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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수필 - '둥지' 외 / 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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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14회 작성일 16-02-1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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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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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


친정집은 빨간 벽돌에 지붕이 슬레이트다. 현관 앞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좁은 처마 아래에 제비집이 네 개나 있다. 내가 어릴 때도 제비는 초가집 처마 밑에 집을 짓곤 했다. 제비는 해마다 새 집을 지었다.
전에 지어진 둥지에서 새끼를 낳으면 될 텐데 힘들게 짚과 흙을 물어다 다시 짓곤 했다. 전에 지은 집에 둥지를 틀어도 그냥 들어가지 않고 고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봄이면 부화한 새끼 제비들이 지지배배거리고 어미 제비는 곤충을 잡아다 새끼들의 입에 넣어주느라 분주했다. 비 오는 날 마루에 앉아 제비집을 관찰하였는데 어미 제비는 새끼들에게 순서대로 먹이를 갖다 주었다. 새끼 제비는 어미가 올 때쯤 되면 입을 벌리고 서로 울기 시작하지만, 신기하게도 돌아가면서 입에 먹이를 넣어 주었다.
봄에 엄마와 3박4일을 보냈다. 엄마는 제비 소리 듣는 것이 낙이라고 한다. 제비 소리가 들리면 안심이 된다는 거다. 난 제비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엄마는 제비가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팔순이 넘는 엄마보다 내 귀가 더 밝을 것 같은데, 왜 나는 안 들리는 것일까?
어릴 때 우리 남매와 엄마의 모습이 제비의 모습과 겹친다. 엄마는 우리 남매를 키우던 그 시절을 떠올리는 거다. 엄마가 일 갔다 돌아오길 기다려 학비 달라고 조르던 우리가 그리운가 보다. 지금은 엄마 혼자 계시는 집이 싫은 거다. 가을이 되면 제비는 남쪽으로 날아가 버린다. 텅 빈 제비집을 보는 게 두려운가 보다. 언젠가 전화로 말씀하셨다.
“너희들 위해 돈 벌 때가 가장 행복한 날이더라. 따뜻한 사랑을 주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먹이고 학교 보내야 해서 앞만 보면서 살았던 그때가 행복이었고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더라. 그때는 힘들었을 텐데, 돌이켜보니 그 시절이 그립다. 너도 지금 자식이 옆에 있을 때가 행복인 줄 알아라.”
엄마가 행복했던 시절은 우리를 위해 돈을 벌 때라니 놀랐다.
내가 고등학교 때였다. 엄마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늦게까지 일하고 체해서 두통에 시달리면서 퉁퉁 부은 얼굴로 공장 다닐 때였다. 고1 때 친구집에서 단편 전집을 빌려 읽었는데 그 중에는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도 있었다. 김첨지의 아내가 조밥을 먹고 체해서 약도 못쓰다 죽었다는 내용이 엄마의 상황과 같았다. ‘엄마도 저러다 죽겠구나’
싶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학교였다. 학교 가지 말라고 할 때면 하늘이 무너지는 캄캄함을 느낄 때였는데, 학교를 그만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봤다.
오랜 세월 부모님을 원망했다. 학교 갈 때마다 차비를 못주겠다는 엄마, 자식이 소풍 가는지, 졸업을 하는지, 한겨울에는 코트도 없이 학교를 다녀야했는데도 춥겠다는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는 부모가 싫었다.
결혼해서도 십 년 동안 내 마음에 엄마는 들어오지 않았다. 사랑을 모르는 엄마로 생각하였다. 친구들 엄마와 너무나 다른 엄마가 싫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살았던 엄마는 돈을 좋아한다고. 그런 엄마가 있어우리가 살 수 있었는데, 그건 능력 없는 부모의 책임이 더 크다고. 엄마가 그립다거나, 혼자 계시는 엄마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없었다. 자식이라는 의무감만이 있었다. 엄마와 둘이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오빠와 남동생을 위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돈 벌기를 바랐다. 난 굽히지 않았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자식 중 내가 가장 키우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나에게는 상처였다. 키우기 힘들었다는 말을 내가 소중한 자식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엄마는 지난 시절을 종종 떠올린다.
“난 너희 키우면서 밥을 먹는지? 학교에 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자식들 성격도 모르고, 자식들 키우는 재미를 느껴 본 적도 없고.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면서 돈을 열심히 벌었는데 내 손에는 한 푼도 쥐어본 적도 없고…….”
육 남매를 키우면서도 자식 키우는 기쁨을 느낀 적이 없다는 말씀이 마음 아프다. 난 아들이 두 명이지만 그 아이들과의 추억 보따리를 밤새도록 풀어도 못 풀 텐데. 내게 가장 큰 선물은 아이들이고 기쁨이라고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는데. 목이 메서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아픈 목을 가다듬고 침을 삼키고 태연한 척했다.
“하루 두 끼 먹을 때도 있었지만 두 끼 먹었다고 우리 남매 아픈 사람없었잖아요.”
엄마를 위해 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엄마, 욕구 중에서 먹는 욕구가 일차적인 것인데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먹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대요. 그런데 난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어요. 엄마가 생선이 많이 날 때면 생선을 자루로 사 왔어요. 양미리나, 도치, 오징어는 질리도록 먹었어요. 그래서 지금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럼 아직도 채우지 못한 것이 공부니?”
“엄마, 아버지가 공부 못하게 한 응어리가 남아서가 아니라 지금은 공부를 그냥 취미로 해요.”
예전 같으면 공부 좀 작작하라고 했을 엄마가 아무 말 없다.
엄마의 말 중에서 무엇보다 자식 키우는 재미를 몰랐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엄마는 그랬다. 늘 일만 했다. 설악산 수학여행단 밥해 주러 갔을 때였다. 학비를 내지 못해 선생님 눈치를 보던 나는 이제는 학교 다니기 힘들다는 판단을 했다. 자율학습을 빠지고 엄마를 찾아갔다. 장화 신은 엄마의 모습. 보톡스가 없던 그 시절에 마치 보톡스 맞은 것 같은 얼굴. 참담한 마음으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곧 학비를 마련해 줄 테니 조금만 참으렴. 난 살면서 엄마가 안쓰러울 때보다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는데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면서 엄마가 우리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곧 돈 마련해 주마 조금만 참으렴.” 이 말을 통해 엄마의 가장 큰 사랑과 희생을 떠올린다.
살면서 이 말이 내가 버틸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부모는 나에게 사랑은 주지 않았고 구박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에는 엄마의 큰사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 말을 떠올리면 목이 따갑도록 아프다. 중간에 태어나 내 학비 버느라 더 힘들었을 엄마다.
어미 제비가 새끼들이 날 수 있을 때까지 벌레를 물어다 주듯이 엄마도 우리가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힘겨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난 내 자식 키우면서 깨달았다. 사람은 태어날 때 저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 속에는 부모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지금은 우리가 엄마를 보살펴 드려야 하는데, 여전히 엄마가 옆에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보살핌을 받은 기억 때문일까? 아직도 엄마가 둥지로 느껴진다.
엄마는 제비가 떠난 빈 둥지를 바라보며 한 번씩 찾아오는 자식들을 기다린다. 오늘도 빈 둥지를 지키며 언제쯤 자식들이 찾아줄까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남쪽으로 함께 떠난 제비 가족을 부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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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


사람에게 상처 받고 사람을 통해 치유하며 산다. 다른 사람 말이 상처가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런데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면 내 안에 있는 상처가 자극을 받아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상대의 말이 듣기 힘들다면 자신의 내면을 먼저 보아야 한다. 자신의 상처가 깊고 크다면 타인의 말에 더 많이 분노한다.
짝수 달 넷째 주 월요일에 속초여고 친구들 열한 명이 강남에서 만난다.
5년 되었다. 봄 모임 때, 그들 중 한 명에게 상처를 받은 나를 보았다.
지난해는 시어머니 병원 모시고 가는 요일이 월요일이었고, 자격증 따려고 공부하게 되어 세 번 빠지고 말았다. 그랬더니 육 개월 동안 친구들 얼굴을 못 봤다. 내가 빠진 사이에 회장과 총무 임기가 끝났고, 새 임원을 제비뽑기로 정했는데 내가 회장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친구가 나를 대신해서 뽑았다는 것이다.
회장을 맡자마자 회칙부터 만들었다. 친구들이라고 해도 사소한 일로 마음 상하면 안 될 것 같아 회칙을 근거로 하자고 했다. 임원 임기는 6월부터 다음 해 5월 말일까지로 정했는데, 이의 제기하는 친구가 없어 다행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임기 끝날 때를 기다리는 나에게 육 개월을 더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당했다. 밴드에 회칙 올릴 때는 아무 말 없었는데 회장을 뽑을 때 12월까지 하는 것으로 정했다니. 두 달에 한 번 보는 친구들과 갈등 빚고 싶지 않아서 모임에서는 말을 아꼈다. 밴드에 생각을 올린 후 친구들 반응을 볼 생각이었다.
‘회계를 12월까지로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육개월 더 하면 되는 것이다. 난 바쁘지 않은 6월에 인계하는 것이 좋다. 친구라면 바쁜 내 상황을 이해해 달라.’
밴드에 대충 이런 내용을 올렸다. 그리고 가장 친하게 지냈던 N에게 전화로 부탁했다. 임기를 5월까지 하자고 하면 옆에서 훈수를 들어달라고. 그러겠다고 약속한 N은 모임에서 결정하기로 한 날, 오히려 내가 6개월 더 해야 한다고 먼저 말했다. 순간 배신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깊은 배신감으로 한동안 밴드와 카톡을 열지 않았다. 모임에서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삼십 대의 나였다면 절교를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억지로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자고 나에게 말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며칠이 지나니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이십오 년이 지나서 친구들을 다시 만난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나와 딱 맞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또 며칠이 지났다. 친구들을 통해 나를 더 내려놓으라는 신호일 거다. 관계를 맺는 것은 어렵고 끊기는 쉽다. 갈등이 생긴다고 회피한다면 비겁한 거다. 그들이 나를 이해해 주길 바라지 말자. 친구도 내 사정을 생각해 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복잡한 생각 속에서 깨달음이 왔다.
친구가 나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춰주길 바라는 이기심이 있었구나. 나는 친구들에 대한 이해나 배려도 없이 그들이 나를 배려하고 존중해 주기만 바라고 있구나. 난 지금도 N이 내 말에 긍정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먼저 말해 주길 바라고 있구나. 내가 친구에게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들이 다가오길 바라고 있구나.
친구에 대한 서운함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런데 사람 사는 세상이 머리로 이해한다고 가슴까지 열리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아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N에게 전화해서 일상을 말하지 못한다. 친구를 이해했다고 역지사지까지 되지는 못했다. 어떠한 상항에서도 역지사지만 된다면 미워할 사람도 이해 못 할 사람도 없을 듯하다.
내가 운전할 때는 건널목을 무시하는 사람. 도로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짜증 나고 화가 난다. 그런데 내가 보행자가 되면 건널목을 무시하고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넌다. 세상 사는 것이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바라본다. 내 기준에서 판단하기에 화가 난다. 쌍방향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다. 쌍방향 눈으로 보는 것이 역지사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