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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사막을 건너는 방법' 외 / 이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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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68회 작성일 16-02-15 21:57

본문

[이진여]


울타리로 살아도 좋겠다
몇 십 년에 걸친 가을앓이도 잊을 듯
어화둥둥 내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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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건너는 방법


전쟁은 계속 되었구요
폐허가 된 침대자리에는 사막이 들어앉았네요.
덩치 큰 집에 갇혀버렸어요
고마워요, 하마터면 깔릴 뻔했다니까요.
깜깜, 길 없는 문을 두드리며 생각했어요,
투명껍질을 갖고 싶다구요.
낙타 등에 있는 짐들을 버려,
누군가 소리쳐요 알아요, 안다니까
사막을 건너는 방법이 아주 쉬웠네요.


남편의 숨쉬기는 여전히 세 박자예요.
들숨, 날숨, 한숨


문 좀 열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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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동
― 수복로는 어디로 갔을까


  수복탑 돌아 법원 앞 아름드리 은행나무 언덕 지나 철둑길 이르
면 오래된 의자들 볕 놀이하던 골목
  몸 부비던 담장들과 하늘 깊은 지붕들 재재거리고 자동차들 덜커
덩 먼지를 일으켜도 의자들은 따뜻했다


  환한 백목련, 녹슨 철대문과 대문을 감싸 주던 분홍찔레를
  몇 번의 덤프트럭과 포클레인이 깔아뭉개고
  골목을 내다 버릴 때
  텔레비전 옆 흑백의 젊은 남편과 어린 아들을 닦고 또 닦던 함흥
댁 꿈과 낡은 의자와 볕들 뿔뿔이 흩어졌다


  그해 여름 새로 심은 백일홍 가지에 보상금 받아 산 집터가 잘못
되어 계약금을 날렸다는 반장네 이야기가 붉게 피고
  계절마다 바꿔 심는 도로 옆 꽃밭에는 은행나무 노란 울음이 펑
펑 쏟아지는데
  배 나갔다 다리불구가 된 아들과 폐지를 줍던 백발의 어머니가
이사 간지 삼년이 채 못 되어 차례로 골목을 따라갔다는 소식도 들
려왔다


  철둑길에 다시 선로가 놓이면 제일 먼저 북에 닿고 싶었던 수복로
  백골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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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 아마이 1
― 혼인


촉촉한 대지에 스며드는 햇살처럼
서로에게 닿아 길을 내는
수줍은 사랑이 시작되네


귀밑머리 풀어 마주하는 한 세상
흙속에 길을 낸 그대의 따스함으로
새싹 돋아 꽃 피우며
캄캄 어두운 길도 어울렁더울렁
흘러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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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 아마이 2
― 6.8 해일


막막한 어둠
천 길 낭떠러지다


바다를 찢어 놓은 검은 바람이
볼모지에 뿌린 삶의 씨앗을 할퀴고 봄을 빼앗고
어둠을 토해 놓았다
눈물도 말라 아득히 무너져 내리는데
바다가 거두어 간 나의 하늘
나를 버린 내일이여


어둠의 터널에 정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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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 아마이 3
― 오늘


마음 속 꽃들 지우고 나면 외로움 끼니처럼 보채고
기웃거리는 남루 앞에서 온몸을 쏟아 저녁을 불렀다
젖은 발로 그에게 닿고 싶은 날은
몸을 떠나 삭혀지는 젓갈처럼 마음을 떼어 삭히던 세월


사무친 그리움을 명치끝에 매달고
슬픔을 밟고 오신 어머니


마디마디 헐거워진 몸과 까맣게 태운 그 속을
파먹으며 나 여기에 있네


평생을 읽어도 다 읽지 못할 거룩한 경전 한 권
이제야 가만가만 어머니를 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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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속초 1
― 항도여인숙

개락일세 도루묵
경상도에서 시집 온 새댁 사글세 댓돌에도 한 그득
그 새댁 비린내 입덧 꾸역꾸역 앓아도
내심 말 못하는 정이었네


명태 내장 산더미라 흥청
항도여인숙* 꽃피네
만선의 배 부려 놓고 방석집 술 두어 상자쯤 거뜬히 비운
뱃사내 호기로움 뜨끈
휴가 나온 김일병과 애인도 뜨끈
젓가락 장단 치는 앳된 꽃각시들
노래 가락 애달파


양미리 그물 항구 뒤덮히면
등대 아래 허름한 집들이
허리가 꺾인 아낙들을 우루루 게워낸다
밤이면 깡통모닥불 뜨겁게 타오르고
젖은 장갑들이 비린내들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데
눈이라도 쏟아지면
하늘과 바다, 그물과 양미리와 사람의 경계가 없어져서
질긴 가난도 잠시 저를 내려놓는다


봄 그물에 숨어 온 칼바람
바닷가 언덕의 해당화들이 이제 막 눈 뜨는 몽우리들을
슬쩍 당겨 앉고

파도가 하얗게 배꼽을 뒤집어
그 속에 품고 있는 것들에게 봄을 알리면
감자다라이 머리에 이고 보리쌀 바꾸러 나오신 산골댁
긴 그림자 끌고 간다


*항도여인숙 : 속초 시외버스터미널 옆 오래된 여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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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속초 2
― 쌍둥이슈퍼


연탄재 쌓인 항도여인숙 지나 쌍둥이슈퍼*
화투 소리 환하네
눈부신 기억들 패를 맞추네


정월이라 산더미명태 젓갈바람 좋을시고
이월이라 눈물바람 님 기다리는 꽃각시바람
사치로구나 그리움 눈물로 녹여내네
삼월에는 훈풍인 듯 그물손질 바느질 바람
붉은 띠 심장에 두르고 꽃바람 나는 삼월이네
옛다 받아라 홍단이다
사월이라 흑싸리 제비새끼들 주둥이 같네
보릿고개 멀거니죽 애달프다 고픈바람
보리누름 보리서리 까만입술 오월일세
유월이라 타작마당 섶섶가시 방구바람
푸성귀 먹고 푸른바람 별총총 칠월이네
팔월이다 추수마당 오징어 풍년 한가위 바람
구월이네 꼬실꼬실 햇살바람 말랭이바람
시월이라 김장바람 문풍지 사이 갈무리바람
유월목단 구월국화 시월단풍 다 묶어도
다섯 끗 청단이다 가다 섰다 쉬어 가자
도루묵바람 양미리바람 비린내풍성 어여쁘다
만선바람 좋을씨구 어화둥둥 내 사랑아


*쌍둥이슈퍼 : 속초 시외버스터미널 항도여인숙 옆 오래된 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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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저녁을 먹다가 우루루
텔레비전 앞에 몰려 앉는다
‘아내를 죽이고 그 아내가
살아나서 전 남편을 유혹한다는’


공화국 아줌마들은 드라마를 믿는다
죄와 가난을 뜨겁게 껴안고
불륜과 사랑의 미로를
기꺼이 헤매다
눈물과 욕설을 아낌없이 바친다
콩쥐와 팥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슬픔과 아픔을 목청껏 찬양하고
부자와 흑기사를 열렬히 연호한다
호기심 천국의 세익스피어
유리 구두 한 켤레쯤은
오뉴월 햇볕 한 움큼으로 간직한
사랑스런 주인공들이다


대한민국은 드라마 공화국이다
이지러진 그믐 꽃불축제
외사랑 깊어
相思病이 성을 태울라
물대포를 날리는 드라마
로텐더홀 철새들의 질펀한 정사현장
고매한 안방마님 기둥서방들이

들이닥치는 흥미로운 줄거리다
외면의 절정 배반의 장미
드라마의 드라마에 의한 드라마를 위한
자랑스런 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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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부친다


오늘과 내일이
다를 것 없는 새해를 맞으면
미루고 외면하던
세상의 모든 아픔들이
와 몰려들어
오는 해를 막았으면 싶다가도
새날이라는 ‘새’에 가느다란 희망의 끈
슬픔처럼 걸어보자


시절의 심장을 향해 던지고 싶은 분노
눈물처럼 돋아나는 가시들
모두 쏟아내어
음지의 눈 녹아 땅속으로 스미듯
어린 나무의 뿌리에 물방울로 보내고
아픈 만큼 어둠을 쓸자
추운 별들의 안부를 묻고
외롭고 서러운 것들에게 술도 한 잔 건네자*


동해에 들어 앉아
부끄러운 몸을 씻고 떠오른 해야
새 이름으로
밝아오는 그대 맑은 낯빛 한 자락 품고
서로의 가지를 가만가만 보듬어
햇살을 풀자

가슴을 열자


*전동균 시집 『거룩한 허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