
태영이가 베고 누운 청대산소나무에서 울림이 왔다. 태영이는 그 울림 속에 무엇인가 있는 걸 느꼈다. 태영이가 눈을 감았다.
청대산 마을이 축제 분위기에 들끓었다.
“따르르릉~”
아침부터 태영이네 집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태영이 아버지는 식사를 하다말고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느라 분주했다.
“여보, 식사는 하고 가셔야지요.”
태영이 엄마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태영이 아버지는 벌써 거실 문을 열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식사가 문제가 아니오. 우리 청대산마을의 운명이 걸린 문제요.”
태영이 아버지는 어느새 집 밖으로 사라졌다. 태영이와 태영이 엄마도 식사를 하다 말고 숟가락을 놓았다. 매일 저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밖에서 세월을 보내는 태영이 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웠다.
태영이 아버지는 청대산 마을이 시가 되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대산 마을에서 태어나고 청대산 마을에서 평생 살아온 태영이 아버지의 일은 쉽지 않았다. 청대산이 시가 되려면 시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들어줄 유력 인사들과 교류가 많아야 하는데 태영이 아버지는 그런 것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태영이 아버지는 청대산 마을이 시가 되어야 온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지금 보다는 나아지고 여러 가지 지역적 문제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태영이 아버지는 ‘청대산 마을 시 승격 추진위원’이 되어 지금까지 열심히 뛰며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대산 마을이 왜 시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줄 힘 있는 인사를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아침 전화로 흘러온 것이다. 바로 며칠 전 청대산 앞 바다 해난 사고 때문에 정부에서 아주 고위 정치인 한 사람이 내려와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침의 전화는 태영이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추진위원 중 한 사람이 건 전
화였다.
“이번에 내려오신 분은 대통령과도 직접 만나 이야기 할 정도로 힘이있는 분입니다. 박 선생, 그 분을 꼭 만납시다.”
청대산 마을의 엄청난 해난 사고 소식은 정부와 국회까지 관심을 가진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라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내려와 참변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하고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의논하려고 왔다. 태영이 아버지는 이제껏 정부의 유력한 인사를 만나러 수없이 서울에 갔지만 번번이 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내려오곤 했다. 그래서 오늘 소식은 청대산 마을 시 승격 위원들을 모두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이번에 온 사람이 청대산 마을의 숙원 사업인 시 승격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 태영이 아버지는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해난 사고는 청대산 마을에 엄청난 슬픔을 가져온 불행한 일이지만 이 일로 인해 청대산 마을이 시 승격에 희망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추진 위원들과 뜻있는 청대산 마을 사람들은 생각했다.
“우리 마을 죽어라는 법은 없지”
기어코 태영이 아버지와 추진위원들은 청대산 마을에 내려온 정치가를 만났다. 그리고 강력하게 청대산 마을의 시 승격을 건의했다.
이렇게 해난 사고가 나도 대책이나 보상 등에서 속수무책인 것은 청대산 마을이 수복된 땅에 시가 되지 못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젠 인구도 시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고 일부 수산물은 전국 최고의 어획량을 올리고 있다. 또 금강산 못지않은 설악산이 있어 관광 도시로서의 발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등등…. 그러나 시가 되지 못하면 청대산 마을의 미래는 어둡다.추진위원들은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정치가를 설득했다. 정치가는 잘 알겠다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서울로 돌아갔다.
태영이 아버지는 그날로부터 계속 청대산 마을 시 승격을 위한 일에 일년을 꼬박 매달렸다. 그리고 일 년 뒤. 바로 청대산 마을 해난 사고가 나고 바로 다음 해. 청대산 마을은 시로 승격되었다. 강원도에서 네 번째 시가 되었다.
청대산 마을 사람들은 너도 나도 모두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청대산 사람들은 시 승격에 반가워하며 아무나 만나면 인사하고 악수를 했다. 청대산 마을 사람들의 함성이 곳곳에 퍼져 나갔다. 이번에는 환희의 함성이었다. 거대한 함성은 청대산소나무를 넘어 평풍처럼 서 있는 설악산까지 날아갔다. 전날의 슬픈 기억도 기억의 뒤편으로 보냈다. 개인뿐만 아니라 하나의 도시에도 슬픔 뒤에는 기쁨이 온다는 사실을 청대산 시민들은 모두 실감했다.
“태영아. 이제 우리도 시민이 되었다. 청대산 시민!”
아빠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대문 안으로 들려왔다. 태영이가 반갑게 아빠를 마중했다. 아빠 수고했어요. 수고 했어요. 태영이는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현수를 생각했다.
‘현수야, 너의 아빠의 희생이 헛된 거 아니었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