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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소똥령' 외 / 조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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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13회 작성일 16-02-1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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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숙]


스스로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바닷가의 여름
이따금 밤을 틈 타
눈 밝은 집어등이 면회를 왔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며
비 내리고 바람 불고 가을이 왔다.
이윽고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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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똥령


새벽마다 계곡물은 봇짐을 싸서 동해로 가고
무량한 나무들 잠을 털면
여름에 써둔 웃음소리
수평선을 열고 외딴 아침을 길어온다
가끔 멀리 일 나갔던 집어등이
빈 배를 끌고 들어와
지나가는 계절을 앉혀 놓고 밥벌이 이야길 하며
소쩍새처럼 한참을 울다 가는데
겨를 없는 장날
원통으로 팔려가던 소(牛)의 마지막 입김
솔개그늘 아래 누워 아는 체를 한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장신리
추운 밤과 어둔 길을 돌아온 울음 비로소 아늑해지는
동쪽의 작은 고개 소똥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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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풍장


영랑호 옆 동산에 오르면
가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을 삼키며
온몸의 물기들이 집을 떠난
오래된 의자 하나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무덤을 바라보고 있다


한적한 길로 햇빛이 다녀가고
때로 심심한 바람이 머리를 쓰다듬으면
싸리 꽃 지듯 훨훨
설악을 넘고 싶었을 주검 한 채


한때는 무성했을 손자국조차
옛사랑처럼 사라져간 언덕에 앉아
물끄러미 적막을 바라보는데
생살로 느끼던 감촉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바람이 지날 때마다
풀벌레가 대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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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뜬 밤


보름달 뜬 밤
호숫가 산책로 한쪽 가로등이 꺼졌다
건너편 성한 불빛이
애를 쓰고 물을 건너보지만
새로 생긴 어둠에 이내 지고 만다


이야기 속 칠흑 같은 밤은
전깃불 아래 명랑한 사람들을 두고
골짜기로 떠난 지 오래
뒤에 남은 어둠이 변두리에 모여
수레에 담긴 파지 몇 묶음 지키며 갸륵한데
나무들은 명절 쇠느라 고단했는지 잠이 들고
밤벌레들만 캄캄하다고 아우성이다


문득 달빛 내리는 소리
하늘을 보니
처음이라는 듯 여기저기 피어 있는 별들


마른 풀도 살찌는 대보름 밤
호수 위로 삼팔선 그어지듯
한쪽만 가로등 불이 나갔다
신문지만한 어둠으로도 별이 한사발인데
지금쯤 북쪽 하늘엔
쌀알 같은 별들이 지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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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촌의 가을


햇볕도 끝물인 가을날


큰 산에서 나고 자란 열 두말의 도토리
멧돼지가 뒤엎었던 밭고랑 타고
외삼촌댁 마당으로 업혀 왔다


들판을 모조리 들여놓고도
아직 헛헛한 살림살이


도토리 몇 말이면 꽉 차는 마당에서
해마다 가을이면
쌀이며 고추포대들이 사남매를 키웠고
송이버섯과 고사리가 손을 보탰다
세월은 시냇물처럼 흐르고
지금은 손주들이 마당 가득하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식농사만큼은
인근에서 남부럽지 않은 부농이 되었다


뉘우칠 일 없이 칠십 년을 살면서
그렇게 많은 저녁을 물리고도
텃밭에는 아직 익어야 할 끼니가 있어
어스름에도 손이 바쁜데
산마루에 걸린 노을이 그냥 가지 못하고
가만히 더운 손으로 조붓한 등을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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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집에서


입동 무렵


팔아 놓은 들깨 한 말을 들고 기름집에 갔다


씻고 볶고 기름을 짜는 동안


오갈 데 없이 무료한 시선을 잡아당긴


깨순 몇 송이


기름집 문턱


콘크리트 틈에서 갓 깨어나


새파란 시간을 좀먹고 있는 나를


싱겁게 올려다보고 있다


첫눈 오기도 전에 닫혀버릴 세상에서


이제 겨우 몇 걸음 살아낸 허리가 제법 튼실했지만


조금씩 오므라드는 햇살이 안타까워


기름병을 받아 들고


자꾸만 발이 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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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 거라는 말


그녀는 아프지 않다고 했다
유방암 진단을 받은 첫날 아득하던 마음이
몇 날을 흘려보내고 나니 아무렇지 않다고
전화기 너머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내내 높았다


맺힌 사연도 없이
그녀를 알고 지낸지 십여 년이 지났고
일 년에 몇 번 웃음을 나누는 정도지만
나는 걱정과 미안함으로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먼저 안부를 물은 기억도
낯익은 가난을 걱정해준 적도 없이
단 한 번도 뭔가를 이겨본 적 없을 것 같은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함부로 건넬 수가 없었다
다만
누군가 먼저 했을
누구나 해줄 수 있는 말만 주문처럼 되풀이했다


괜찮을 거라고
정말 괜찮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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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기형도의 「빈집」을 읽으며
나무랄 데 없는 아홉 행에 대해
그것 같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한나절이 지나도 떠오르지 않는 그것
나는 장터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막막했다


아주 몸을 버린 것 같진 않은데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


요즘 들어 내 머릿속은
좀도둑이 훑고 지나간 초가집 같다


돌아보면 자주 써먹은 낱말들만
뼈대로 남은 기억의 집
언젠가는 더 많은 그것들이 집을 떠나
한뎃잠을 잘 것이다


이렇게 대책 없이 시간을 흘리다가
어느 날 문득
내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으면 어떡하나


더럭 겁이 나는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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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후가 없다


벽에 무언가를 걸어 놓지 않는 편이다
벽지의 무늬와 벽과 벽이 닿아 만들어내는 모서리와
고요하고 고유한 구석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집에
옛 주인처럼 버티고 있던 못 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그냥 두면 무럭무럭 자라서
외벽을 뚫고 독립만세라도 부를 것 같아
일을 맡기듯 인공화초를 걸어 주었다
벽이 못을 붙잡고 못이 줄을 잡아당기며 생겨난 환생
마침내 서로 든든한 배후가 되었다
삶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게
저렇듯 누군가 온 힘을 다해 붙잡아 준다면
인공풀잎도 외마디 탄성 같은 꽃을 피울 수 있을텐데


적막과 지리멸렬로 지은 집에 세 들어 산다
기억 한편 허물어져 못 자국 희미해진 저녁
줄 매였던 자리 가만히 만져보면
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슬픔이 배어나온다
천장에 일렁이는 수줍은 밀어도 없이
낙엽의 꽃말을 궁구하고
일인칭의 희망을 적어 구겨버린 종이 파다한 집에서
최소의 눈물로 잠들 때까지 바라보는 풀잎
그러나 오래된 사랑은 봄눈처럼 힘이 없고
나는 오늘도 쓸데없이 젊어서
구석에서 구석으로 마음을 밀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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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리라


동해바다처럼 살리라
세상은 넓다고 하루 종일 밀려오는 말씀
몸은 비록 이곳에 살아도
이 세상 모든 곳에 닿아 있는 큰 마음으로
아침마다 뜨거운 열정 한 덩이 건져 올리는
지치지 않는 정신으로 살리라


설악산처럼 살리라
갈참나무와 물푸레나무와 소나무
다람쥐와 멧돼지와 크고 작은 산새들
너와 내가 한 몸이라며 낮은 곳으로 흐르는 계곡물
천형처럼 무거운 바위들까지
모두 품어 길러 내는 넉넉함으로 살리라


영랑호처럼 살리라
민물도 바닷물도 아닌
설악산이며 동해바다인 혼혈의 시간이 천 년
세상의 짠맛 미리 알아버렸어도
거품 물고 악다구니 한 번 써본 적 없이
가슴속엔 눈 맑은 잉어떼 기르며
댑바람에도 고요한 평온으로 살리라


나 그렇게 살리라
늘 깨어 있는 머리와
젖 물린 어미같이 따뜻한 마음과

밤마다 호숫물에 몸을 씻고 가는 별들의 노래가 되어
바다처럼 산처럼 호수처럼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