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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오명(汚名)' 외 / 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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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66회 작성일 16-02-15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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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숙]


1학년 아이들이 쓴 동시 속에서
가을을 줍는다.
소풍, 참 좋은 계절, 단풍잎,
허수아비, 참새, 고추잠자리…….
아이들의 눈에 비친 가을 풍경이
한 폭의 맑은 수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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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汚名)


나의 집은 화진포 해양박물관 수족관
이름은 거대 조개
거대한 몸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죠
집 구경 온 사람들이 나를 식인 조개라고 불러요
몸집이 크다고 사람을 잡아먹나요? 그건 단지 오해일 뿐
그래서 오해 풀어줄 해명 수족관 한편에 걸어 놓았죠
우리는 잡식성이 아니라 철저한 채식주의라는 것
우리들 입속에서 발견된 사람들의 팔과 다리는
지레 겁먹은 잠수부들이 허겁떨다
다리 하나 팔 하나 우리 집을 침범했고
놀란 우리들은 침입을 막기 위해
문을 닫았을 뿐이라고
변명 아닌 해명을 안내판에 적어 놓았죠
그런데 왜? 자꾸만 식인조개라 부르죠?


전설이 만들어낸 오명 앞에서
거대함을 벗어 던진 우리들은
주어진 자리에 짐이 되지 않을 만큼만
성장하는 법을 연구 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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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 주의보
바람이 수상하다
경계를 늦출 수 없는 나무들
떠도는 불안을 염탐 중이다


책축제 행사로 시끌벅적했던 어제의 기억이
메르스의 불안으로 남아 있는 빈 교정
짙은 안개 속, 감추어진 진실에 대해
바람은 침묵하고 있다


고열의 모래사막을 휘돌다
낙타를 타고 건너왔다는 불안은
무책임한 초기 대응과
허술한 관리를 비웃으며
낯선 땅을 헤집고 다니고
안개 속에 가려진
불안의 실체를 놓친 매스컴은
대안 없는 주의 경보만 울려댄다


기준 없는 휴교령에
아이들 사라진 텅 빈 교정엔
수상한 바람만이 풍문을 뿌리며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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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시 25분


어둠이 짙은 어둠 속으로
숨죽이고 스며든다


허공을 뒹굴던 생각들은
시계바늘 위에 올라 앉아
톱니바퀴의 수를 세고 있다


길 잃은 시간은
무언의 음모를 꾸미고


음모의 희생양이 된 생각들은
먹고 먹히며
몸 불리기를 한다


혼자놀이에 지친 어둠은
새벽을 향해
느린 걸음을 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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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4


하늘이 운다
우는 하늘 바라보다
땅도 함께 운다


웅덩이 속을 첨벙이던
뒤섞인 눈물
한 몸 되어 흐른다


고인 눈물 비워낸 하늘은
언제 울었냐며 활짝 웃고
멋쩍은 땅, 남은 눈물 서둘러 삼킨다


누군가
물기 남은 허공에
무지개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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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평탄치 않았을 강물의 긴 여정
이제는 쉬고 싶다고
정말 힘들었다며
투정 부리는 강물
혼탁하다고
냄새난다고
되돌려 보낼 수 있겠는가
가슴 파고드는 강줄기
제 품에 묻을 수밖에
그러나 때론 바다도
온전히 품을 수 없는 강줄기가 있어
울음을 토해낸다


귀 막아도 들려오는 파도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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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남대천 둑길
일개미 한 마리
자기보다 몇 배나 큰 먹이를 나른다


소풍 가는 발들의 행렬
거대한 병기들이 행군 중인데
먹이를 놓지 못하는 개미는
저벅이는 신발 틈새를
갈팡질팡 아슬아슬
턱을 앙다물고 제 길 간다


비켜가는 순간,
그 찰나의 결정은 신께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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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걸음


새 한 마리
목련나무 가지에 앉아
울고 있다
아기 주먹만 한 몸집
어디서 그리 큰 울음 나오는지


왜 우냐고 물었더니
콩알만 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
더 높은 가지로 올라 고개 돌리고 운다
혼자 두고 가기 걸음 무거워
자꾸 돌아보는데


퇴근 길 나보다 앞서 온
우리 반 작은 고추, 울보 싸움 대장이
나뭇가지에 앉아 울고 있다
하루가 버겁다고
품어주지 못했던 아이의 설움이
목련나무 가지에 앉아
내 발길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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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놀이


노란 병아리들
어미닭 따라 꽃놀이 갑니다


현산 공원
병아리들 재잘거림에
귀 세우고 달려 나온
만개한 꽃나무 앞에서
환호성 지르는 병아리들


유괴를 모의한
꽃잔디, 민들레, 개나리, 진달래,
벚꽃과 목련은
온갖 몸짓과 향기로
병아리들을 유혹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병아리 걸음 쫓다
꽃비 흠뻑 맞은 어미닭은
살랑대는 봄바람에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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