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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말없음표' 외 / 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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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41회 작성일 16-02-15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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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선]


詩를 쓰고, 또 읽는 일이
서로에게 소통되고 위안이 되는
그런 작업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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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음표


아니다, 정말 아니다
마침표 하나 탁, 찍어 놓았다
그래놓고 아무래도 아닌 듯하여
슬그머니 꼬리를 내려놓는다


그럴 수도, 정말 그럴 수도
쉼표 하나 조심스레 찍어 놓았다
그래놓고 아무래도 아닌 듯하여
싹둑, 꼬리를 잘라버린다


붙였다 잘랐다 또 붙여보지만
넘침과 모자람은 늘 한통속


불안한 마음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편견 하나가 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뿌리를 뽑아내자 환해지는 마음자리


그 위에 저희끼리 살 비벼 흠을 지운
몽돌 같은 부호 하나가 화두처럼 피어났다
혀를 버린 편견, 그 잔잔한 침묵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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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


산을 오르다 돌탑을 만났지요


조그만 돌 하나 올려놓는 순간
누군가의 돌이 떨어집니다


미안한 마음과 함께 떨어진 돌 주워
내 돌 위에 공손히 올려놓습니다


절실했을 누군가의 기도 위에
엄살 같은 내 소망을 얹어 놓았으니
탑이 먼저 아신 거지요


내려서는 길도 곧 올라서는 길이라고
비방 한 줄 슬쩍 쥐어주신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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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게 묻는다


마음이 까닭 없이 우울해 하는 날이면
몸은 마음을 달래 목에 태우고
호숫가로 나가네, 나가
한적한 곳에 무등을 푸네
색 바랜 구절초 앞에 마음을 앉혀 놓고
한 발자국 비켜서서 지켜보는 몸
하늘과 구름과 나무가 있고
물과 바람과 꽃이 있는 곳
누가 먼저 말 안 해도 얼마쯤 지나면
미안타, 괜찮다 환해진 몸과 마음
서로라는 말을 징검돌 삼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오는 귀갓길
잘 살았다고 감사하다고
마지막 문장을 써 내려가는 가을 풍경 속
나도 그곳에 함께 선다면
한 폭의 따뜻한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삼욕에 찌든 때를 슬그머니 밀어 놓고
가만히, 가만히 가을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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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걸걸음마를 시작한 육순의 성재 아재
삐뚤삐뚤 세상에다 발자국을 다시 쓴다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지
가다가 쉬고 또 가다가 쉰다 아프기 전
밭을 갈다가 주저앉던 소
채찍 든 손 먼저 올려 등짝 후려쳤다는데
얼마 후 저세상으로 갔다며
그 죄 받아 자기가 아픈 거라고
어눌한 말로 온몸을 흔드는 아재의 워낭
이치를 바로바로 깨달아주면
세상이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느냐고
어쭙잖은 위로를 날려보지만
어느 먼 순종의 길 위에서
병든 소의 울음소리 다시 들려오는지
하늘 향해 날리는 눈 붉은 신음
육필로 쓰는 뜨거운 저 눈물이라면
세상 어디든 경전이 아니 되랴 싶은 오후
흘러내리는 생각들을 겹겹으로 받쳐 이고
생의 뒷길을 천천히 걷는다
미처 닫히지 않은 틈 사이로 바람이 이는지
울컥울컥 내 안에서도 워낭소리가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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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봄


이른 봄 들녘에 돋을볕 내린다
달래 냉이 여린 쑥과 이름 모를 잡풀 위
사랑한다, 침묵의 말씀이 내린다
겨우내 꺼졌던 길 다시 켜지고
점점이 찍히는 만상의 발자국들
관성은 초록색 잎으로 돋고
한 손이 만 가슴을 품는 넉넉함 속에
화사한 봄을 온몸으로 전하는
저기, 은자의 다정한 불립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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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시길래


어젯밤 꿈에
신발 한 짝이 또 떠내려갔다
워낙 급류라 건질 엄두도 못 내고
안타까이 바라만 봤다
나이를 먹고도
헛꿈의 행장을 꾸리는 내가
아슬아슬하신지
그분은 기다렸다는 듯
잠 길에 먼저 오셔
신발을 그렇게 늘 감추고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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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가을을 타서 마신 밤이라는 술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빈 독이 되었다
별은 꺼지고 달도 돌아가
내 맘도 함께 끄고 누워보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붉은 종소리
귀 막고 눈 막아도 스미는 가을인데
뎅그렁뎅그렁 만산홍엽에
취한 마음 또 취하는 내 안의 가을인데
대청봉은 어느 사이 눈으로 갈아입고
동안거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색과 말을 내가 껴입는 동안
색 벗고 말 벗고 그저 고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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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피는 저녁


청보리 사이로 노란 장다리 하나
꽃모가지 쑤욱 내밀었네요


혼신으로 들어 올렸을 가녀린 발꿈치


어디서 왔느냐고 어떻게 왔느냐고
묻지 말고 가세요


생각하면 척박한 생 어디 한 둘일까만
무엇 될 수 있다면
되어 소망 이뤄줄 수 있다면
꼿꼿한 저 외로움 곁에
수컷이 되고 싶어요


든든하고 믿음직한 수컷이 되어
무장무장 따뜻한 일가 이뤄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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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霧笛)


안개 속으로 사라진 이름
기다림은 끝내 병이 되었나
끊긴 가계의 연대기를 소리로 쓰려는 듯
안개만 보면 우우우 짐승처럼 울부짖는
저기 저, 펄럭이는 아버지의 붉은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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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립다


행여 어리석음을 들킬까
지혜 없는 지식에다 교만을 바른 채
위장과 처세만 세상 밖에 띄워 놓고
너와 나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우리가 사라진 숲에는 정도 말라 있고
사랑도 제자리를 말뚝처럼 지킬 뿐인


아, 생각하면 강물로 오는 푸른 사람 그립다
모서리 닳아 헐렁해진 둥근 마음 그립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그립다


우리라 부를 수 있는 사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