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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모래알 경계' 외 / 조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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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57회 작성일 16-02-15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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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외순]


훈춘 가는 길
변화를 두려워하며 갇힌 등 떠밀었다.
온 몸으로 부르고픈 애국가 4절
백두산 천지에 푸르게 담아 놓고
햇살이 미끄러지는 초록 융단 위
한 송이 바람꽃이고 싶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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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 경계


너와 나 사이에
험상스레 드리워져 있는
저 콘크리트 담장이
잘게 부서져 모래가 되어
햇볕에 반짝이는 모래알이 되어
우리들의 경계가 된다면


그 모래 위에
예쁜 사탕바구니 놓아두고
오고 가다 경계에서 만나면
달콤한 사랑 서로 나누면서
모래담장 너머 하늘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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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


바람의 흔적 푸르게 젖은
저 고요한 늪지에, 누가
고소한 비스킷을 펼쳐 놓았을까


물잠자리 나래 쉬다 한 입 베어 먹고
청개구리 통통 건너뛰다 한 입 베어 무는
물 깊도록 진한 고소함


고니의 날개깃에
10월이 묻어오기 전
여름 햇살 자자히 바스대며
1-1-1-1
암호의 해독을 푼다


일 년을 기다린
단 하루
1센티 흰빛으로
홀로 피기에는
기우는 붉은 사랑이 아직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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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산아!


너 술 마셨니?


나도 너처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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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 한 마리
백두대간 툭 불거진 힘살
설악의 겨울을 난다


날선 잔등
하얀 설원을 지우며
동해를 향해 뿔을 세울 때


훅!
내뿜는 쑥향기 단김에
봄으로 젖어 내리는
속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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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누가 심었는지
궁금해 하지 마세요
언제 뿌리 내렸는지
물어보지 마세요


가슴 데이던 붉은 빛으로 타다
추억으로 지고 나니
허공을 찌르는 가시가
우두둑 아프네요


해마다 오월이 오면
슬그머니 멀어진
첫사랑 상처가, 핏빛으로
피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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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폭포


아득한 사랑이다
간절함을 읽고 가는 뜨거운 시선 하나
태고에 운명 지어진 마주보기 하늘사랑


연록으로 번지는 봄 얼룩 아래
야위어 드러난 거친 골
감추고 싶은 사랑의 흔적이 깊다


드문드문 오던 비 소식
세월 깊은 탓에
먹장구름 빈 엽서만 오다가다


기다림의 시간들
하늘계단 아슬히 올라
푸른 멍울 솜털구름으로 보듬어 안으면
몇 날 며칠을 울고 갈 여름


속 깊은 토왕성폭포가 말문 열어
사랑도 순리가 있는 법
푸른 솔의 뿌리가 드러나고
바위가 굴러 깨어진다며
하늘의 눈물 한 동이 퍼붓는 날


허공으로 흩어지는 물보라
사념의 손을 거두어

말 없는 설악의 줄기 타고
끈끈히 눌러 내리는
정 많은 여인네의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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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어린 꿈을 키우던 뿌리를 찾아
머나먼 이국으로 돌아드는 길
투박한 조선족의 말투는
옛정 그리운 어머님이 계신가


잔잔한 운해 감아 도는 백두
물결 흐르다 멎으면
하늘 허공 속 봉우리 섬이 솟아나고
명산의 위엄
굽이진 길목 매서운 호령으로 반긴다


깎은 듯 바람길 매끄러운 능선
요동치며 오르는 길
차창의 경계 너머
제 몫 진 자리에서
이름조차 묻지 못한 흐드러진 야생화
뜨겁도록 붉은 정 송이송이 피었건만


사슬 되어 얽어 맨
길게 늘어선 인간 띠 줄
낯선 타국의 입김만 뜨거워


백두산 천지
깊은 역사를 품고
맑은 물비늘 반가이 일렁일 때

대한 여의주를 입에 문 용 한 마리
슬픈 눈을 들어
푸른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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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늘어난다
55에서 60으로
가위질 한 번에 똑 끊어질
탄성 잃은 새까만 고무줄계약직 정년


베이비 부머 물결이 넘치고
힘든 일을 거부하는 젊음이
미련 거두며 떠나간 자리


45센티 둥그런 원판 위
10분의 화기를 고스란히 받아낸 피자
희망이 꿈꾸는 노후를 얹고
열 손가락 정성이 눌러 주는 12조각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스 두 개 추가
화부의 기억에서 가물가물 지워질 즈음
쥐 파먹은 듯 구멍이 뻥 뚫려 되돌아 온 피자 한 덩이
주둥아리 묶인 비닐봉지 속은 이슬로 촉촉이 젖고
뜯겨진 심장을 두고
시급 5580원이 부르는
죄송합니다 노래가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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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장


붉은 벽돌 사각의 이를 맞추는 꼭짓점
고요한 여름밤의 줄기를 단다
스파이더맨이 수십 만 번 돌고 갔음직한
출렁거리는 그물망의 네 귀를 잡고


바람이 집 잃은 먼지를 불러다
줄었다 늘렸다 숫자놀이를 반복하고
열기로 수군거리던 낮달의 숨구멍이
들락거리던 방충망 사이로
‘산화로’라는 주소지 길을 넓히고 있다


가을이 깊기까지
산 들 숲의 이야기들이 윙윙 걸어 들어와
붉은피톨 당도를 이야기하며
세포의 등허리
소복소복 상처가 붉어


밤마다 가려운 세상 일
담장 너머 쉬어가라 풀어놓고
끈적이는 인연 속을 떠다니는
테 안의 이란성 쌍둥이
촘촘히 얽어진 어린 기억들
모티브 코를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