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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길은 멀었다' 외 / 송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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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25회 작성일 16-02-15 22:32

본문

[송현정]



아직도 익어지지 않는
그래서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익히는 중입니다
오래 묵힌 된장 맛이 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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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멀었다


배롱나무 꽃이
환장하게 피었다는 풍문을 듣고
늘 다니던 길 등지고 꽃길로 들었다
꽃향기 따라 마냥 걷다 보니
너무 멀리온 길
돌아갈 길 아득하다


휴대폰도 안 챙긴 빈 몸으로 나왔으니
누구를 부를 수도 택시를 탈 수도 없어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
환하게 꽃등을 내 건 배롱나무들


문득
내 걸어온 길 뒤돌아본다
길 넘어 길이 궁금해
단순한 비상을 꿈꾸고
함부로 떠난 죄가 몸속으로 들어와
관절로 퍼지는 시퍼런 노독(路毒)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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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재우다


밤새
불면으로 뒤척이다
내가 나를 재운다
토닥토닥 자장가를 부르며


어머니가 나를 재웠듯
그리고
내 아이를 재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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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들다


거처가 어딘지도 모르는 바람이
내 몸속에 둥지를 틀고
야금야금 구멍을 내고 있다
흔들림이 많았던 날을 지나오면서
바람과 맞섰던 아픔의 흔적들
젊은 날의 상처는 아름답다지만
즐거움과 고뇌를 동반한 삶의
깊어진 주름만큼이나 굳어진 뼛속
오래된 무처럼 바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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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 배롱나무


천년 고찰 천은사 마당에
배롱나무 한 그루


선승처럼 묵언 합장하고
삼매경에 들었다


수백 년 넘나든 고목에
나이테를 앉힌 바람의 흔적들


세월의 무게를 켜켜이 두른
당당한 나무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나의 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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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기억


내 속에 너를 지워버린다면
텅 빈 가슴
무엇으로 채울까


삶의 풍랑을 만났을 때
눈물과 좌절의 일렁임들을
보듬어 주었던 여정의
시간들을 간직하고 있다


흘러가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라
아픈 세월의 앙금도
따뜻한 추억의
기억들로 채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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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동백


어쩌라구요
송두리째 져버린 지도 오랜데
이제 꽃을 피우라니요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
세월 속 투정은 잎새에 접었는데
처절한 붉은 꽃잎과 노란 꽃술이
제 빛을 나누는 동안
아픔 삭인 저 옹이들은 어쩌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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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는 없다


삼복 더위에 너무 더워
문을 죄다 열어 놓고 잤더니
잠결에 목이 아파 문을 닫는다


세상 참 공짜는 없다
시원한 바람 한줌 줘 놓고
내 몸 일부를 달래는 게 아닌가


새벽잠 깨우는 새 소리 매미 소리
거져 듣는 것이면 좋으련만
이 또한 뭘 달라는 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