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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리필― 카페에서1' 외 / 정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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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88회 작성일 16-02-15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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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애]


딸을 키우면서 늘 조그맣게 울었다.
어른이 되었을 때 이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막막해서.
키 큰 나무가 많은 시골에서 커피가게를 시작하며 우리 식구는 단단해졌다.
딸은 도토리처럼 야물어 가고 아들은 든든한 소나무로 푸르니.
올 한 해 숲속에서의 새로운 시작이 주~욱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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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필
― 카페에서1


카페 구석자리가 먹구름이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 침묵으로 식어가고
마주 앉은 남자와 여자사이엔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다
이윽고 여자에게서 비 냄새가 났다
남자가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당긴다
어두운 숙명을 받아들이듯 여자가
검은 눈물을 마신다
빈 컵으로 걸어와 리필을 청하는 여자
그녀의 목소리에 모래바람이 묻어 있다
검은 돛배가 놓인
그녀의 고비를 같이 넘어가듯
나는 한 잔 가득 따뜻한 슬픔을 부어 준다
재회인지 이별인지
밤늦도록 빈 잔으로 앉아
어느 길로도 가지 못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와 여자
나는 계속 슬픔만 리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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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
  .
    .
 잘못 끼운 생이
 삐
   딱
     하
       게
 저문다


지금
안간힘으로 매달려 있는
너는
마지막 단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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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


이제 막 젖을 뗀 강아지
품안에 안고 있으니
따스한 털실 한 뭉치다
아직 짖지도 못하는 개의 순한 새끼
고물고물 내 뒤를 따라오며
제 이름 쓰듯
손가락만한 꼬리 연신 흔들어댄다
늙은 개처럼 나이 들어가는 나를
어미처럼 바라보는 강아지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여리디 여린 세상의 모든 새끼들을 생각한다
이렇게 몽글거리는 한 줌의 햇살 같은 몸뚱이를 두고
어느 인간이 화날 때마다 강아지를 들먹거렸는지
나도 모르게
그 인간을 향해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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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 카페에서 2


계산대 앞에서 여자들이 몸싸움을 한다
오늘 커피는 내가 산다며
서로의 가방을 움켜쥐고
지갑도 닫아주고
신용카드도 막는다
풍만한 몸들이
몸부림치는 이 훈훈한 광경


결국
악어가방을 든 여자가
한 무리의 수장처럼
빳빳하게
커피 값을 모두 계산했다
우르르 자신들의 가방 문을 닫으며
접시꽃처럼 자리에 앉는 여자들


영수증을 받아 든 여자의 눈빛 속
번쩍
악어 한 마리 솟아올랐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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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나는 백숙을 먹자 하고
아들은 치킨을 먹자 한다
집을 나서서 먹는 닭과
전화 한 통으로
안방까지 배달되는 닭을 두고
아들과 나는 팽팽히 멀어진다
양계장에 갇힌 닭은
죽음을 위해 묵묵히 모이를 쪼는데
우리는 주검의 맛을 놓고
반나절을 옥신각신하였다
이름 하나가 길들여 놓은 배반의 맛
입맛의 거리가 너무 멀어
실랑이 계륵처럼 쌓이다
꼴깍 해가 졌다


백숙과 치킨 사이
닭 한 마리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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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막,
라면을 먹으려는데 전화가 왔다
친구는 대학시험 보는 딸 이야기와 물가 이야기
갈수록 쪼잔해지는 남편과 드라마 이야기
끝내는 연예인의 이혼이야기까지 거품을 물다
자세한 것은 만나서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젓가락 걸쳐놓았던 근 한 시간
잡담처럼 불어 있는 라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면을 불게 한 것은 물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내 몸도 잡담으로 보낸 시간들 고여
지금 이렇게 다 식고
푸욱 퍼져서 맛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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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착제의 역사


티브이를 본다


공터 한 구석, 앙상한 개 한 마리
한 달 넘게 헌 종이상자 앞을 지키고 있다
수시로 상자 속을 들여다보며
따뜻하게 새끼를 핥아준다
먹이를 던져 주어도 꼼짝 않고 상자 앞을 떠나지 못한다
자신을 버린 주인을 기다리듯
배반을 모르는 충직한 가문의 피로
세상을 경계한다
구석구석 울음으로 흐르는 모성의 뿌리
결국 구조대가 출동했고
상자 속 새끼는 이미 죽어 털 거죽만 남아 있었다
납작한 주검에 수없이 더운 입김을 불어 넣으며
엄마의 자리를 떠나지 못한
지독한 모성
나는 눈물대신
베란다 구석 깡마른 화분에 물 한 컵 부어 주었다
저 나무도 제 몸을 붙들고 올라오는 여린 꽃대 때문에
수십 개의 발로 흙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몇 번이고 문턱을 넘고 싶었던 순간
젖꼭지 물던 아이의 푸른 눈망울에 걸려
나도 슬그머니 옷가방 놓았던 적 있다
왜 모든 여자에게는 모성이라는 접착제가 있는지
쉽게 엄마를 벗지 못하는 암컷들의 역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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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없는 장미


블랙나잇을 듣는 밤
딥퍼플*,
장미 한 송이 꺾어줘요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다고 한탄했던
그를 불러줘요
화농으로 욱신거리는 그의 시에
입 맞추고 싶어요


검은 밤에 피어나는 딥퍼플
자존심을 버린 여자
조화처럼 웃으며 제 이름 부끄러워하네요
이제 사랑하는 연인에게 장미는 바치지 말아요
장미 가시에 죽은 그가
언제나 낭만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웃지 말아요. 활짝
무덤 같은 거리, 장미의 이름 던지며
아무 가슴에나 안기는 딥퍼플
울지 말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 딥퍼플 : 1) 영국의 록밴드,
2) 우리나라에서 개량한 가시 없는 장미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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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복


여름은 더웠다


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욕설로 번들거리고
우리는 작당을 하듯 둘러 앉아
탕 5인분을 시켰다
땀구멍으로 비집고 나오는 살기를 감추고
다대기에 겨자며 들깨를 섞어 입맛을 다셨다


신앙처럼 믿고 싶은 복(伏)날
새끼 품은 한 마리 짐승
한 무더기의 생을 벗어 던진 채
번뜩이는 눈알로
아직도 달리고 있는지
잠시 냄비가 기우뚱거린다
어디선가 꼬리치며 스치던
인연의 화사한 기억을 씹으며
우리는 건달들처럼 소주 한 잔씩 좌악 돌렸다
순교처럼 잦아드는 국물
문득 목구멍에 걸리는 울음소리
모인 사람들 모두 불콰한 얼굴 감추며
염치없게도 건배를 했다
― 위하여 ―


폭염 속 나는 자꾸 흐르는 죄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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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한 쪽을 떼어낸 그녀가
한 쪽 가슴만 안고 가을 속으로 떠났다


두 아이가 한창 재롱떨 때
바람난 남편
그녀는 두 아이를 가슴에 안고 버텼지만
술집여자의 재롱에
눈 먼 남편
술집여자는 끝내 안방을 차지했다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가슴에 술을 붓고
눈물을 붓던 그녀
뭉텅뭉텅 빠진 생의 그리움들을
다 받아내지 못한 그녀의 가슴
벚꽃잎 흩날리던 황폐한 봄날
남편과 술집여자를 안았던
왼쪽 가슴을 도려내었다


머리카락 없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쪽 젖이 없으니
몸도 자꾸 한쪽으로 기운다고 했다
기울다 기울다
끝내 어디에도 없는 계절 속으로
걸어간 그녀


친구야, 곧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