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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수필 - '호박잎 지도' 외 / 노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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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40회 작성일 16-02-1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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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금희]


원고마감을 얼마 앞두고 병원에 계셨던 고모님은 가을빛 곱던 날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 가셨습니다.
친정어머니 일찍 돌아가시고 우리 형제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고모님.
혹여 전화가 뜸할라치면 먼저 전화 하셔서 건강치 못한 나를 염려해주시고 우리 맘을 이해해 주셨던 고모님. 설과 추석이면 늘 점심을 해주셨는데 외로운 우리를 위한 밥상이었던 거지요. 자식들 신경 쓴다고 힘들다 내색 안하시고 그 많은 농사일 지으시던 산같던 고모님.
고추장 막장 담가 주시고, 집 뜰의 푸성귀 퍼주시던 그 손길과 호탕한 목소리. 이제는 그리움으로 남았습니다.
강한 여자로의 일생 이제 내려놓으시고 부디 편안히 안식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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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잎 지도>


옥수수를 쪄놓았으니 가져가 먹으라는 고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하루 늦게 갔더니 쪄놓은 옥수수가 상할까봐 김치냉장고에 보관했다며 딸과 조카에게 줄 옥수수를 똑같이 넣었다고 하셨다. 조카딸인 나에게도 늘 딸같이 챙겨 주시는 고모님이시다. 그 많은 농사일 하시면서 가까이 있는 나와 멀리 있는 언니, 동생까지 들기름 한 병, 쌀 두어 말, 감자 등을 그때그때 챙겨 주신다. 아무리 농사를 많이 짓는다 해도 조카들까지 마음 써주신다는 건 쉽지 않은데 말이다.
옥수수를 챙겨 나오는데 마당 끝에 산처럼 쌓인 호박덩굴이 보였다. 오일 장날 호박잎이 많이 나오기에 한번 쪄서 밥상에 올렸더니 딸애가 아주 맛있게 먹던 생각이 났다.
쌈의 대표 얼굴인 상추쌈과 양배추쌈, 다시마쌈에 호박잎쌈까지, 쌈을 좋아한다. 호박잎쌈은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계절음식이다. 밥상에 자주 올리지 않아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굴 닮았는지 참 토속적인 입맛을 가졌다. 된장과 부새우를 조금 얹어서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두어 번 더 사서 먹였다. 대학 간 딸애가 개강해서 짐을 쌀 때 밑반찬으로 먹으라고 호박잎쌈을 함께 보냈다.
내가 호박잎을 따려하자 고모는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앞치마 가득 따주셨다. 옛날 증조할머니께서 호박잎을 따서 시장에 팔러 가시곤 하셨는 데 그게 뭐라고 호박잎도 맘껏 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너털웃음을 웃으셨다. 그렇게 맛있던 것도 이젠 입맛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셨다. 달고 맛있는 게 널렸는데도 몸이 안 좋으니 된장찌개나 칼국수 같은 음식이 더 입에 맞다 하시니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어려운 시절엔 무엇이든 없어서 못 먹었는데 다시 그 입맛을 찾으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감자밥에 호박잎쌈 하나 가득 입에 넣는 생각만으로도 배가 불렀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저녁밥을 지으면서 감자 한 톨 깎아 넣고 감자밥을 했다. 줄기에서부터 껍질을 벗기면 얇은 망처럼 퍼져있는 호박잎의 실핏 줄이 한꺼번에 달려 나온다. 그렇게 호박잎의 까실한 뒷면을 벗겨내야 솜털같은 가시가 주저앉는다. 참으로 신기한 먹거리가 아닌가. 껍질을 벗긴 호박잎을 싱그러운 초록색이 그대로 남도록 슬쩍 쪄냈다.


오래 전, 엄마가 해줬던 호박잎쌈이 생각나서 처음 내손으로 쪄서 먹을 때 호박잎 줄기를 벗겨내야 하는 걸 몰랐었다. 까칠까칠한 호박잎쌈을 먹다 포기한 후 얼마 만에 먹어 보는 건지 모르겠다. 따끈한 호박잎에서도 호박냄새가 달큰하게 올라왔다. 거기에 포슬포슬 으깬 감자밥을 얹어 먹으니 감자의 구수한 맛과 짭쪼롬한 쌈장이 입안에서 싱그러움으로 피어났다.
음식이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그리움으로 전해온다. 가끔 입맛이 없을 땐 엄마가 해 주시던 음식이 먹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그래서 집집마다의 개성 강한 내림음식이 존재하는가 보다.
소소한 작은 것에서 불현 듯 오래 전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고 훗날 내 딸도 그러지 싶다. 그리움을 배경으로 낯익은 가계도 하나가 풀어져 있던 시간을 동그랗게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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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가계도>


아버지 형제는 누나인 고모 한 분 계신다. 왜 우리는 큰아버지나 삼촌이 없고 고모만 계시는지, 명절에 썰렁한 가족을 보면서 가족 많은 다른 집이 부러웠었다. 사촌들이 북적이고 명절을 쇠는 분위기지만 우린 달랑 가족뿐이었다. 설날이면 증조할머니 덕에 마을 사람들이 세배를 오셨지만 뭔가 허전함은 계속 되었다. 내내 말씀을 안 하시더니 내가 중학교 다닐 즈음 아버지는 우리 가족사에 대하여 말씀해주셨다. 아버지 형제는 전쟁으로 헤어진 남동생이 한 분이 더 계셨다. 늘 외아들에 독자라는 얘기만 들었던 나는 다른 가족이 있다는 것만 들어도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연좌제 피해를 들어서인지 아버지는 자세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누가 물어도 이북에 가족이 있다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단속을 하셨다.


6.25이후 인민군이 북진하는 한국군을 피해 남대천 건너까지 피난하라 했고, 남대천을 건너자 다시 북쪽으로 북쪽으로 이어지는 피난이 계속 되었다. 아버지와 가족들은 추운 겨울 눈 내린 길을 신발도 없이 건봉사까지 피난을 갔다. 증조할머니가 도저히 못가시다고 하여 부모 도움 없이 걸을 수 있는 아버지는 함께 되돌아오고, 할머니는 걷지 못하는 남동생을 업고 간 피난길이 잠시 헤어질 줄 알았는데 영영 생이별이 되었다고 한다.
38선 근처 수복지구인 양양은 우리뿐 아니라 많은 이산가족들이 산다.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해보았지만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수 만 해도 6만 6천명이라고 하니 그것도 차례가 쉽지 않다. 생사 확인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고령임을 감안한다면 생사도 알 수가 없다.

설령 만난다고 해도 많은 가족들이 만난 이후 더 괴로워한다며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다. 하지만 오래전에 헤어진 동생과 엄마가 왜 그립지 않겠는가.
엄마 품을 놓아 버린 아버지는 증조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잠실에서 책임자로 일하셨던 할아버지는 장티푸스로 직원들이 아프자 일을 본다며 잠실에 가셨다가 결국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부모 없는 고아신세로 할머니를 어머니 삼아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어린 나와 언니, 동생들은 증조할머니를 할머니로 부르며 자랐다. 그런 가족사에 고모님은 할머니 밑에서 살림을 배워 야무진 손끝으로 못하는 음식이 없고 무얼 해놓아도 맛있고 풍성했다. 대장부 기질의 고모와 달리 아버지는 할머니 보호 속에서 2대 독자로 귀하게 크다 보니 심약한 면이 있었다. 고모는 남매의 성격이 반대가 되었다고 회상하며 지금에 와서도 타박을 하셨다.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할아버지 할머니는 훗날 흑백사진 초상화 그림으로 빛바랜 벽에 걸려 있었는데 아버지의 모습이 보
였다.
딸이 많은 집이라 엄마 손을 덜려고 그랬는지 방학 때면 연례행사처럼 외가에 가서 지내다 오곤 했다. 그래서 외가는 어디보다도 편안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가끔 갔는데 그럴 때마다 여든을 넘긴 외할머니는 뉴스시간은 꼭 지키고 앉아 계셨다. 외할머니는 학도병으로 끌려간 아들 생각에 통일이 되었다는 뉴스를 들으려 TV앞을 지키신 것이었다. 통일을 애타게 기다렸던 외할머니는 끝내 그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듣지 못하셨다.
이렇듯 엄마도 아버지도 이산가족이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이곳저곳 몸을 다독거리며 살아가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그럴 겨를 없이 먹고 사는 일에 몰두 하시다보니 이제야 몸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산의 아픔으로 남은 두 분 남매가 모두 편찮으시다.

늘 많은 농사를 지어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퍼주셨던 우물 같은 고모는 관절과 심장병으로 아프시다. 또한 평생 편하게 사셨던 아버지도 큰 병없이 우리 곁에 계시겠지 했는데 수술 후 많이 약해지셨다. 언제나 왕성하게 일하셨던 고모는 금방 회복되겠지 하는 마음 하나로 버티시며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젊어서는 경운기를 직접 몰고 다니며 일을 하셔서 여성 농군소릴 들었으니 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늘의 구름과, 바닷물은 경계가 없이 넘나들고 있는데 우리의 국토는 오고갈 수 있는 길이 없으니 언제나 자유로이 왕복할 수 있을런지. 몇 번의 이산가족들의 만남과 냉전 끝에 최근 남북한 화해의 분위기를 보면서 건강하셔야 북에 있는 가족들과의 만남도 기다려볼 수 있지 싶다.


그리 뜨겁던 여름날이 가고 가을 겨울 오듯 서서히 낡아가는 인생을 봄날처럼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제라도 큰 고통이 없이 편안한 노후를 맞이하시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