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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수필 - '노인정의 빈 방석' 외 / 최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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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43회 작성일 16-02-15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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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희]


창밖의 나뭇잎 가을바람에 유혹되어
살랑살랑 엉덩이 흔들며
갈뫼의 가을 숙제하란다.
‘ 아차, 벌써 나뭇잎이 옷 갈아입는구나.’
그런데 발전하는 갈뫼에
제자리에서 헤매는 난 부끄러워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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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정의 빈 방석>


삼복더위의 마지막 말복도 자기의 책임을 다한 듯 가버렸다.
냉정함을 숨기려 무더위를 그냥 두고 이름만 챙겨들고 갔다.
전과 다르게 무더위는 기성을 부리며 후끈후끈 쪄 먹으려 한다.
노인정 할머니들이 선풍기 한 대로 얼마나 더우실까? 나는 걱정을 핑계로 보고 싶고 궁금하여 찾아갔다. 두 분의 할머니들이 보이지 않았다. 꼬부랑 할머니께서 얼마 전에 영원히 가셨단다. 너무 허리가 많이 휘어 지팡이에 의지하여 겨우 걸어 노인정에 다니셨지만 못 오실 길은 너무 빨리가셨다.
당연히 보여야 할 우리 엄마 역시 안계셨다. 3년 전에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곁으로 가셨으니까.
빈자리가 머리수 두 명을 줄여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빈 방석에 앉으며 포근한 엄마의 느낌을 받아보는구나 욕심을 부려보았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내가 매일 노인정에 자가용으로 5년을 출퇴근 시켜 드렸지만 친구 분들과 이 자리에 안계시고 그렇게 빨리 가셨을까? 노인정에 다시 와보니 엄마가 더 그립고, 보고 싶고 아쉽다. 할머니들께 엄마의 딸을 위한 평생 희생과 고마움을 가신 뒤에 느끼며 후회함을 사죄하니 무슨 소용이 있나. 병원에서의 고통과 장례식까지의 상황들을 말씀드리고 울음을 억지로 참고 가슴을 내렸다.
잠시 후 미리 시켜 놓은 시원한 냉 콩국수가 할머니들을 찾아왔다. 할머니들께서 고마워하시며 “아이고 너무 많다. 난 조금 나눠 먹겠다.” 하시며 가르던 국수가 조금 더, 조금만 더 하시더니 국물까지 모두 ‘쭉~쭉’들어 마신다. “아이고 국물이 걸쭉하고 구수해서 맛있게 다 먹었네”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내가 오히려 감사하고 기분이 좋았다.
‘우리 엄마도 오늘 이 자리에 계셨으면 참 좋아 하실 텐데’하는 아쉬움이 가슴을 친다.
“강릉 할머니 딸이 사주는 콩국수가 오늘 더 맛있는 것 같네” 하신다.
국수 한 그릇이 그렇게 고마운가를 느끼며 자주 와서 할머니들을 즐겁게 해 드려야 되겠다는 욕심과 당연함을 갖게 하였다.
노인회장님으로부터 노인회 흐름을 이야기 듣고 다른 할머니들로부터 엄마가 노인정 가족으로 계실 때의 얌전하시던 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줄 때 감사함과 아쉬움이 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저 할머님들께서도 어느 날인가 들리지 않는 부름을 받고 인사도 없이 가시겠지? 순서는 없지만 누구나 가셔야 되니까.
“할머님들! 건강은 본인이 알아서 잘 챙기셔야 합니다. 절대 빨리 가시면 안 되니까 오늘같이 씩씩하게 노인정 잘 나오셔서 즐거운 날 자꾸 만드세요.” 진심으로 부탁을 드렸다.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하고 대답하시는가 하면 “아이고 오래 살면 뭐해요? 자식들에게 짐만 되지, 아쉽다 할 때 빨리 가야지!”하고 대답하시는 할머니들도 계셨다. 마치 삶을 포기라도 한 듯.
그래도 삶의 애착은 누구나 욕심을 부리고 싶겠지, 살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열 명 좀 넘는 노인정 가족들의 삶이란 모두 가지각색이겠지. 자식도 없어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하신 할머니도 계실 것이고 오히려 자식들이 있어도 없는 것보다 못한 불필요한 자식의 어머님도 계실 것이다. 인간의 삶은 모두 겉으로 보아서는 행복해 보이지만 모르는 제 각각이니까.
할머니 한 분 한 분께 “즐거움만 생각하시도록 노력하세요. 그래야 건강하시니까 꼭 부탁드립니다.”하고 일어서 나오며 손에 사 들고 갔던 참외 맛있게 깎아 잡수세요. 또 올게요. 인사를 드리고 아쉬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몇 분의 할머니들께서는 옥상까지 나오셔서 계단 내려와 차에 앉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섭섭한 표시를 해 주신다.
오는 내 마음 시원하지 않고 할머님들이 앉아 계시는 노인정 방안 모습이 머릿속을 꽉 메우며 안타까움이 젖어든다.
‘왜 늙으셨을까? 나이 잡수시지 말지. 싫다고. 흥, 나도 곧 따라 가겠지.
남의 이야기가 아닌데…….’
‘바보 같은 우리 엄마 왜 먼저 가셔서 노인정 방석 하나 남게 하셨는지 너무 억울하고 아깝다. 내가 자주 가서 엄마 방석에 앉아야지.’
몸뚱이 이곳저곳의 쑤셔대는 아픔과, 쓸쓸함을 참아가며 하루를 쉽게 보내기 위해 모여진 노인정 할머니들!
점심 식사 후 모두 약 봉지 뜯으신다. 그것도 약 잡수시는 시간을 잊으실까봐 수저 내리자 즉시 드신다.
“늙으니 정신머리가 없어서” 하시며.
모두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사랑하는 노인정 할머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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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友情)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형제자매 없이 혼자 자란 나는 외로웠다. 그렇다고 부모님들께 애교를 떠는 귀염둥이 역할도 못하는 그저 얌전한 착한둥이었다. 그것도 나이 먹고 내 자식들을 기르면서 느껴지는 후회감이다. 좀 더 씩씩하고 명랑하게자라며 아들 없어 섭섭해 하는 부모님들의 외로움을 잘 닦아 손질해 주는
요술쟁이 귀여운 딸이 못 되었다. 이제 어두침침한 흐르는 세월을 내려딛으며 마음에서 알아차리게 되었다.
학창시절 친구들도 대부분 나를 얌전하고 착하기만 한 친구로 인식되어 장난도 싸움도 걸어 볼 상대가 안 되는 즉 요즈음 학교 주변에서 만들어진 용어 ‘왕따’였겠지 싶다. 교복 입고 규칙만 잘 지키는 모범 여학생.
철없던 어린 시절도, 다 자라 교복을 벗는 마지막 날까지도 어느 친구하고 다퉈본 기억도 특별히 나를 괴롭히던 친구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참견에 말썽부린 기억도 없다. 그래도 친구들은 말 없는 침묵의 미소가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 유머로 폭소의 분위기를 만들어 배꼽을 움켜잡게 하는 은근히 웃기는 나의 학창시절이었다고 한다. 늦은 어울림에서 교복 입고 찍은 빛바랜 앨범이라도 뒤척이고 있는 듯 너도 나도 솔직한 그때 그 지난 시절을 밝혀주는 친구들. 말썽을 부리며 몸과 마음이 성장할 사춘기 중·고등학교 학생 때의 추억을 더듬어보면 통지표의 행동발달 평가는 활동성만 ‘나’ 점수이고 책임감을 비롯한 여섯 종류는 ‘가’ 점수가 적혔던 기억이 생각난다. 그런 얌전이가 어떻게 용기를 만들어 평생교직생활 정년퇴직까지 하였는지 나도, 친구들도 의아해 한다. 아마 성격이 점점 변하여 교단 위가 적성에 맞았던 것 같다. 불만보다는 제자들이 머릿속에 받아 주는 교육의 보람을 더욱 고마워하였고 사회생활 적응도 노력하였으니까.
요즈음도 친구들을 만나면 모르고 자라온 초등학교 철없던 시절 고무줄 놀이할 때 시커먼 고무신 벗고 맨발로 뛰며 놀던 순진하고 걱정 없던 어린이로 한 바퀴 돌아보고 온다. 공기받기, 모래주머니놀이도 키가 작고 나이도 가장 적은 나를 친구들이 같이 하자고 편 속에 넣어줘 즐기기도 했다. 나이 먹어도 다 같이 까마득했던 국민학교 학생으로 되돌아가 히히 낙낙 추억을 되씹으며 머릿속을 더듬어 찾아내는 이야깃거리들이 끝없이 튀어나온다. 즐거운 어린 시절이 되면 친구들 얼굴에는 주름과 흰 머리카락이 모두 도망을 간다. 덜 성장한 귀여운 어린이들로 변하니까.
명칭을 ‘교복친구’라고 붙여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동기동창 모임이 있다. 서로 어색함이나 예의에 주시하지 않고 만나면 무조건 반가워 포옹하고 악수하며 “야! 건강하지? 더 예뻐졌다.” 첫인사를 하며 얼굴의 주름이나 굽어지는 허리, 힘없는 걸음걸이를 숨겨 주고 삶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위한 스스럼없이 상대하게 되는 교복친구들. 반찬 없는 식사도 한 숟가락 더 나누어 주며 맛있게 뚝딱 해결한다. 은근한 미소 지으며 한 친구 체육시간 단체 체벌 받던 이야기부터 시험 볼 때 커닝 페이퍼 들키던 이 야기들은 사춘기 여학생으로 푹 빠져버린다. 서로 건강이나 가정생활 하소연 들어주며 충고하고 괴로움의 해결방법 의논 해주는 “야! 자!” 할 수 있는 고마운 교복친구들. 즐거움은 축하해주고 섭섭함은 위로 해주는 친구들은 쓴 나이는 먹지 말잖다.
나는 3개월에 한 번씩 서울을 가야 한다. 건강한 삶을 위해 꼭 가야 한다.
서울에는 사랑하는 우리 교복친구들이 많이 상경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를 비롯한 시골 친구들이 서울의 큰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게 되면 꼭 아픔의 고통을 간질여 없애 주려는 듯 바쁜 일을 뒤페이지로 넘기고 우선 병문안을 간다. 손잡고 쓰다듬으며 따뜻한 용기를 주는 위로는 형식이 아닌 진심의 고마운 우정 듬뿍 쏟아 준다. 일 년에 한두 번 연락하여 얼굴 보고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수다의 입맞춤은 자꾸 기다려 진다. 학창시절에 못 느꼈던 우정이 믿음으로 나타나고 서로 안아 주고 희생의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친구들은 멀고 멀어진 그 옛날 교문을 들어서서 운동장과 교실에서 드려진 단맛이 고마운 그때로 다시 전해지는 듯싶다. 정말 고맙다. 사정이 생겨 불참한 친구들을 못보고 돌아오면 섭섭하다. 보고 싶은 십여 명의 친구들이 모두 모여 우정을 주고받기는 힘들다.
몇 년 전에는 만나면 “우리 아들은~ ” “ 우리 작은딸이~” 하며 이야기의 주가 되던 내용이 어느새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이제는 “우리 손자가~” “우리 외손녀는~”하는 소식들로 흐름의 방향이 변해가고 있다.
어떤 친구가 “얘들아! 우리도 이젠 많이 늙었나봐.” 말을 뱉으니 다른 친구 얼른 답을 받아친다. “야! 우리가 미쳤냐? 늙게.”하며 유머와 위트 속에서 한바탕 즐거운 웃음을 안겨 준다. 우리 친구들 절대로 나이를 먹지 않고 늙어도 안 되는 각오들을 단단히 심어 주는 동심의 숙제를 약속 한다.
자기의 자존심과 위상을 높이려 하지 않고 일심되어 점심 먹고 차 한 잔씩 맛있게 홀짝대니 어느덧 헤어질 아쉬운 시간은 침범. 잠실 롯데 지하에서 섭섭한 미소로 다음을 약속하며 이쪽 길 저쪽 길로 손 흔들어 안녕을 빈다. 한국전쟁의 잔해가 의식주의 고통을 사로잡고 남존여비의 사상이 풍부한 시절 여자들이 시골에서 교복을 입기는 정말 힘들었었다. 사랑하는 우리 친구들 우정은 변함없이 흰 카~라 달린 단정한 교복 입고 영원히 늙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