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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수필 - '청개구리' 외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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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31회 작성일 16-02-1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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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숙]


매섭게 지나가는 가을이 몇 번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던 날이다.
문득 내가 이 가을을 잃어버리고 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까지 온다.
길가의 아름다운 코스모스들의 살랑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루하루 사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데...
왜 점점 버거워지는지 모르겠다.
어른이 점점 되는 것? 가끔 하늘을 보며 끄덕인다. 맞나보다.
어른이 되는 것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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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


우리가 다 아는 흔한 청개구리 이야기가 있다.
엄마 말을 너무나도 안 듣는 아들 때문에 고민하던 중 병을 앓아 죽음을 앞둔 엄마개구리가 고민에 쌓였다. 내가 죽거든 산에다 묻어야 하는데 분명 이 아들은 산에다 묻어 달라 하면은 냇가에 묻을 것이 뻔해 엄마 개구리는 아들에게 내가 죽거들랑 나를 냇가에 묻어 달라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마지막 엄마의 말을 잘 들어 산에 묻어야 할 엄마를 냇가에 묻어, 장마 때 엄마 무덤이 떠내려갈까 슬픔에 빠져 비가 오면 그렇게 서글피운다는 내용이다. 개굴개굴 개굴…. 이 이야기는 삼십을 넘은 어른이면다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니 초등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니 아마도 초등학생 이상은 다 알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어쩜 그리 부모 말을 안 듣는지 청개구리를 능가한다. 어떤 부모이던 내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기에 다 좋은 말로 가르치지 않나 싶어서 말이다. 더구나 사회의 부적응, 많은 범죄들, 그런 모든 행위들이 다 부모 말을 안 듣고 자라서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니 부모 말을 안 들으면 세상에서 가장 큰 벌을 내려서라도 말을 잘 듣는 아이들로 키웠음 하는 마음이다.
부모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고 어릴 적 우리 아버지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랬기에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말씀, 즉 부모 말씀을 조금도 아니 거의 거역한 기억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요즘 내가 수업을 다니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요즘 아이들은 부모는커녕 어른들의 말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고 오히려 자기 친구처럼 놀려먹기 일쑤이고 거기다 더해 어른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아는 아이들이 허다하다.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즘의 젊은 부모들의 교육적사고방식에서 나오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아이들이 살 미래에 대해서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 아이들의 미래에는 없을 수도 있을 터, 가히 걱정보다는 나나 잘살자는 방관적인 나의 모순에서도 내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너무나 독단적이고 편파적 보호 본능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의 모습에서 손을 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중 정말 예의도 바르고 참 잘 자란 아이들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어른들도 그리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이 허다한데 아이들만 뭐라할 처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몇 해 전 속초에 큰 장마로 인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그해도 루사라고 하는 태풍이 몰고 온 비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그날도 비가 얼마나 내리는지 저녁이 될 무렵 도로에 바퀴가 잠길 정도로 비가 퍼부어 온통 속초 시내는 비상 상태였다. 학교도 휴교령이 내리고 비는 퍼붓기를 지나 쏟아 부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청대산 가락을 담고 있는 도로 안쪽의 아파트이다. 어마하게 퍼붓는 빗소리와 우르르 쾅하는 괭음과 함께 청대산 밑의 도로로 토사가 내려와 길이 막혀버렸다. 차가 거의 다닐 수 없이 흙더미는 쏟아져 내려왔고 점점 그 쌓이는 흙더미와 폭우는 거리를 덮어버렸다.
자원봉사자와 경찰들이 수신호를 하고 도로는 바리게이트를 쳐 그곳에 진입을 못하게 팻말과 현수막을 붙이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밤이 늦어지자 모르고 그 길에 들어선 운전자들은 당황하여 우회를 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고 동네 자원봉사자들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형광봉을 들고 길을 막기도 했다. 그러나 그중 꼭 그렇게 말려도 그런 것을 무시하고 꼭 대드는 사람들이 있다.
왜 길을 막아서냐며 당시 상황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 막아 놓은 것을 무시하고 지나가 차가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자원봉사자도 그런 몇몇의 사람들과 실랑이가 싫었는지 포기하고 자원봉사를 관두고 귀가를 해버렸다.
급기야 몇몇의 차들의 발동 소리가 커지고 부릉부릉 엑셀을 거칠게 밟아 대는 이들이 있었으니 결국 그 웅덩이에 차를 맡긴 사람들이다. 엑셀을 수없이 밟아 대며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밀어도 결국 차는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러게 왜 거기를 들어 가냐고 소리를 지르며 멀리서 자원봉사자가 달려왔다.
도와주다 비에 흠뻑 온몸이 다 젖고 힘은 힘대로 빠지지 신경질이 난모양이다. 차가 빠져 속상한데 낯선 이한테 꾸지람까지 들으니 처음에는 같이 열 받아 싸우다가 시끄럽다는 아파트 주민의 소리에 차를 두고 맥없이 걸어 나오는 사람, 그렇게 몇, 몇 대 차가 그 자리에 꼬라박히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도 처음에는 어째, 어째, 베란다 밖으로 소리를 질러줄까 했지만 벌써 위층에서 그 광경을 보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른다.
나는 그곳에 빠진 차들을 세어보았다. 서너 대, 고급차도 두어 대, 중형차가 한 대, 그 당시 고물이 다 되어가는 나의 애마를 생각하며 난 아까워하며 그 고급승용차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폭우가 베란다 안으로 쏟아지는 상황인데도 밤이 늦도록 후레쉬를 들고 그곳을 지키는 이들 모습들로 심심치 않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다들 하나둘씩 사람들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고 자정이 넘어가 새벽이 되어갈 무렵 또다시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자동차 한 대가 진입을 한다.
또다시 오지랖 넓은 위층 집 아저씨는 “안 된다고 들어가지마, 들어가지마” 고래고래 고함치는 소리에 나도 잠에 깨어 내다보는데 가관이 아니다.

새벽까지 몇몇 사람들이 지키며 길을 막고 있는데도 욕지거리를 하면서 그곳을 빠져나가려는 차 한대와 실랑이 소리가 점점 시끄럽게 아파트단지를 초토화 시켜 버렸다. 아니 여기 팻말이 있지 않느냐, 들어가지 말아라, 저기 차들이 저렇게 빠져 있다 위험하다고 말리는데도 가로막는 자원봉사자를 밀치고 들어가 버렸다. 그는 모든 바리케이트를 밀어버리고 돌진, 드디어 수렁에 빠진 차 한 대가 추가 되었다. 그리고는 차가 빠져갈 수가 없자 있는 없는 욕을 해대며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기차가 빠졌으니 나오라 하고 아마도 그쪽에서는 폭우속이라 못 온다 하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자 시끄럽게 렉카차가 와서 멀리 차를 대놓고 고객과 싸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책임을 질 수 없다,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 해놓은 곳에 고객이 들어갔으니 하면서 차주가 진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정말 왜 말을 듣지 않는 것일까?
분명 차가 빠질 상황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했고 바리케이드도 쳐 놨고 현수막도 걸어 놨다.
그런데 다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쳐 놓은 바리케이드도 손수 내려서 밀어 버리고 이중으로 쳐 놓은 줄을 올려놓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뻔한 일을 눈으로 보면서들 자신은 할 수 있다는 자만감일까? 자신은 안 그럴 것이라는 자신감일까? 그런 것은 무슨 심보인지 무슨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또 한번은 민방위 훈련에 모든 동의 통장들이 나와 거리에 차의 진입을 막았다.
나도 그날 모르고 나가 7번국도 진입 입구에서 걸리고 말았다. 다급하고 수업에 늦을 것 같은 급한 마음도 있었으나 우리 동 통장님이 애써 거리를 막고 봉을 흔들고 있기에, 아니 상황이 훈련이다 보니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줄줄 내 뒤로 서 있는 차들이 왜 안가냐며 빵빵거리며 난리를 쳐대었다. 앞의 상황을 보고서야 ‘아’ 하면서 기다려주었다. 그런데 세 번째쯤에 있던 차가 난리 벼락을 치는 것이다.
왜 안가냐며 소리,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는 차에 내려 나와서 나에게 뭐라 야단까지 하는 것이다. 앞의 상황을 보라고 나도 신경질을 내면서 대꾸를 하니 그래도 나가라는 것이다. 그러자 앞에선 통장님이 나와 지금 훈련 중이니 못 나간다 몇 분이며 되니 기다리라고 했더니 “너가 경찰도 아니면서 왜 길을 막냐고” 하면서 차로 중앙선을 넘어 그 통장의 말도 무시하고 큰 도로로 휙 나가버렸다. 결국 일 킬로미터도 못가서 경찰에 붙잡혔다. 왜 그러냐고 참내 속으로 나도 욕을 하고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이렇듯 우리가 살다보면 그럴만한 상황이 있는데도 막무가내 상대방 사정은 들어보지도 않고 몰아치는 사람들이 있다.
한번쯤 상대의 상황이 어떤지 여부도 안 들어보고 자신만 옳다고 우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을 때는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자기만의 생각, 자신만의 욕심을 부리는 이기적인 생각들이 낳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 수많은 실수들이 비일비재하다.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나와 다른 이와 더불어 이롭게 사는 사람으로 의식이 이어져야 하는데 의식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조차 점점 퇴색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두름의 컵라면의 세대가 확장되어가고 느림의 미학이 시대의 막힘이 되어가고 있다. 시대를 초월하는 디지털시대에 왜 우리의 의식은 점점 하락해 가는지 모르겠다.
에릭 호프만의 <이타적 인간의 뇌>에서 보면 저자는 에고 중심의 좌뇌가 우뇌를 통제하기 때문에 현재의 이기적인 모습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며, 좌우반구의 균형 회복을 주문하고 있다.
시대가 점점 발전하며 따라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며 짓밟으며 이기려는 태세로 돌격하고 있다. 그로인한 인간의 모습은 점점 파괴되어가고 실생활에서조차 빈부의 격차의 틈이 점점 벌어지고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은 더 사악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방법이 있기는 하는데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가 균형 있게 작동하고, 전두엽이 활발히 움직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우반구로 생각할 때는 우리는 보통 세상을 시간과 공간,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분리해서 바라본다. 하지만 우반구로만 바라보면 시간이 멈추고, 물리적 경계가 사라지고, 좋고 나쁨이 없고, 언어가 소멸된 에너지 세계만 있을 뿐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만 있는 그 세계는 완벽하고 충만하고 아름답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주와 하나가 되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이어진 형제자매임을 깨닫는다. 내면 깊은 곳에서는 평화와 사랑과 기쁨과 연민이 깨어난다.
하지만 좌반구가 점차 회복함에 따라 질 테일러는 시간과 공간과 언어와 함께 ‘나’라는 감각이 돌아옴을 느꼈다. 그에 따라 “완고하고 오만하고 빈정대고 질투심이 강한” 자아가 깨어나 우반구의 세계를 두개골 안에서 몰아내려 했다.
당신의 의식을 한 차원 높이고 당신이 자신의 생각과 사고 과정 자체를 더 높은 곳에서 관찰하고 있다고 상상해야 한다.
앞으로 뇌가 진화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뇌량이 완전히 발달하고 좌우반구가 최고 수준으로 연결될 것이다. 그러면 좌반구와 우반구의 완벽한 통합과 고차원 의식의 등장에 필요한 신경학적인 기반이 갖춰질 것이다. 전두엽은 사고에 관여하는 지적인 좌반구와 정서에 관여하는 직관적인 우반구의 균형을 맞추는 책임을 맡은 듯하다.
잠자리에 들 때 우리는 악어와 말과 함께 누워 있는 셈이다. 이 두 동물은 우리의 뇌에 있는 파충류와 포유류 조상을 의미한다. 이 동물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면 폭력적이고 끔찍한 악몽이 우리의 수면을 방해할 수도 있다.

뇌의 주요 기능은 합의된 현실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걸러내는 것이다. 알파파 훈련은 오래 전에 진화한 부위(두정엽)의 활동을 중단시키고, 감마파 훈련은 최근에 진화한 부위(전두엽)의 활동을 증가시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좋은 성적을 거둔 골퍼들은 좌우반구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스트레스 속에서도 좌반구의 활발한 사고 기능을 잠재울 수 있었고, 그 결과 우반구 활동이 방해받지 않았다.
뇌의 네 번째 진화 단계에서는 전두엽이 더 많은 에너지로 충전되어 활동적이 되고 동시에 뇌량도 개방된다. 그 결과 우반구 활동이 증가하고 우반구와 좌반구가 더 잘 통합되어 동등한 파트너가 된다. 이러한 뇌를 각성에 이른 ‘새로운 뇌(New Brain)’라고 부른다. 새로운 뇌가 진화함에 따라 에고가 소멸하고 좌반구 활동이 감소하며 우반구 활동은 증가한다. 이런 변화는 시간에 덜 몰두하게 해주고 지금 이 순간에 더 집중하게 해준다. 우반구와 좌반구가 완전히 통합되면 우리는 자신이 다른 모든 생명체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타인을 생각하는 건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고, 타인을 만나는 건 사실상 우리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탈진을 만난다. 즉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보장할 수 있다. 스트레스로 인한 탈진 후 사람들은 대체로 회복되지만 종종 그들 개인의 가치관이, 그리고 때때로 성격 자체가 변화를 맞는다. 물질 추구 성향이 줄어들고 사교성과 연민이 증가하며 타인과 자신의 행복을 염려한다. 좌반구는 주인이 아닌 하인이어야 한다고 본문 중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먼저 풀어야 숙제일지도 모른다.
뱃속에 있는 아기 때부터 뇌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할까? 점점 청개구리로 크는 아이들에게 뇌교육만 시켜야 할까? 과연 그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는 모르나 감성의 뇌인 우반구가대장이 될 날이 올까?
오늘도 나는 긴 거리 운전을 하고 오고 있었다. 멀리 백 미터쯤 공사를 하는 팻말이 보였고 좁혀진 도로를 막는 아저씨 한 분이 연신 길이 없다고 깃발을 좌우로 흔들어 대며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도 줄지어선 차량들 뒷줄에 서지 못하고 아무도 안 들어서는 그 길에 분명 이유가 있다는 걸 인식할 상황인데도 자신이 잘난 양 기어코 그 길을 혼자 신나 달리며 시커멓게 햇볕에 그을려 이 쌀쌀한 가을초입인데도 구슬땀을 흘리며 깃발을 연신 흔들어대는 아저씨 앞에서 급정차를 하고 만다.
그 경험을 많이 해서인지 아저씨는 황당한 모습도 없이 무표정한 침묵으로 연신 깃발을 좌우로 흔들어대고 있다. 조금 당황한 모습을 나에게는 살짝 비춘 듯하였으나 그것 또한 숙달된 표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그 급정거한 운전자는 줄지어 선 행렬에 끼워달라고 좌측 깜빡이를 깜빡깜빡 거리고 있다. 줄지어 선 운전자들을 그 자를 안 끼워 줄양으로 차간의 거리를 더 서서히 좁혀 온다.
쯪쯪…. 순간적으로 나도 갈등을 겪었다. ‘에라 이 청개구리야 아나 젠장 먼저 가라, 개...청개구리야’하고 비켜 주었다. 그리고 꼭 언제고 연신 깃발을 흔들어 대는 그 아저씨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다. 다음에 아저씨 코앞에 바싹 급정거를 하는 운전자가 있거들랑 맛있는 꿀밤 한 대 먹여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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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


오래된 부부를 보면 왜 그런지 “어 둘이 닮았네.”하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곤 한다. 오랜 시간동안 식생활과 식습관에 같이 길들여지다 보니 그렇게 겉모습이 닮아 간다고 한다. 같이 다니던 오래된 친구들도 보면 왠지 겉모습이라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행동들도 무리를 지듯 그 행동들이 비슷비슷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같이 한 사람은 닮아가는가 보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부부 사이던지 친한 친구이던지 하더라도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할 줄 하는 사람, 최소한의 그런 것들을 구별해야 상대와 트러블이 생기지 않는다. 너무 친하다 보니 내 것도 내 것, 니 것도 내 것이라는 우스운 말이 돌기도 한다. 세상 사는 이치는 아무리 친해도 분명히 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부부라도 서로의 예의를 지키며 살아야할 것들이 있고 더더욱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보는 양상에서 그렇게 친했던 친구나 지인이 원수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화장실 갈 때도 붙어 다니고 늘 매일 다니던 단짝이 어느 날 원수가 되어 서로를 헐뜯고 있다. 그러다 화해를 하면 얼마나 낯부끄럽고 그동안의 잘잘못들이 창피스러운지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하며 살기도 한다.
언제가 보았던 배려를 주제로 한 EBS와 인성교육범국민 실천연합이 공동 제작한 프로를 시청한 적이 있었다.
가끔 우리는 상대를 위한다고 충고하듯 이렇게 이야기 한다.
“옷이 그게 뭐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얘기야, 넌 항상 그러더라.”
무의식적으로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정한 공간을 이야기한다. 이런 것을 심리적 용어로 ‘퍼스널 스페이스’라고 한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에 거리다.’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주변 사
람들과의 경계선을 가진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침범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일정한 물리적 공간을 갖는데 가끔 자기 주변의 일정한 보이지 않는 물리적 공간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며 우리는 가끔 상대방을 위한 말과 행동이 불편함과 상처를 줄 수 있는 이유다. 그것이 상대를 보호해 주고 위한다 하여 충고 아닌 충고를 주지만 받는 상대는 상당한 불쾌함과 상처를 받기고 한다.
어릴 적 책상에 선을 그으며 친구와 싸웠던 이유, 영화관에서 손잡이에 예민해지는 이유, 전철 안에서 서로 닿으면 불쾌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 거리를 거릴 때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불쾌한 이유, 그것은 서로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불편함을 주는 이유, 보이지 않는 영역, 사람과 사람,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1m 안팎의 이 공간은 가깝고도 멀게 느껴지는 거리, 이 거리를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거리감으로 다가가려고 하면 상대방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할 수 있다. 완전한 배려는 존중할수록 가까워지는 나의 마음만큼 상대방을 존중할수록, 나의 공간만큼 상대의 공간을 존중하고 사람이 손을 뻗었을 때 상대방에 닿는 거리라고 한다.
특히 나는 이런 성향이 남들보다 심하다. 그래서인지 남들의 그런 행동에 참 불편함을 여긴다. 그런 만큼 배려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배려하려 애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치고 친해지다 보면 가끔 이런 사람을 만난다. 엄청 자신과 친한 척, 소위 말하는 오지랖 쟁이들처럼 참견질에 위아래 모르고 충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에 많이 지친 적이 있다.
가끔은 내가 손해 보더라고 양보하는 미덕 그리고 덜 갖는 양보는 정해진 사람에게만 있는 것일까?
요즘 나는 내 나이 50이 넘어서 세상 보는 눈이 밝아지고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너무 나이가 들어서 말이다. 약지도 못해서 늘 상처받고 주고도 속상하고 내 것을 많이도 뺏기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유난히 상처를 많이 받는다.
예전에 친구가 너는 좀 사람을 가려서 사귀라고 했다. 그저 다 좋다고 저한테 상처를 줘도 나중에 사과하면 다 받아주고 미안하다 하면 다 용서해주고 어울리고 그런다고, 사람 좀 가려 사귀라고 제발 그러라하고 하는 데도 난 그게 그리 힘들다. 마음이 약한 것인지 바보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사람은 나름 다 단점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다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결국 나중에 배신을 당하고 그 사람의 내심을 알고나서 속상해 하면 언니들이 그런다. “내가 그랬지 넌 내말을 안 들어서 그런 거야. 그녀를 만나면 너 상처받는다고 그랬지 어울리지 말라고 했지.”
그러나 난 그것이 안 된다.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는 이상스럽게 나만 만나면 나의 가진 것에 대한 부러움을 이야기 한다. 나보다 경제적인 면에서 월등하고 외모나 모든 것에 나와 그렇게 비교할 만큼은 아닌데 늘 그렇게 내 것을 부러워했다. 난 그 친구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농담으로 그럼 너의 삶과 나의 삶을 바꿔 달라 기도할래 했을 때, 난 선뜻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가진 삶에 부러워하거나 심지어 큰 키를 가진 것에 대한 것, 나보다 몸매가 예쁜 것에 대해서도 난 부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키가 남들보다 상당히 작아도 살면서 그리 불편함을 느낀다는 둥 나보다 큰 키에 부러움을 산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큰 키를 좋아하지 않는 아담 형을 좋아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잘록한 허리에 자신만이 늘 자랑하는 자칭 오리 궁뎅이라고 하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늘 고민을 하면서도 내 앞에서는 일부러 엉덩이를 실룩, 실룩거리면서 자랑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래 좋겠다.’ 할 뿐 너의 그 몸매가 너무 부럽구나, 이렇게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의 높은 코가 부러워, 너의 큰 눈이 부러워, 너의 그림 그리는 재주가 부러워 등등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부러움을 이야기한다.
그럴 때마다 ‘넌 다른 장점을 가졌잖아, 나보다 훨씬 부자고 더 늘씬하고 잘생긴 남편도 있고’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보다 더 큰 평수에 살면서도 우리 집에 대한 집 방향에 대해서도 부러움을 샀다. 그리고는 가끔 나의 퍼스널 패이스를 침범해 나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였었다. 그래도 나는 그 친구를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야기로 나를 비판했을 때 나는 그 친구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그 친구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빌었다. 다시 새로운 만남이 되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예전 같지 않았고 그녀의 행동은 다시 달라짐이 없이 나에 대한 부러움은 여전하였다. 그리고는 어느 날 연락도 없이 타 지역으로 떠나 버렸다. 많이 속상하고 마음이 상했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그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귀면 그리 친근하게 다가가지 못한다. 내 친동생처럼 내 피붙이처럼 닭살스럽게 가까이 하지도 못하고 아무리 친해도 화장실도 같이 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 친동생이나 부모에게도 살갑게 대하지도 못한다. 그것은 내 성격이고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이 주신 나의 성향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그것 때문에 오해도 받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쉽사리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나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들에 대해 아주 많이 불쾌함을 느끼는 감정이 남들보다 크다. 말이나, 행동이나, 물건이나, 사람이나 생활의 영역 모든 것에…. 가끔은 내가 잘못 되었

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고민한 적도 있지만 고쳐지지 않았고 또 나의 그런 성향이 난 싫지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자꾸만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는 횟수가 잦아지다보니 나를 반성하게 된다. 좀 더 나의 닫아 놓은 공간을 확장 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래도 우리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상대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았음 하는 나의 바람이다. 조금만 더 내 마음처럼 상대를 배려할 수 있다면 그리고 상대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조금만 더 존중해준다면 우리의 미래는 더 밝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상대의 무의식의 공간을 제발 침범하지 말고 조금만 더 존중해 주자.
자신들의 퍼스널스 페이스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