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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나이테' 외 / 김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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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29회 작성일 16-02-15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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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숙]


추수 끝난 논
잘라 낸 볏대궁 내음이 향긋하다.
삽목으로 떼어 심은 서홍구절초 향기도
감국의 진한 향도 함께 섞이어
가을풍경을 완성시키고 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만나는 모두의 향기를 느껴보고 싶다.
우리가 사는 동안 가을은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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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아오는 동안
작은 동그라미 하나밖에 그리지 못하는 나무


누가 베어냈을까
선명한 턴테이블 레코드


긴 노래를 걸어 두고
바람은 숲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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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빠르게 돌며 달리는 둥근 땅 위에
사람,
그 외로운 이름으로 착륙한 생명
산다는 것은
멀미를 견디어 내는 일이다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것은
고단한 삶의 온기나마
서로 껴안는 일 뿐이다


공전속도 시속 10만 8천 킬로미터
자전속도 시속 1천 6백 7십 킬로미터
틈새로 설핏
봄꽃 환한 향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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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일기


상추를 종류대로 세 포기씩
고추, 피망은 종류대로 두 포기씩
가지 둘, 깻잎 셋, 쑥갓 넷
오이 둘, 호박 둘, 방울토마토 둘
우리 손자 좋아하는 옥수수, 강낭콩도 심어야지
그런데 참
비트, 당근은 어쩌나
고구마 심으려고 남겨 둔 구석빼기
한 쪽을 헐어야 할지 말지
해마다 조금씩 꽃나무 꽃밭에 밀리는 텃밭


비 그치면 읍내 장터에 가서
자루 시원찮은 호미도 새로 사고
산수국, 목수국도 나왔나 둘러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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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 바닷가에서


내가 죽었다면
그것은 목울대가 메었기 때문이다


갈매기들 모래밭에
울며 받아 적고 울고 읽은 이름들
유언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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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두시의 이명(耳鳴)


지구가 언제부터 비포장길을 달리기 시작했을까
이 세상 모든 폭포가
머리맡으로 쏟아져 내리고
별들마저 혈관을 따라 저벅거린다


곧 잠이 오겠지
두 개의 문을 닫고 호수 깊이 내려가
누에고치 같은 단잠에 들면
심장을 밟고 섰던 코끼리도
발자국 소리 걷으며 떠나가겠지


괜찮다
곧 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