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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겨울 플라타너스' 외 / 양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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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76회 작성일 16-02-1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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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덕]


찬바람이 붑니다.
몸이 추운 것보다 마음이 더 시리네요.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아쉬움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감사한 일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이제 나도 남은 시간 조그만 사랑이나마 베풀며 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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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플라타너스


마디가 뭉뚝한 손가락들
줄 지어 서 있다
억척스레 살아온 삶 자랑하며
당당한 몸짓으로


올망졸망 어린것들 먹이고 가르쳐
어엿한 어른으로 키워낸 두 손
두툼한 통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피어오르는 욕심
손가락 사이로 흘리며
바람처럼 지나간 삶
침침해진 눈으로 돌아본다


터져버린 뚝 막아내느라
허리 굽혀 밤 새우던 일
날만 새면 나고 자란 풀들에게 선물한
수십 바가지의 비지땀
주렁주렁 결실한테 보냈던
파안대소를 추억하며


오늘도 추운 거리 한 켠에 서서
활짝 주먹을 펴 보이는
늙은 농부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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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라벤더


잿빛 구름 자꾸 몸을 누르지만
누르스름 창백한 꽃대
꼿꼿하다


냄새마저 삼키고
굵은 빗방울에 서로를 기대어
안간힘을 쓴다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라벤더는 그의 마지막을 생각한다


보랏빛 진한 향 한 방울도
아이스크림 속에
비누 그리고 화장품에게 나누어 주느라
뭉그러져 갈 몸뚱어리


남은 몸의 일부마저 바짝 말려져
벌레 쫓는 독한 향기로
바스러져 갈 것이다


라벤더는 빗속에 조용히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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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순애보


얼마나 좋은 걸까
잠시도 쉬임 없이 껴안고 있다


여름에는 수만 개의 잎을 피워
태양을 가려 주고
겨울이면
지난 밤 참새들이 찍어 놓은 발자국 따라
멀리 팔 내밀어 안아 준다


세찬 빗방울도 맨 몸으로 견디며
휘몰아치는 눈보라도 그 사랑 막을 수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삶의 가닥 가닥을 함께하며
호흡 없는 담벼락에게
생명을 입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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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마당
반쯤 열린 대문 옆에
복수초가 피었다


겨우내 하얀 눈에 짓밟혀
땅에 닿을 듯 피었다


세상 떠나는 이들에게 온정을 나누느라
몸이 작아져버린 어느 수녀님처럼
가녀린 몸으로 차가운 땅 녹이며
희끗희끗 눈밭에서
노란 웃음 환한데


미시령을 넘어가던
겨울바람 찾아와
가만히 등을 토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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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대 소나무


하늘 올라가는 마고선녀 바라보다
바위 틈새기에 빠져버린 씨앗 한 톨


장군봉 허리춤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구름그림 쳐다보며 뒹굴다가
바깥세상 궁금해 고개를 내밉니다


너럭바위에 누워 달마봉 바라보는 신선들처럼
맑고 서늘한 물줄기
풍덩 담겨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건만
저들끼리 도란도란 흘러갑니다


세월보다 더디게 자란 몸
형제봉 솔가지들과 키재기 하다
이름 모를 새소리에 잠이 듭니다


동이 채 트기도 전
먼지 냄새 풍기며 선잠 깨우는 발자국 소리
마음 한 조각이나마 칼칼이 헹구고 가라고
갓 지은 솔향 한 줌 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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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벗꽃


소복한 여인들
산을 내려온다


남편을 잃은
아들을 보낸 허깨비들
헝클어진 머리마냥
옷매무새도 허술하다


마흔도 못 넘긴 삶이
차마 안타깝고 허망하여
자꾸 무릎이 꺾인다


눈길이 닿는 저 아래 집이 보이건만
촛점 잃은 눈빛 안타까워
떨어지는 꽃잎 하나 하얀 나비 되어
한 발 앞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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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버드나무의 임종


머리를 산발하고 벼랑 끝에 선 여인
자식이라도 잃은 걸까
슬픔을 온몸에 걸치고
실바람에도 몸을 가누지 못한다


고개를 수그린 채 하염없이
아픔을 토악질해보지만
헝클어진 머리마냥
갈갈이 찢기우는 가슴


붉은 노을 어깨에 지고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선 그 몸을
스멀스멀 저녁의 품에 감춘다


내일이면 불도저에 밀려 사라질
마지막 남은 검은 흙더미 위
버드나무 한 그루 아슬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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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고 대지


언제쯤이었을까
대지는 그 몸에서
무언가 빠져 나가는 것을 알았다


엄마라고 불리울 때쯤
비로소 그 몸이 조금씩
박토가 되어감을 보았다


열매가 자라 탐스러워질 때까지
엄마는 그가 대지인 것을 몰랐다


삶이란 이렇게 결실을 위해
서걱서걱 모래알이 되어가는
한 조각 지구인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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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날다


금속 날개 달고
눈이 시린 하얀 구름바다 건너간다
자석에 끌리듯 보이지 않는 길 찾아
조심스럽게 날갯짓 하며


희뿌연 물안개 큰 산을 삼켜도
이무기 몇 마리 숲속에 기어들어도
남 일처럼 아랑곳 하지 않고
부릉거리는 요동에 들려
커다란 몸 하늘을 난다


나이와 존재를 고도 따라 조금씩 흘리며
행복한 백치가 되어 낯선 세상 찾아
지구를 돈다


옛날 책에서 보았던
반짝반짝 달아버린
동로마 골목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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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과 고열


입원한 첫날밤
통증과 싸우느라
알 수 없는 시간과 씨름하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 들린다


누군가 또 한 사람
육신의 아픔을 이겨 내느라
안간힘으로 내뱉는 신음소리였다


나눌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고통
오로지 그 몸으로 흡수하며
온힘 다해 쏟아내는 울부짖음


적시고 또 적시어도
자꾸만 타들어가는 혓바닥
정신줄 놓아버리고 싶은 고열과 괴로움에 들뜬
그와 나의 마음에 퍼렇게 살아 있는
오직 한 가지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