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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소설 - 이별여행 / 이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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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66회 작성일 16-02-15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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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 자]


TV를 비롯, 모든 매체에선
청년실업이 두드러진 화두로 다루어진다.
그에 잇대어 빠른 고령화의 문제가 고민 중이다.
청년실업은 내 자식들의 문제요, 빠른 고령화는 나의 문제.
우리 윗세대에선 자식농사가 노후를 보장 받았지만
우리세대에 와선 그렇지가 못하다.
나도 고령에 접어든 것이고 보니
자칫 <잉여인간>으로 떠돌다 갈까 몰라
나도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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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여행>


“이희자 씨이~, 이희자 씨이~ ”
“ ? ”
“이희자씨이~, 이희자씨이~ ”
‘누가? 정선배?’
희자는 이제 막 초잠이 들고 있었다. 머리 맡 창문을 두드리며 정선배가 애절하게 부르는 것 같았다. 믿기지 않아 숨 죽여 귀 기울였다.
“이희자씨이~ ~ ~. 이희자씨이~ ~ ~. ”
‘정선배가 여길 어떻게?’
희자는 지금 교회 청년부 형제 자매들 여름수련회로 설악산유스호스텔에 와있는 중이다. 하루 종일 계획표 따라 움직인 청년들은 곤한 잠에 빠져 있다.
희자는 양옆 자매들 잠을 깨울세라 살며시 일어섰다.
창밖에선 여전히 갸날프지만 애절한 정선배의 목소리와 창 두드림이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희자는 창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산 속이라지만 밤 공기는 마치 초겨울
같이 스산한 것이 와락 얼굴을 치고 들어왔다. 정선배가 거기 있었다. 깡
마른 노가리처럼, 팬티만 걸친 채 알몸이다. 창틀을 아직도 잡고 있었다.
“정선배, 여긴 어떻게? 아니, 아니 잠시만 거기 기다려요.”
희자는 잠이 확 달아났다. 희자는 잠옷에 맨발로 현관에 나가 아무 신발이나 발이 닿는 대로 끌고 창문께로 뛰어나갔다. 창문틀에 잡힌 듯이오그라진 손을 풀어 마주 세웠다. 정선배가 확실한데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이 산중에, 야밤인데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리고 여자 중에도 상 여자인 정선배가 알몸을 하고있다는 것 하고 내가 누운 방 창은 또 어떻게 알고 두드렸을까? 한순간 희자는 혼란스러웠다. 바람이 휙 스쳤다. 정선배가 오들오들 떨며 몸을 새우등 마냥 오므리며 희자의 허벅지를 꼭 안았다. 희자는 앞뒤 사연은 뒤로 하고 우선 정선배에게 옷을 사 입히는 게 급했다.
“선배. 빨리 걸어요. 조금만 가면 옷 가게가 있지 싶어요.”
희자는 선배의 손을 힘것 틀어쥐고 숙소 바로 앞 다리를 건너 상가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다리를 마악 건너는 순간 앞이 안 보였다. 스산한 바람이 회오리 치고 저 앞쪽엔 온통 회색 빛이 감돌고 있었다.
가면 갈수록 길은 오리무중이고 낯설었다. 점포는커녕 인적이라곤 있어본 적 없었던 것 같은 마을만 이어져 있었다. 그때다. 정선배는 무슨 힘이 남아 있었는지 희자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오던 길로 바람처럼 사라져 가는 정선배를 어쩌지 못해 희자는 울부짖었다.
“선배, 미안해요. 내 생각이 짧았어요. 숙소에 들어가면 내 옷이라도 여벌이 있었는데, 이 추운데 선배를 끌고 다니다니, 선배 날 용서하고 돌아와요오~.”
희자는 연신 정선배를 부르며 회색안개에 덮인 길을 되짚어 달렸다.
“선생니임~ 선생니임~” 희자는 자기 몸을 흔들어 대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꿈이었다. 옆자리에 누운 자매가 깨운 것이다.
“선생님 무슨 악몽이라도 꾸신 건가요? “
“그러게, 피곤할 텐데 잠 설치게 해서 미안해요.”
밤이 깊어가도록 희자는 잠이 오지 않았다. 꿈이 하도 선명하여 필경 정선배에게 무슨 일이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희자는 머리 맡 창문을 여러 번이나 올려다 보았다. 몇 차례 열어도 보았다. 여름 밤 산속, 물소리만 괴괴하게 들릴 뿐이다.
‘지금이 8월이지. 그런데 꿈속에선 왜 그리 스산했담.’
희자는 정선배와 소식없이 지낸 세월을 꼽아봤다. 서울 약수동 전철역 근방 그 길에서 헤어진 것이 벌서 2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날 선배의 언행이 여느 때 헤어질 때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그날도 희자는 S병원에 정기 검사를 받고 돌아오던 길이었고 정선배와 만날 것도 집을 떠나기 사흘 전에 약속했었다. 점심을 같이하고 서로 작별의 시점에서 정선배가 가방을 열더니 한줌이나 되는 것을 희자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아 줘,”
“이건 선배가 아끼던 물건 아녜요?”
“그랬었지. 근데 이거 이젠 나 못해, 무거워서.”
“그렇다고 왜 날 줘요?”
“이희자씨, 그동안 내게 참 고맙게 해 주었어. 나는 평생 이희자씨에게 신세 많이 졌잖아. 근데 난 갚을 길이 없어. 이젠 시내에 외출하기도 힘들어. 당신 만나러 나오기도 점점 힘들어. 내 마음으로 알고 이거 이희자씨가 잘 썼으면 좋겠어.”
정선배는 희자의 손을 끌어다 손안에 그 물건을 포개 담으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신세는 무슨 신세를 졌다구 그래요. 우린 평생 우정의 친구잖아요?”
“그래두 그게 아니야. 내 마음만이라도 이희자씨가 갖고 가줘 진심이야.”
팔순 노인의 눈물겨운 작별의 증표로 생각이 들어 희자는 두 손안에 그물건을 웅켜 받았다. 정선배는 흡족해 하였다.
희자는 고속버스에 앉아 안전벨트까지 다 하고 가방 속에 손을 넣어 포장도 안한 채 함부로 얼기설기 담긴 것을 스르르 꺼내 들었다. 버스 천장에서 희미하게 실내로 내리 밝히는 희미한 불빛에서도 그것은 아롱졌다.
오래 전 대만에 연주여행 다녀올 적에 사온 이래 봄 가을이면 늘상 착용해 오던 호박(琥珀) 목걸이다. 목에 걸면 젖가슴까지 닿는 길이에 쥐눈이 콩만 한 것부터 도토리알만 한 것까지 차츰 크기를 달리한 것이다.
희자는 그 목걸이를 받아오긴 했지만 한 번도 착용하진 않고 문갑서랍에 고이 넣어 두고 있는 중이다.
‘그래, 그날 정선배는 정말 심각했었지. 아니 진지해서 거역할 수가 없었지. 그간에 내가 너무 무심한 게야.’
희자는 그런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날밤을 새웠다.

수련회에 다녀오자마자 희자는 문갑서랍을 열었다. 그 물건은 2년 전옥현 선배가 주던 그대로 희자의 문갑서랍에 얌전히 또아리 틀고 있었다.
그 노란색 목걸이 알알이 내 눈에 눈물이 아롱졌다. 옥현 선배는 먼 길 떠날 사람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아주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처연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 가을 약수동 길거리에서 우리는 정녕 이 생에서의 마지막 작별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좀 더 함께 시간을 보내드렸어야 했다. 대낮이 아니라 해질 때까지 우리는 함께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옥현 선배는 나와 헤어지고 아직 중천에 떠있는 해가 서산에기울기까지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을 것이다. 해 뜨면 쏜살같이 집을 나와서 하루 종일 노상에 떠돌다 요행히 손이 닿으면 노인 학교 합창클럽에 간다거나, 늘 들르던 복지관에 가서 장애 노인들 말동무를 해주고 저녁밥 한 끼 얻어자시고 어둑해서야 큰 아들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인 것을. 그날 내 생각만 했던 것이다. 속초에 일거리를 두고 다녀오는 길이란 마음 때문에 여유가 없이 점심 한 끼 같이 하고 주머니에 몇 그릇 밥값을 찔러주고 황망히 돌아섰던 것이 이렇게 후회를 남길 줄 몰랐다. 2년 전 그 가
을에 선배는 80 노구임에도 곧은 자세였다. 상체가 약간 앞으로 기울긴 했어도 깔끔한 옷매무새에 노인답게 연한 화장기 얼굴이었지만 한껏 허기져 보였다. 희자는 그날도 여전히 옥현 선배를 설렁탕 전문집에 안내했고, 도가니탕을 주문했었다.
2천 년대에 들어서며 우리나라는 급격히 통신시스템이 팽창했다. 노인들에겐 혹시 모를 치매나 돌연사를 염려해서 자식들이 핸드폰을 부모의 목에 걸어드리고, 요즘은 초등학생들에게 부모들이 호신용으로 핸드폰을 사주고 있는 추세다. 그러함에도 옥현 선배에겐 핸드폰이 없다. 공짜폰 광고나 선전이 길가에 즐비하건만 요금을 부담할 여력이 없는 옥현 선배에겐 그림의 떡이다. 희자는 옥현 선배에게 기별하려면 오전 9시 전에 집 전화로 통화해야만 하고, 그 이후엔 그 분의 행방을 알 도리가 없다. 그날 약수동 전철 2번 출구에서 만날 때에도 그렇게 사전에 약속하면서 만
났던 것이다.

희자는 수련회 다녀온 고단함으로 한동안 몸조리를 했다. 11월이 눈앞에 다가오고 김장철이 코앞에 닥쳤다. 한시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옥현 선배의 안부가 더 이상 시간을 늦출 수가 없지 싶었다. ‘옥현 선배가 지금까지 살아있기나 한 건가?’ 희자는 김장을 조금 늦추어 잡고, 옥현 선배를 찾아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침 9시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전화기 숫자를 천천히 눌러나갔다. 그 시간이면 옥현 선배 큰 아들집 전화기가 두세 번 울리기 무섭게 날름 받곤 했다. 하지만 지금 희자는 지루할 지경까지 기다렸지만, 기계적인 멘트가 나오기까지 받는 이가 없었다. 희자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또 다시 같은 숫자를 또박또박 눌렀다. 신호음은 계속 울리고 더 한참이나 지나서 수화기를 ‘놓아버릴까’ 할 즈음에 저쪽에서 전화기를 드는 소리가 전해왔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권태로움에 찌들고 맥아리 없는 남자의 목소리다. 옥현 선배의 큰 아들이 틀림없다. 두 번 다시 상종하기 싫은 인간, 말을 섞기조차 싫은 놈이다.
“아, 네에. 여긴 속촌데요. 전에 평창동에 살던 이희자에요. 어머니 좀바꿔주세요.”
“예. 알겠어요. 근데 어머니는 집에 안 계세요.”
“그럼 작은댁에 가 계시나요?”
“아니요.”
“그럼 어디에…?”
“올 봄에 요양원으로 가셨어요.”
‘가셨다구?’ 옥현 선배가 스스로 갔을 리 없고, 알량한 자식들이 보내버린 거겠지. 희자는 순간 손맥이 풀렸다.
“어느 요양원이지요? 그 곳 전화번호는요?”
희자는 울화를 꾹 누르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물었다.
“그게, 아, 찾아야 하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큰 아들은 꽤 한참이나 전화기를 내려놓고 부시럭 쿵쿵거렸다.
‘망할 자식, 제 어미를 맡겨 둔 요양원 전화번호면 제 핸드폰에 긴급순위 1번에 저장했어야 옳지 않을까?’ 그걸 찾느라고 여기저기를 뒤적대며 시간을 이렇게 끌다니…, 희자는 화가 치밀어 목소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아, 여기 있어요. 경기도, 포천, ‘두루미요양원’이고, 전화는 031에 ×××에 ××××에요. 근데 찾아가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요. 그리고 속이 안 좋아서 잡수시는 게 힘들다고 해요.”
“알았어요.” 희자는 욕을 퍼붓고 싶은 것을 애써 참고 단번에 전화를 끊었다. ‘죽일 놈들, 결국은 제 어미를 포천, 먼 곳에다 치워버리고 말았구나. 자기들이 사는 서초동에서라면 용인 밖 남양주쯤에도 요양원이 없더란 말일까? 멀다는 핑계로 자주 들여다보지 않아도 낮깍이는 일을 면해보자는 쪽을 택했다 이거지?’

포천에 가려면 속초와 의정부 사이를 운행하는 시외버스를 타야 한다.
의정부행 버스는 하루에 한두 대 뿐이다. 직행버스라고 말하지만 그 노선은 속초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달려 간성 터미널에 한참을 정차해서 승객을 내리우고 타게 한다. 그리고 다시 출발하여 고성 삼거리 군(軍) 검문소를 거쳐 진부령 길로 접어든다. 해안선을 뒤로 하고 버스가 막진부령 기슭까지 가는 길은 왼쪽으로 계곡 물길을, 오른쪽은 깎아 만든 구비길이다. 희자는 온통 옥현 선배 생각으로 회한에 잠겨, 옛날 일들이 두서없이 얽기고 섥긴다. 차창 밖은 그야말로 만산홍엽이다. 한 구비 돌면 또 다른 구비길이 꼬리를 이어 나선다. 화려함의 극치이다. 이 길이 그냥 관광객의 귀가길이라면 그야말로 대관령, 미시령을 제쳐 놓고 일부러 골라잡아 감상하는 길일 터이다. 희자는 너무 아름다워 서러운 길을 피해 눈을 감았다. 차는 굽이굽이 안전벨트 끈을 조였다 늦췄다. 몸은 이리저리 기우뚱하건만 그냥 눈을 감았다. 상염은 옥현 선배 생각뿐이다.


희자와 옥현 선배의 인연은 1960년대 초로 거슬러 간다. 5.16 혁명정부가 출범하고 일 년 쯤 되었을까? 희자는 서울시청 보건과 촉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시청에는 각 과마다 타이핑 여직원이 한두 명씩 꼭 있었다. 새내기 직장인 희자는 자기과 타이퍼라이터 홍 언니에게 물건을 팔고 가는 미쎄스 정을 처음 봤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렇다 할 화장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멋 꽤나 부리는 젊은 여인네 아니면 고관대작들 부인들이나 화장품을 썼을 뿐이다. 그리고 직장 여성들이 조금씩 썼다. 그 때 화장품 하면 미군 PX에서 흘러나오거나, 양공주들에게서 새나오는 외제 화장품이 전부였다. 그 아니면 일제 ‘시세이도’가 대세였다. 옥현이가 여직원들에게 숨겨서 파는 것 중엔 일제 스타킹도 중요한 거래 물품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산 스타킹은 색상도 가지가지 판타롱, 팬티, 덧버선 등등 여러 가지이나 그 당시 일제 스타킹은 단 한 가지 엷은 살색에 허벅지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스타킹은 뒤에 이음새 줄이 선명
했다. 잘 펴서 줄을 곧게 신지 않으면 멀쩡한 종아리가 삐뚤삐뚤 혹은 안짱다리로 보였다. 허벅지에서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시켜야 하는데 그 밴드 역시 지금 머리띠 모양 유행을 따라 여러 가지가 있었다. 미국 영화배우 ‘마를린 먼로’가 바람에 휙 날리는 치마를 누르는 스냅사진 혹은 스타킹을 끌어올리는 장면이 5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매혹적 장면으로 자주 볼 수 있었다. 밴드보다 한 격이 높은 것은 스타킹 밴드에 고리를 끼워 고정시키는 코르셋이 있었다. 그것을 입으면 안전하다. 그런데 그 스타킹 가격이 놀라웠다. 그리고 가격에 비해 매우 약하다는 게 큰 문제다.
손에 거스름이 있거나 손이 거친 사람이 함부로 만지다간 신어 보기도 전에 올이 튄다. 그 때 돌던 말로는 ‘덴싱’간다 했다. 일본말이다. 미국 사람 말로는 ‘기스’간다고 했던가! 살짝 튕겨도 금방 쫘악 위 아래로 줄이 나며 흠이 생긴다. 버려야 한다. 사무실 책상 사이를 좀 급하게 오가다간 어느새 덴싱이 난다. 그 스타킹 값은 과히 희자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고액이었다. 한 달 월급 가지고 일제 스타킹 두 장을 사면 그만이다. 화폐개혁 직후 촉탁의 한 달 치 월급이 4천원이었으므로 지금으로 따지자면 월 40만원 쯤 일테지만, 쌀값으로 환산하면 쌀 한 말에 80원일 때 4천원은 대단한 가치가 된다. 더구나 60~70년대 우리나라 전체의 빈곤지수와 대비시켜 볼 때, 일제 외줄 스타킹은 엄청난 돈이었다. 미세스 정은 당시 공보실 직원이기도 했었다. 30을 갓 넘은 정선배는 6.25 전쟁 전엔 황해도에서 유치원 선생이었다고 한다. 남편은 북으로 납치되어 가고 슬하엔 아들만 둘이 있다고 했다. 그 자식들 양육에 공보실 촉탁 월급이 전부이니,
부업으로 소위 말하던 ‘야매장사’를 겸하는 것이었다. 어느 해 서울시청에서는 각 과마다 따로 있던 타이프라이터 여직원들을 한 방에 모두 자리를 하게 재편했다. 동선을 줄임으로 일의 효율성과 또 타이핑 활자 두들기는 소리 소음에 일반 직원의 업무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보건과 타이프라이터 미스 홍 언니도 책상과 함께 2층 타이프실로 옮겨 갔다. 위생과 미스라 언니만이 월급날이면 2층 타이프실에 올라가 필요한 물건을 미쎄스 정에게서 받아 왔다. 가끔, 아주 가끔 미스라 언니에게 외상값 받으러 보건과에 들릴 뿐 그때까지 정선배와 희자는 별 거래도 없고 친분이 없었다. 마침 희자는 파견근무 발령을 받아 영등포 보건소로 출근하게 됐다. 별로 작별인사까지는 필요치 않은 작별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며 우리나라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돌입하였고, 이내 새마을 운동이 낙후된 강산에 울려 퍼졌다. 서울 외각 특히 영등포구청 관내의 구로동, 오류동, 분래동에는 대규모 제조업 공장들이 가동되었고, 전라도, 경상도 할 것 없이 전국에 살고 있던 청소년, 청춘들이 단봇짐을 싸가지고 속속히 서울역에 내렸다. <구로공단>이란 명칭으로 후에 남은 그 공당엔 숙식제공이 되고 야간 중고교가 회사 안에 병설되기도 했다.
간혹 기숙사가 여의치 아니한 청년공들은 삼삼오오 단칸방에 자취를 하는가 하면, 더 어려운 젊은이들은 남녀 혼숙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시절수출이란 희망의 꽃을 피운 사람도 그들이고 시골 경제는 그네들이 벌어서 보내주는 것이 토대가 될 정도였다. 6.25전쟁을 치르고 휴전과 동시에 가난한 세월이 이어지면서 결핵이 전 국토에 창궐했다. 그들은 허리띠 졸라매고 모은 돈을 시골에 보내, 자기 한 몸 희생으로 부모형제 배 곯치않게 만들고, 제 아랫 동생들이 학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이 땀 흘려 일하는 이유가 충분히 되었다. 영양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로 주경야독으로 건강상태가 바닥을 치게 되니 결핵균에 쉽게 감염, 집단으로 주거며 일터에 있다 보니 급진적으로 감염환자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대한민국민의 결핵퇴치 프로젝트를 서울시에 위탁 지원하게 된다. 서울시에서는 다시 영등포 보건소에 그 본부를 꾸렸다. 희자는 그 요원으로 차출된 것이다. 그렇게 희자는 미련 없이 옥현 선배를 떠났고 한 삼년 세월을 옥현 선배와 무관하게 살았다. 그러는 사이에 희자는 혼인도 했다.
어느 봄날 희자는 미세스 정과 우연한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서울 YWCA 합창단 창단, 단원모집 오디션을 보던 날이었다. 희자는 대학시절에 속해 있었던 합창단 지휘자가 권하기에 간 것이고 미세스 정은 어떤 연줄로 왔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희자는 알토, 미세스 정은 소프라노 파트에 합격했다. 꿈 같은 재회를 기뻐하며 둘이서는 그때부터 각별한 사이가 되어 갔다. 희자 나이 20대 중반, 미세스 정의 나이 40대 후반이고 보니 희자에겐 친정 엄마 나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합창단 단원으로 이희자 씨, 정옥현 씨로 호명하는 사이가 됐다. 희자는 아직 서울시청 직원으로 있었지만, 그새 정옥현은 시청에서 나오게 됐고, 막 걸음마 단계에 있던 <동방생명보험회사> 외판원으로 있었다.

잘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승객들을 아무도 웅성되는 사람이 없었다.
희자는 영문을 몰라 눈을 떠서 사면을 살폈다. 협곡 같은 위치에선 버스, 그 앞에 또 서너 대의 차가 멈추어 있었다. 희자가 탄 차 승객 몇 사람은 이참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간다며 승강계단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떼를 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일방통행 구간인 게다. 산세가 워낙 험하고 옛날 군용트럭이 다니던 길인지라 지금처럼 교통망이 그물처럼 전 국토를 주름잡는데도, 서울 쪽에서 서너 대의 차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완충 구간에 정차하자 이쪽에 있던 차들이 차례로 시동을 걸고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갔다. 버스가 다시 제 속력을 내고 있음직 하자 희자는 상념의 꼬리를 다시 잡고 거슬러 올라갔다.

YWCA 합창단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대만과 국교가 단절되기 전 서울 YWCA와 대만 YWCA 합창단은 서로 교류 연주회도 한 차례 가졌다. 옥현 선배는 두 아들이 커감에 따라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전에 다니던 시청 여직원들에게 보험을 파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젊은 여성들은 아직 보험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하나 팔아줘.”
성냥팔이 소녀도 아니고 껌팔이 소년도 아닌 중년의 옛 직장동료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옥현 선배를 은근히 멸시했다. 그리고 만나기를 거부했다.
YWCA 합창단이 해체되고 두 사람은 또 뜨악해졌다. 희자가 35세 되던 해에 YWCA를 지휘하던 선생님은 합창단을 모집했다. 한국에서 처음 구성된 여성 3부 합창단엔 꽤 많은 단원이 생겼다. 약 80명쯤 되는 서울 여성들이다. 학창시절 한 번쯤 합창단 경력이 있다는 여인들인 바 30대 후반에서 60대까지, 평균 연령이 45세쯤 되었다. 그곳에서 희자는 또다시 옥현 선배를 만났다. 천성이 여리고 수줍음이 많은 옥현 선배는 여성 80명 중에 제일 친절한 사람이란 정평을 받았다. <친교부장>직함에 손색이 없었다. 매주 연습 날이면 시간 전에 먼저 와서 악보를 정리하고 새로 들어온 단원에게 그간의 악보 일체를 챙겨준다거나 결석했던 단원들에겐 빠진 악보를 챙겨주는 일은 모두 그가 솔선하였다. 간혹 비아냥거리기 좋아하는 단원 일부는 그렇게 친절하게 하는 데는 다 잇속이 있어서라 치부하기도 했다.
“보험 하나 들어 달라 하려고…”
그럴지도 모른다. 옥현 선배의 보험 가입 주고객이 합창단원이었다. 한 사람이 두세 가지 보험을 드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그리고 단원을 통해서 그들의 지인들에게까지 판로를 넓혀 갔다. 당시엔 보험을 들면 매달 보험금을 직접 수금했던 때라서 옥현 선배는 매양 길에서 하루를 다 보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수동적인 시절, 발품을 판 만큼, 정직함이 가장 큰 영업수단이었다. 가입자들 가정에 애경사에는 빠짐없이 봉투를 가지고 찾아가곤 했다. 고객관리 차원이지만 옥현 선배 경제여건으로는 그 또한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버스는 홍천을 지나고 양평 터미널에 이르자 운전기사는 불문곡지 차를 옮겨 탈 것을 종용했다. 승객을 쏟아버리듯 내려놓고 주유며 세차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의정부까지 하루 해가 모자랄 것만 같았다. 희자는 기울어지는 해를 쳐다보며 투덜거리면서 운송 직원의 손짓에 따라 다른 버스로 옮겨 탔다. 양평 터미널을 빠져나올 적에 희자는 들판을 유심히 봤다. 마른 논에는 짚을 말아 둥치를 만든 희고 둥근 비닐 볼만 띄엄띄엄 굴러 있었다. 밭에는 깨며 공, 팥인 듯한 잡곡을 꺾어 단을 지어 세워둔 것들이 즐비했다. 올 가을도 풍년을 맞은 우리 국토는 정말로 축복의 땅이 아닐 수 없다.
희자가 의정부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세 시가 넘었다. 옥현 선배가 속탈이 나서 잘 못 먹는다고 했으니 죽이라도 사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택시로 구(舊) 의정부 시장을 찾아갔고, 죽 집을 찾는데도 또 시간이 지체했다. 겨우 전복죽 한 팩을 포장해 들고 다시 의정부 터미널에 돌아왔다. 포천행 버스는 약 한 시간을 기다려야 떠난다고 했다. 의정부 터미널은 비좁고 스산했다. 초겨울인양 사람들 의복은 희자의 것에 비해 두툼했다.

어수선한 대합실 한쪽 의자에 앉아서도 희자는 주마등처럼 옥현 선배 삶의 족적을 회상했다. 아들 둘이 대학생이던 어느 날, 아무도 그의 집에 가본 사람이 없는데 자기만은 무슨 무슨 일이였던가 옥현 선배 집에 따라갔었다.
창고 건물 같은 한 켠에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단칸방, 선배는 들어서 자마자 전기장판 소켓을 켜 온도를 높인 장판에 깔 포대기를 들춰 희자를 앉히고 당신은 옷을 갈아입었다. 밖에서 본 옥현 선배는 화려하진 않아도 매무새 고운 한복 통 치마거나 양장을 했었는데, 집에서 입는 의복은 남자 복장이었다. 아들들이 입다 내놓은 것들이다. 지금은 여자 바지도 앞에 단추나 지퍼를 달았지만 그 시절 여자 옷은 치마건 바지건 모두 옆으로 단추를 달거나 지퍼를 달았다. 희자는 잠깐이었지만 옥현 선배의 변모에 너무 놀랐다. 옥현 선배의 외출복은 거의가 합창단원 중에 여유 있는 단원들이 한두 번 입었던 것을 준 것이었다. 옷을 맞추어 입던 시절에 아들 둘 학비 이외엔 자기 몸에 걸칠 옷 한 장이라고 살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옥현 선배는 두 아들이 다 명문대학을 나왔다. 그리고 첫째가 현대건설에 입사 한창 중동 붐이 일 때 중동현장에 파견 근무 하며 많은 돈을 보내왔다. 옥현 선배가 처음으로 자기 집을 가지게 된 것도 그때였다.
합창단 몇몇 사람이 옥현 선배 집들이 갔다. 그의 집은 잠실이 막 개발되어 서민 아파트 중 18평짜리를 분양받은 때였다. 곧 장가들어 네 식구가 살았다. 둘째도 (주)금성에 입사하였다. 그는 그 회사가 성장할 때 부장자리에 올랐다. 합창단이 매년 초겨울에 여는 정기연주회에 두 아들은 꽃다발을 가지고 와서 옥현씨에게 안겨주었다. 한때는 그랬었다. 그런 효자들은 어느 집에도 없다 싶었다.

아들 둘 다 출세하고 장가들고 분가했다. 옥현 선배는 큰 아들 집에 살았다. 그럼에도 ‘보험외판’일은 놓을 수가 없었다. 보험회사 조회 때마다조별 실적을 공개, 저조한 사원에겐 더 말할 수 없는 모욕과 조장에게 문책하는 게 일상이었다. 옥현 선배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서 편법을 쓰기도했다. 두어 달치 납입금을 보험 사원인 옥현 선배 자신의 돈으로 대체하기로 하고 새로 계약을 체결해 온다. 그리고 피보험자가 나자빠지면 몇 달간 더 자기 돈을 쓸어 넣고 설득한다. 물건 또는 노역으로 선물공세도 해야 한다. 그래도 틀어지면 해약처리 시키고 본인은 손을 털게 된다. 이런저런 것으로 소소하게 빚을 끌어다 대다보니 빚에 비싼 이자가 붙고, 그 이자가 다시 큰돈을 요구하게 만든다. 그 당시 은행이자는 아무리 싸도 1.5%였고 사채는 4.0%였다. 이 사람, 저 사람 특히 자기 가입자에게 돈을 빌려다 막고 못 갚으면 보험료(매달 내는)로 변제한다. 옥현 선배는 조장의 개인 빚까지 보증서다가 마침내 자기 힘으로 갚을 도리가 없는 큰 빚을 지고 말았다. 제 어머니가 그렇게 만류해도 보험외판에 손 떼지 못하는 사정은 전혀 몰랐다. 아들들이 잘 벌어들여도 며느리들은 집의 평수 늘리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늙은 어미에게 갓난애나 가사 일을 맡기고 나가서 맞벌이를 해야만 한다고 다그쳤다. 희자는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아들 둘이 옥현 선배 환갑잔치를 준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희자는 옥현 선배에게 당돌하게 제안했다. “환갑잔치 할 돈으로 엄마의 빚을 갚아 달라 하세요.” 아무리 강권해도 옥현 선배는 마음 약해서 끝내 발설하지 모했다. 그때까지도 옥현 선배의 아들 둘은 효자였다.

희자가 의정부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시가 막 지날 쯤이었다. 희자는 신기리 아저씨에게 빈 의자에 양해를 구하고 앉아서 석유냄새가 눈이 매운 난로에서 손을 녹였다. 포천행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여간 더디가는 게 아니었다. 의정부 터미널 대합실엔 얼룩무늬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휴전선이 가깝기 때문에 군부대가 많을 테고 휴가를 마친 장병들이 마지막으로 이용하는 민간교통수단이기 때문이리라. 고만고만한 동안이며, 고만고만한 젊음이 나라를 몸으로 막아서 지키고 있다. 저 아들이 어느 어미에겐 인생 전부일 테고, 어느 어미에겐 눈물이고 목숨일 텐데….’

합창단에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던 날이었다. 유난히 큰 가방과 큰 핸드백을 가지고 온 옥현 선배가 이상했다. ‘이틀간의 짧은 여행길인데 웬 대형가방?’ 희자의 눈엔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옥현 선배 답지 않는 호화 여행 물품? 뭐가 그리 많을까 싶었다.

“옥현 선배, 웬 짐이 이렇게 많아요?”
“응? 그렇게 됐어. 이따 말할게.”
일행들 역시 그 가방에 힐끔힐끔 눈짓을 하며 쑥덕대기도 했다. 여행 처음 가보는 사람처럼, 촌뜨기 티를 낸다고 했다. 우리는 한 시간쯤 달려서 수안보 콘도에 여장을 풀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는 잡담과 웃음 파도가 일다가 어느 한 사람이 선창(先唱)을 하면 곧 따라 3부 합창이 돼서 이어졌다. 머지않아 있을 정기 연주회 레퍼토리가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화음이 잘 맞을 때도 있고, 아주 뒤죽박죽이 되기도 했다. 희자는 옥현 선배와 같은 방을 쓰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이 차가 많아서 방 배정은 늘 떨어져 잡혔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차에 희자는 서둘러 옥현 선배의 큰 가방을 챙겨 들어 올리고 자리를 함께 잡았다. 갈 적엔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가던 단원들이 수차례 온천욕, 설친 밤잠 탓인지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차 안은 엔진 소리뿐이었다.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서부터 중간중간 정차하며 그 인근 단원들이 삼삼오오 내리곤 했다. 서초동 전철역 부근까지 왔다. 옥현 선배도 이제 내릴 차례가 되었다.
“선배, 다 왔어요. 내릴 차비해야지….”
“아, 아니야. 난 못 내려.”
“네엣? 왜요?”
“이희자 씨. 사실은 나 어제 집을 아주 나왔어.”
“그럼 어디 갈 곳은 정했구요?”
“아니, 그냥 쫓겨난 거나 다름없어.”
“결국, 그렇게 된 거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다 내 잘못이지 뭐. 요 며칠간만 이희자 씨 집에 나 좀 있게 해줘.”
“아…. 어쩔 수 없네요. 당장은 도리가 없네요. 나랑 같이 갑시다.”
강북에 사는 몇 안 되는 단원의 눈을 피해서 광화문 네거리에 내렸다.
그리고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평창동 희자의 집까지 왔다. 자주 보아온 희자네 가족들은 옥현 아줌마의 며칠간의 동거를 아무런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희자들은 평창동 동사무소와 서울예고 사이에 있는 정거장에서 내려 육교를 건너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마을 한복판으로 곧은 길이 열려있다. 그 오르막길을 따라 걸으면 길 중간쯤 오른쪽에 고(故) 박종화 소설가의 고택이 복원되어 거대 한옥의 장엄미를 한껏 풍기고 서 있고 꼭지점엔 오래된 사찰 ‘혜원사’가 나온다. ‘혜원사’를 종점으로 삼부 능선 높이에 길이 갈라져 있다. 오른쪽 길로 따라가면 롯데 신격호 회장 저택이 철옹성 같이 높고 견고한 벽을 둥그리며 버티고 있다. ‘혜원사’ 왼쪽으로 난 길에 접어들어 또 한 구비를 돌면 희자의 집이 있다. 해질녘이면 희자는 옥현 선배를 집 밖 계단에 데리고 나가 앉기를 자주 했다. 건너편 집들과 산봉우리를 감상하는 것이다. 평창동 집들은 똑같은 구조의 집은 한 채도 없다. 지형, 지세에 맞추어 설계, 건축하다 보니. 한 채 한 채가 그대로 건축물의 전시장이다. 그런 시간, 희자는 옥현 선배를 안정되게 장기간 맞길 곳을 골똘히 생각한다. 선배는 목청껏 노래를 한다. 철없는 아이처럼 보이지만 부끄러운 당신의 처지를 감추려는 몸짓인 것을 희자는 안다. 평창동이 영원히 태고의 정취를 지닌 고장으로 남을 줄로 알았지만, 말 그대로 지상에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개발 바람은 그 척박한 산세를 마다하지 않고 불어 닥쳤다. <북한 간첩단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이 있은 후로 정부에선 북한산 기슭, 세검정 일대 3부 능선께까지 굽이굽이 2차선 도로를 깔고, 시중지가에 훨씬 못 미치는 헐값에 주택 부지를 개인에게 매도하기 시작했다. 땅 값은 싼데 건축비는 그게 아니었다. 평창동에선 집을 짓자면, 지상에 올리는 건물 비용의 몇 배로 토목공사에 쏟아 넣어야 한다. 지상에서 볼 때 단층짜리 건물이지만 속에 들어가 보면 보통 3층짜리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북악터널을 기준해서 오른쪽에 <올림피아호텔> 왼쪽에 <북악파크 호텔>이 제일 큰 건물이었다. 대
로 가에 띄엄띄엄 2~3층 상가가 전부였다. 90년대에 불어 닥친 개발바람으로 <올림피아 호텔> 아래, 개울 건너에 5층짜리 아파트 단지가 들어왔다. 그 아파트는 <GA 아파트>로 많은 주민을 불러들였다. H건설 광고부에서 직장 생활하는 옥현 선배의 작은 아들네도 그 아파트에 이사해 살고 있었다. 그때가 2년 전 일이었다. 장가들기 전엔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 형제였다. VN 합창단은 해마다 11월 중순에 정기연주회를 가진다.
장춘단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YWCA 강당 등등 어디든지 꽃다발을 들고 왔던 두 아들이었다. 희자는 옥현 선배 집에 몇 차례 간 적이 있다.
두 아들이 장가들기 전이었다. 공부하거나 군에 가고 올 때, 큰 아들이 장가들고 두어 번…. 그때마다 작은 아들은 집에 있지 않았다. 지금 한 마을인지라 길에서 만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나 너무 어렸을 적에 본 선배의 작은 아들을 희자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옥현 선배는 눈앞에 작은 아들이 사는 아파트를 내려다 보면서 남의 집에 기대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희자의 막연한 고민을 들어주는 이가 나타났다. 고맙게도 희자의 스승 CHA 선생님께서 옥현 선배를 데려가겠노라 하셨다. 희자는 날짜를 잡아놓고 옥현 선배에게 알렸다.
선배를 보내는 날이었다. 어둑해질 때, 희자의 집 뒷길에서 크락션 소리가 두세 번 울렸다.
“희자씨, 이제 나가아…. 우리 큰 애가 왔나봐.”
“?”
옥현 선배의 큰 아들이 차문을 열고 꾸벅 인사를 한다. 검은색 ‘그랜저’ 승용차는 초저녁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큰 가방은 트렁크에, 손가방을 들고 옥현 선배는 뒷좌석에 희자와 나란히 앉았다. 희자는 대충 그린 약도를 운전석에 넘겼다. 차 안은 깊은 침묵 뿐 산굽이를 돌때마다 쏠림과 바퀴의 마찰음만 있을 뿐이다. 희자는 생각했다. ‘콜택시면 될 것인데 옥현 선배는 굳이 홀대하는 자기 아들을 불러야 했을까? 그리고 크락션 소리로 어떻게 제 아들 차라고 알아챘을까? 엄마이기 때문이리라. 엄마는 자식의 발소리, 울음소리를 잠결에도 알아 맞춘다. 옥현 선배는 아들의 차의 목소리까지 감지하는구나.’ 생각할수록 이 관경이 서글프기만 하다.
쪽지에 적힌 길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서 CHA 선생댁으로 달렸다. CHA선생 자택은 북악터널 왼쪽 산등성이에 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저택이다. 초인종을 울리고 한참 후에 CHA 선생은 대문을 철커덕 열었다. 그리고 계단을 총총히 내려 대문 밖으로 나왔다.
“아, 왔어요, 이 분이에요?”
“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우리 집에도 필요한 사람인데 뭐….”
옥현 선배는 자기 아들을 소개하지 않았다. CHA 선생님도 그 운전기사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두 개의 짐과 스승님, 그리고 옥현 선배가 마당에 들어서고 철대문은 철커덕 닫혔다. 희자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헝클어진 자기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일이 정말 잘한 일일까?’
“타시지요.”아들이 재촉했다.
“그러지요.”
지형적인 특성, 즉 깊은 산굽이 마을의 밤, 그것만 아니라면 절대 그 놈의 차를 타고 집에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해가 떠 있는 낮 시간이라도 그 놈의 차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어디가서 차나 한 잔 하고 가시면 어떨까요?”
아들은 이 무정한 현장을 변명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희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 지금 차 마실 맘 없어요. 그냥 가세요.”
CHA 선생님 댁은 자기 가족보다 남의 사람이 더 많이 거주한다. 운전기사, 식모, 파출부, 그리고 집사 정옥현이다. 구태여 옥현 선배까지는 없어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구실을 만들어서 희자의 절절한 부탁에 응한 것이다. 옥현 선배는 그 댁 손자 둘, 그 집 꼬마 둘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받아들이고 간식 먹이고, 전화 오면 메모해 두고, 간혹 아이론(다리미) 거리가 있으면 하고, 그러고도 일정액의 월급을 받는 조건이다. 식모와 파출부가 조금은 불편해 하는 어정쩡한 입장이다. ‘그랜저’, 당시에만 해도 국산차로는 최고가였다. 제 어미를 내쫓는 아내를 어쩌지 못하고, 제 동생이 사는 집 마을, 남의 집에 더부살이(고용살이) 차 실어다 맡기고 가는 검은색 승용차 ‘그랜저’의 사나이. 희자는 수백 번 욕을 삼켰다.
‘죽일 놈, 병신 같은 놈, 이 차를 팔고 작은 차로 바꿔도 제 어미를 이런식으로 내몰지 않게 되련만...’ 그날 밤에 희자는 옥현 선배 큰 아들에게 화가 났고 노엽고 서글펐다.
다행이 옥현 선배는 CHA 선생님댁에서 오랜만에 평안을 맛보며 산다고 했다. 그 댁 가족들의 친화적이고 넉넉한 마음, 인격적인 대우를 고마워하며 정성껏 일을 찾아 도웁고 지냈다. 그러나 옥현 선배의 안정된 세월은 2년을 못가서 어그러졌다. CHA 선생댁 대주께서 급작스런 사고로 사망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다시 옥현 선배는 그 집을 나와야 했다.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다 싶었는데 부산에 사는 소싯적 친구가 손짓을 해주어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희자는 천행으로 기뻐하며 옥현 선배를 서울역에서 배웅했다. 부산에서 이따금 전화가 왔다. 친구 집 밥을 언제까지 그냥 먹을 수 없어서 일자리를 얻었다는 소식이며, 다소 돈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옥현 선배는 친구 집 근처에 따로방을 얻고 독립했으며 일자리란, 인근 상가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부부에게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끼 밥을 지어 나르는 일이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자 옥현 선배로선 그 일도 너무 고되고 벅찼다. 하긴 그의 나이 70
을 훨씬 넘은 것을…. 박카스, 판피린으로 달래가며 부리던 몸이 몸져눕게 되면서 그 일도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옥현 선배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첫 눈이 내리는 저녁이었다. 희자는 서울역 대합실에서 옥현 선배와 한참을 앉아있었다. 주머니에 돈 몇 푼을 넣고, 트렁크 한 개를 끌고 온 옥현 선배는 무작정 돌아왔다고, 자기아들네들은 모른다고…. 초췌해진 옥현 선배를 희자는 어쩔 수 없어서 또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다.
“선배. 내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닌 거 선배도 알지? 세월이 이만큼 지났으니 아들네 집에 가서 여생을 맡기는 게 옳지 않아요?”
“응, 알았어. 희자 씨 맘 내가 왜 모르겠어. 그래도 아들집엔 못 가. 며느리들이 가만있겠어? 내 아들만 중간에서 죽을 지경인 걸. 며칠만 좀 더여기 있게 해줘.”
“아니, 선배. 어느 아들놈이 늙은 어미를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저들이 컸는데, 이제 와서 어미의 작은 실수조차 나몰라라 할 수 있어요?
선배가 정녕 못하면 내가 할까? 광화문 네거리에 길 막고 ‘여보시요들 홀어미를, 이 늙은 에미를 길에 내몰고도 잘 먹고 잘 사는 놈이 있는 거 아세요?’”
“미안해. 내게도 생각이 있어. 며칠만…”
옥현 선배는 부산에 있을 동안 두 아들에게 전화 연락을 하고 있었다고. 이렇게 다시 서울로 온 사실은 모르지만 그들 직장에 가서 거처를 의논할 것이라 했다. 미끄러운 길 마다하지 않고 옥현 선배는 버스로 시내에 드나들었다. 며칠을 그렇게 드나들던 옥현 선배는 슬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결론을 들고 희자 집에 왔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집사람이 아직도 승낙을 안 해요. 어머니 들어오시면 자기가 집을 나가겠다고 합니다….” 맏아들의 말이란다.
“어머니, 형수님이 못 받아들이겠다는데 둘째인 자기가 왜 어머니를 모셔야 하느냐고 악을 씁니다. 죄송해요. 용서하세요. 형과 의논하여 어머니 계실 곳을 마련할 참이었어요.”
둘째 아들의 말이란다.
“죽일 놈들, 썩어질 자식들…. 그러게 선배 그때 우리가 재가하랄 적에, 주위에서 좋은 사람 소개할 적에 팔자 고치셨어야 했어요. 이제 늘그막에 이게 뭐에요.”
희자는 울화가 치밀어서 퍼부어댔다.

옥현 선배는 두 아들이 각기 내놓은 돈과 제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아껴둔 돈으로 살 곳을 마련, 이사했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합창단 단원들은 예전같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소소한 가장지물을 보태주었다. ‘워커힐’을 지나서 ‘구리시’에 접어들면 도심 속에 아늑히 감추어진 듯한 마을 하나가 있다. 앞 넓은 갯벌은 온통 채소밭, 비닐하우스고 마을 안 곳곳엔 과수원이 있다. 뒷산은 ‘아차산’이다. 그 마을 이름이 ‘까치울’이라 참고운 이름이다. 매달 월급날이면 옥현 선배는 서울 시내로 간다. 두 아들과 만난다. 생활비를 죽지 않으리만치 얻어서 돌아온다. 이듬해 봄, 희자는 큰 수술 후 매우 허약해 있었다.
“이희자 씨, 여기로 와. 여기 참 좋아. 공기도 좋고 당신이 오면 내가 몸보신 잘 시켜 줄거야. 꼭 와서 며칠 쉬어가.”
옥현 선배가 희자에게 내민 첫 손길이다. 먼 거리인지라 망설였으나 희자는 아들 차로 옥현 선배 사는 ‘까치울’에 가서 며칠 간 쉬고 왔다. 아침이면 해가 일찍 뜨고, 고즈넉한 마을엔 집들이 울타리가 없었다. 이제 막 움트는 나뭇가지, 진달래꽃, 개나리꽃으로 아름다운 산책길이 좋았다.
“랄라랄라라라라라~”
모처럼 선배는 시름없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주일 아침 주인집 양주간을 따라 예배당에 희자도 옥현 선배도 함께 갔다. 주인댁에서는 포도 농사를 크게 하는지라, 옥현 선배의 손도 도움 된다며 좋아하였다.
방셋돈은 방세고, 포도농사 일손을 거드는 품삯은 별도의 수입이었다. 옥현 선배는 CHA 선생댁을 떠난 후 처음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제 와서 후회되는 일 하나가 있다고, 젊은 시절 아들들이 어렸을 적부터, 엄마 말이면 곧 하나님일 적에 당신부터 교회에 나가서 아이들을 성경적으로 기르지 못한 게 일생일대의 후회로 남는다 했다. 합창단 지휘자님도 그랬고, 희자도 그랬었다. 홀로 사는 엄마, 아버지 없는 아들은 교회의 품에 살아야 한다고 그랬다. 왠지 다른 일은 그렇게 잘 따르는 사람이었는데 교회 나가는 일만은 미적거리고 세월을 보냈다. 물론 아들 둘 먹이고 입히고 공부 시키느라면 쉬는 날이 없을 만도 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 천하의 효자 둘 다 어미를 박대하는 것은 모두 그 아들들이 여자를 잘못 선택한 탓으로 본다면 그때 교회 안에서 키웠더라면, 교회 안에서 부모 홀대하는 일은 없지 않았겠는가 하며 자책하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여자라고 모두 착한 며느리란 법도 없고, 교회를 안 다니는 여자라서 모두 못된 여자라는 것도 바른 이치가 아니다. 인간관계는 그야말로 인간 대 인간의 쌍방 간의 관계이다. 어느 쪽이 더 이성적이고 어느 쪽이 더 도덕적인가에 달렸다. 그보다도 상대방에 대한 애정 어린 헤아림의 쌍방 소통이다. 옥현 선배는 여리고 수줍었다. 직업 때문이라고 남들은 말하지만 희자의 판단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천성적으로 사교적이고 친절하다. 남 사정을 누구보다 먼저 눈치 채서 도우려 한다. 대견하게 자란 아들이 차례로 장가를 들고, 손주를 보는 동안 보험사원 직업을 놓지 않는 이유도, 아들 며느리를 경제적으로 도우려는 의도와 당신 용돈은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도였다. 더욱이 자기가 모집한 고객을 끝까지 챙겨주어야 한다는 의리 같은 것도 있어서였다. 옥현 선배는 까치울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처음 자신의 미련했던 과거를 자책하였다. 교회로의 인도며, 재가하라는 권유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돈, 아들만이 전부였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몹시 아쉬운 뉘우침이지만 때는 이미 너무 멀리 달아난 시절에 와 있었다. ‘까치울’에서 2년 쯤 있는 동안, 나라는 경제 파동이 불었다. 들어본 적 없는 IMF란 것이다. 나라가 국제적인 빚을 져서 빚쟁이가 됐다는 것이다. ‘빚’은 개인이나 국가나 다 제 얼굴을 들고 살 수 없는 노릇이다. 중동에 나가서 회사에 큰 공을 세운 큰 아들이 구조조정에 걸려 조기퇴직을 했다. 이제 큰 며느리 몰래 아들 직장에 나가서 불러낼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다. 작은 아들도 대기업에서 승승장구 하더니 마침내 중국으로 파견 근무 발령이 떨어졌다. 전화로 옥현 선배가 희자에게 이런 기별을 보낼 적에 희자는 ‘연신 망할 놈들이 망하는구먼.’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 순간 ‘그럼 옥현 선배 앞으로의 생활비는?’ 걱정이 뒤따랐다. 작은 아들이 중국을 떠나가기 전 어느 휴일, 두 형제가 ‘까치울’로 왔다. 어머니 사는 집에 온 것이 처음이다.
“어머니, 형은 집에 들어앉을 테고, 난 중국에 가게 되니 어머니 생활비를 따로 마련해 드릴 길이 없어졌어요. 제 집사람이 합치자고 처음 제안해 나오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뭐? 작은 애가 날…?”

합창단에선 옥현 선배의 거취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놓고 갑론을박 자기들 일인 것 마냥 열을 올렸다.
“안돼. 무슨 꿍꿍이가 있어. 그 맹랑한 것이 이제 와서 웬일로 합치자고 한대?”
“그래도 오랄 적에 가야 맞잖어? 더 늙어서 아주 거동이 안 될 때 오라하겠어?”
제 삼자들이 몇 며칠을 두고 설왕설래 하여도 결정은 본인의 것이다. 평창동 GM APT에서 살던 작은 며느리가 남편이 없는 새에 이제 막 붐이 이는 일산에다 큰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어머니 집 전세 돈을 빼서 합치면 융자를 조금만 받아도 된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나중에 더 늙어지면 어떻게 될까? 오라 할 적에 가야 맞다. 제가 오랬으니까 별 트집을 안 잡겠지만 그냥 까치울에 산다면 앞으로 생활비며 병원비를? ’
옥현 선배는 그간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선물 받고 후원 받아 갖추고 살던 모든 가장지물을 ‘까치울’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다 나누어 주고, 작은 며느리가 오란다고, 합쳐 살련다고 자랑하며 정리했다. 희자는 옥현 선배 본인이 좋아라 정리하고 아들 집에 들어간다기에 한편 마음이 놓였다. 그 즈음 합창단도 제 30회 정기 연주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2002년 봄에 희자는 막내까지 다 출가시킨 뒤라, 생활비가 많이 드는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 속초로 이주했다. 희자 나이 60, 남편 나이 68세, 생업을 위한 모든 일에서 손을 놓은 상태였다. 속초는 희자처럼 은퇴자들이나 투병 중에 있는 사람들이 살기에 아주 훌륭한 조건을 다 갖춘 고장이다. 생선이 싸고 싱싱하다. 설악산을 비롯해서 명산 준봉이 많아 트래킹이나 걷기 다 좋은 지형이다. 호수가 도시 북쪽에 하나 남쪽에 하나 두 군데나 있어서 그 둘레길은 그야말로 사색하기에 더 없이 좋다. 온갖 철새가 오고 간다. 투박하지만 간사하거나 변덕스럽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고장이다. 자연히 생활비가 적게 든다. 사치품 아니라면 큰 돈 들이지 낳고 의식주에다 문화생활이 가능하다. 옥현 선배는 희자의 요청으로 두 차례나 속초에 다녀간 적도 있다. 둘이 만나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 뿐이다.

희자가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자식 집이나 아우들 집에 머물다 온다.

작은 아들과 집을 합친 지 일 년도 채 안되었을 때 옥현 선배는 희자가 서울가서 며칠 머물고 있던 아우네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잘 지내시죠? 근데 늙느라 그런가 낯빛이 왜 그리 창백하세요? 어데 아팠어요?”
“아니야. 아픈데 없어. 그냥 먹는 게 좀 부실해서….”
“왜, 속이 안 좋아요?”
“그게 아니야. 나 원 참 이런 말 희자 씨에게 해야 하나. 참 부끄러워서….”
“뭐예요. 내게 말 못할 게 뭐있다고 그래요.
“야. 참 나는 너무 오래 사는 가봐. 왜 그렇게 입맛이 좋지?”
“노인이 탈나지 않고 잘 드시면 좋은 거지 그게 뭐가 문제요?”
“아, 글쎄. 우유도 맘대로 못 먹게 하고, 계란도 그래. 지난달에 작은 아들이 잠시 들어왔다 갔는데 아침상에 소고기 구운 것이 올랐지 뭐야. 난 아침밥을 같이 안 먹어, 점심 때 내가 그 남은 것을 먹었더니, 밖에서 들어온 작은 며늘아이가, ‘저녁에 아범상에 한 번 더 올리려고 놔둔 것을 내가 홀라당 다 먹었다’고 지랄 지랄하지 뭐야.”
그러고도 남을 며느리다. 작은 아들이 대기업 광고부에 부장 쯤 되다 보니, 설이나 추석이면 과일 선물이 꽤 들어온다. 겨울철이면 그 흔한 귤 마저도 다용도실에서 썩어나가는데 시에미가 몇 개 집어다 먹으면 곧 알아 채고는

“할머니 귤 먹었어요? 귤도 한꺼번에 너무 먹으면 설사해요.”
며느리는 제 시어미를 어머니라고 부르기조차 아까워선지 꼭 아이들 빗대서 ‘할머니’라고 한다. 집에 누가 방문하면 할머니는 절대 나서지 말고 방에 있으라고 한다. 제일 힘든 것이 오줌이 마려운데 손님이 갈 때까지 거실에 나서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 시에미가 외출할 때 곱게 입고, 화장을 조금만 해도 꼴 보기 싫어한다. 희자가 보기에 시어미가 본인이 알아서 몸을 단정히 하고 곱게 보이도록 하고 드나드는 것이 왜 미울까? 그 반대로 시어미가 아무리 값나가는 옷을 사 입혀도 빛이 안나고 늘 초췌하고 볼품없다면 자식들 욕 먹이는 일이 될 텐데 말이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가 계란 같은 것 조차도 밉다는 옛말이 그런 것일까? 옥현 선배네 두 며느리는 참으로 시어미가 미운 것이다. 희자는 이런 옥현 선배의 하소연을 들을 적마다 ‘선배도 집에서는, 사사건건 참견질에, 잔소리에, 정 없게 구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옥현 선배처럼 전적으로 자기희생으로 아들을 성공(?)시킨 홀시어미들에게 집착, 질투(?) 뭐 그런 게 없진 않았으리라. 어떠하던지 간에 이건 너무하는 것이다. 옥현 선배와 약수동 전철역 부근에서 헤어지던 때는 작은 아들집에서 나와, 실업자로 집에 박혀 지내는 큰 아들네로 옮겨 앉은 지 몇 달이 경과한 때였다. 손자, 손녀가 장성하여 각각 방 하나씩 차지하고 아들 내외가 또 한 방을 쓰고 보니 아파트에 여벌 방이 없었다. 노인은 누더기 한장으로 깔고 덮고 하며 거실 소파 아래에서 잠을 잔다. 당신의 공간이 없고 보니 철 바꾸어 입던 옷가지, 최소한의 소지품 같은 것을 지니기가 곤란했다. 이집 저집에 물건이 흩어져 있으니 ‘자기존재감’ 조차 남아 있을리 만무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식은 밥덩이 하나 물에 말아 후루룩 먹고 집을 나섰다. 연락이 닿는 지인을 만나 반나절 시간 보내기도 하고, 희자처럼 노인의 처지를 연민하는 합창단 소프라노 파트에 있던 후배가 매주 1회씩 노인대학 합창단에 함께 가주곤 했다. 희자가 낙향한 뒤로 옥현선배는 그 후배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대학 가는 날이 아니면 어느 장애인 시설, 치매 노인 시설에 가서 도우미로 봉사한다고 했다. 80노인이 누구를 도울 수 있으랴. 당신도 도움 받는 노인 중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점심과 시간을 해결하고 큰 며느리가 일터에서 돌아올 시간 맞추어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며느리 손을 덜어주려고 나서면 “내 살림살이에 절대 손대지 마세요.”하니 어쩔 수 없었다. 노인의 존재 이유는 털끝만큼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포천 가는 버스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차례대로 올라탄다. 희자도 서둘러 줄 끝에 섰다. 희자는 운전석 바로 뒷자석이 비어있어 자리를 잡았다. ‘두루미 요양원’에 가려면 어데서 내려야할지 속속히 길을 물을 셈이었다. 버스는 중간중간에 정차하여 승객을 내리고 다시 태우며 더덜더덜 달렸다. 타는 승객보다 내리는 승객이 훨신 많더니 어느덧 달랑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농부인듯한 노파가 말을 건넸다.
“아주머니는 어델 가시오?”
“아! 네 두루미 요양원에 갑니다. 그 요양원 아세요?”
때마침 운전기사가 힐끔 뒤돌아보며 껴들었다.
“포천엔 그런 이름 요양원이 없지 아마….”
노파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내가 포천 토박인데 그런 이름 들어본 적이 없는데.”
희자는 어안이 벙벙, 엉거주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희자는 제쳐놓고 기사와 노파가 주고받는 말에 온 신경을 다 모았다.
“아주머니, 잘못 오셨시유. 이걸 어쩌나.”
“기사 양반은 아시겠소?”
“파주 어덴가 그런 이름을 들어본 것 같소마는….”
그러는 동안 포천 버스터미널이 눈앞에 나타났다. 기사는 느릿느릿 일어서며 말했다.
“아주머니, 반대 방향으로 오셨시유. 의정부역까지 되짚어 가서 거기서 파주쪽 버스를 바꿔타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작에 물어봤어야 했다. 저녁 바람이 찬데 마음만 급해서 그냥 시간과 차비만 낭비했다. 옥현 선배 큰 아들 놈이 또 한 번 괘씸했다. 포천 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반시간 쯤 기다려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의정부 터미널에 닿은 시간, 해는 이미 서산에 반쯤만 걸려서 핏빛 광선만 뻗어 내렸다. 희자는 그제서야 생각을 정리했다. ‘두루미 요양원’ 전화번호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핸드폰 숫자를 누르는 손가락이 얼어서 자꾸 헛짚었다.
몇 번 시도한 끝에 저쪽 전화의 신호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기 의정분데요. 어저께 강원도 속초에서 전화한 사람인데요.”
“정옥현 씨 찾던 그 … ?”
“네. 그곳 위치를 잘못 알고 헤매다 전화했어요. 어떻게 가면 되죠?”
“버스로 찾아오시면 너무 까다로워서 시간이 늦겠고, 웬만하면 택시로 오세요. 파주쪽 대로를 오다가 JE 초등학교 앞에서 좌측에 샛길이 있어요. 의정부 기사들은 여기를 거진 다 알아요.”
“네, 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희자는 터미널 승차장을 나와 큰 길에 늘어선 택시 정차장으로 걸어갔다. 석양은 사그러져 가고 으스스한 바람이 이리저리 마른 낙엽을 희롱하듯 땅에 굴리다가 높이 날리다가 둘둘 말아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길을 핥았다. 꿈속에서 알몸인 옥현 선배 손을 틀어쥐고 옷 가게를 찾아 헤맸던 그런 음산함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후두둑 몸서리 치고서 급히 걸었다.
“기사님 파주쪽으로 가주세요. 실은 한 요양원을 찾아가야 하는데, ‘두루미 요양원’이라고요.”
차창으로 반쯤 얼굴을 내미는 택시 기사는 머리를 갸우뚱갸우뚱했다.
“JE 초등학교 팻말에서 좌측으로 나있는 길이라던데요.”
“아무튼 가봅시다. 가다 보면 나오겠지요. 그런데 거기는 의정부 시외라 택시를 메타대로는 못 가겠는데요..”
“알겠습니다. 얼마면 되죠?”
“6만 원은 주셔야 갑니다.”
“그렇게 하겠으니 어서 가주세요.”
희자는 속초에서 의정부까지 2만여 원을 주었다. 그리고 파주에서 또 의정부 사이에 시외버스 요금을 곱절이나 탕진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앞길에 또 6만 원을 내야한다. 어떤 수고와 값을 치르더라도 맘먹고 떠난 길이 아니던가. 해는 지고 땅거미마저 어둠에 묻히려는 이 처지에 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택시는 파주로 내비게이션을 고쳐 잡고 달려갔다.
JE 초등학교 팻말을 얼핏 보고 유턴해서 골목에 접어들었다. 학교 운동장 담벼락 자락이 끝나자 허허 벌판이었다. 길은 외길인데 인가는 없어보였다. 달마저 없는 그믐밤, 추수가 끝난 빈 논과 밭 잡초더미 등등이 헤드라이트에 설핏설핏 드러났다.
“아차! 이거 원, 아주 무인지경인데 무슨 요양원이 있답니까?”
기사는 짜증이 생겼다. 비포장도로에 택시 한 대가 겨우 굴러가게 좁은 농로였다. 희자는 또 핸드폰 단추를 눌렀다. 031….
“두루미 요양원이죠? 아까 전화했던 사람에요. 지금 JE 초등학교를 한참이나 지났는데 통 감이 잡히질 않네요. 얼마나 더 가면 될까요?”
“곧장 뻗은 길이지요? 그럼 그 길로 약 500m쯤 더 들어오셔야 될 것같네요. ‘철커덕’”
“기사님 죄송해요. 이 길은 맞는데 좀만 더 가야할 거라 하네요.”
“아니, 차를 돌려 갈 공간이나 있어야 되돌아가지요. 거기 누가 있어서이 밤중에 거길 가요 거길….”
“미안해요 기사님. 꼭 가서 보고 와야 할 선배 한 분이 있어서 그래요.
나는 오늘 나절에 속초에서 온 거에요.”
택시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칠흑 같은 밤길을, 낯 모르는 사람 둘이 타고 가는 것이다. 치한이 젊은 여자 손님을 납치해 태우고 간단들, 악 소리친다 한들 누구 한 사람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죽여도 모를 것이다.
“헉.”
“앗”
두 사람이 일순간 외마디 내질렀다.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탁 맞서는 돌비, 오석판에 흰 색으로 글자를 새긴 돌비가 거기 있었다.
<두루미 납골당> 그리고 조금 틀어서 바로 옆에
<두루미 요양원>
순간 희자는 참을 수 없는 노여움이 복받쳤다. ‘인간들이 이렇게 야속할 수가?’
낼모레면 죽을 치매환자들, 멀리 가져갈 비용도 아끼고 수고도 아끼는 차원에서, 숨 끊어지면 옆집에서 곧장 화장하고 돌아서서 바로 옆 납골당에 안치하는가 보다. 미처 못 죽은 치매 노인은 옆에 있던 동료가 대문 밖에서 태워지고, 납골당에 들어 앉는 거 지켜 볼 것이다. 아, 너무 악착스럽고 야속한 인심..
“여깁니다요. 아 500m 무슨 500m. 1km는 됨직한데두 말입니다.”
“네, 그렇네요. 여기 6만 원 받으세요. 근데 이따 내가 갈 적에 어떡하죠? 여기까지 콜택시가 와줄까요?”
“글쎄올시다.” 희자는 겁이 났다.
“기사님, 나 오래 머물지 못할 거에요. 곧 다시 나올 테니 기다리는 시간만큼 더 쳐서 드릴 게 가지 마세요. 네!”
“허긴 이런 길에 누가 옵니까. 나니 모르고 왔지요만.”
“좀 편리 봐 주세요. 너무 오래 머물지 않을게요.”
“그러죠. 차 돌려서 기다리지요.”
희자는 요양원 쪽대문을 지긋이 밀고 들어섰다. 학교 교실처럼 길다란 건물, 가운데 응접실인 듯한 곳에만 희미하게 불빛이 남아 있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희자를 맞이하는 두 명의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