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45호2015년 시 - '법고를 두드리다' 외 / 권정남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68회 작성일 16-02-16 10:24

본문

[권정남]


낙산사 의상 기념관에서 불탄 동종을 보았다.
허공을 때리며 산짐승과 새들,
어둡던 중생들의 귀와 눈을 열어주며
지옥과 연옥까지 흔들던 범종소리였는데
숯이 된 성채(聖體)로 환생해 있었다.
전율이 일었다.


----------------------------------------------------------------------


법고를 두드리다


푸른 새벽
스님이 법고를 두드린다


둥둥, 두둥둥


실체가 없는 그림자 하나가
소매자락 휘날리며
空을 두드린다


업장 소멸에 든 회오리 바람이다
연꽃이다


둥둥, 두둥둥, 둥둥


활짝, 날개 편 학 한 마리가
허공에서
달을 두드리고 있다.


----------------------------------------------------------------------


꽃들의 일탈


꽃들이 만발하게 핀
접시가 깨어졌다
물길이 열리듯
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동안 접시 속 무늬로
갇혀 있던 꽃들이 숨 쉬기 시작한다
인형의 집 노라처럼
까르르 손벽치며 자지러지듯
세상 밖으로 일탈을 한다


보라색, 빨간색 꽃들,
나폴나폴 흰나비, 노랑나비까지
제 빛깔 제 몸짓으로
한 송이, 두 송이 막무가내
맨발로. 뛰쳐나온다
접시에 갇혀 얼마나 갑갑했을까


머리 풀어헤친 채
키득키득 까르르 웃으며
점프하며 흩어지는 꽃과 나비들
그들만의 체취와 향기가 진동한다


한 번 즈음 그렇게, 나도
일탈을 시도한 적이 있었던가


----------------------------------------------------------------------


줄장미


담장마다 붉은 혀가 걸려 있다


유월 초순
사지(四肢)가 찢긴 채, 능지처참 당한
사육신들의 혀다


상왕*을 복위 시키려다가 누설된 거사
그 충혈된 눈망울들
찢어진 살(肉) 틈으로 낭자히 흐르던
꽃잎, 꽃잎들


밧줄에 묶여 있던, 이승의 말(言)들이
피 빛, 장미 넝쿨 되어
눈이 아프도록 매달려 있는
6월, 담장


그, 충직한 혀들이


*상왕: 단종


----------------------------------------------------------------------


동종, 열반에 들다


진달래 만개한, 사월
화마(火魔) 입 속으로 제 몸을 던진
동종, 열반에 들다


뜨거운 향로를 머리에 인 듯
부릅뜬 심안(心眼), 비틀고 오그라든 몸이
웃는 듯 울고 있는
등신불 만덕*이다


‘소신공양(燒身供養)’


허공을 때리며
산짐승과 새들, 어둡던 중생들의
귀와 눈을 열어주며
지옥과 연옥까지 흔들던, 범종소리
그 긴 여운


낙산사 의상기념관 유리곽 속에서도
환하게
사람들 마음을 밝혀 주는


숯이 된 성체(聖體) 하나


*김동리 소설 「등신불」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


----------------------------------------------------------------------


연둣빛, 탑(塔)


겨울 江을 건너온 양파들
손가락만한 싹이 올라왔다
허공을 밀어올린
연둣빛 고운 탑(塔)이다


붉은 가사장삼 속
마음 비우고 집착을 버린
긴 수행,


세상일 어지러워
둥근달을 들여다보듯
속울음 훔치며, 들여다본다
톡 쏘는 지조 높은 체취 앞에
탑돌이 하듯
흰색 베일을 벗기고 또 벗긴다


‘텅 빈 공(空)의 세계’


차가운 겨울 江을 건너온
하얀 맨발들이
연두빛 사리 탑(塔), 그 작은 우주를


꽉, 움켜 쥐고 있다


----------------------------------------------------------------------


정오의 입맞춤


시외버스터미널 앞 횡단보도
청춘 남녀가
입을 맞추고 있다


지나가던 차들이
경적을 울리다가 멈추고
바람도 숨죽이는 듯
벚꽃 잎들만 하르르 허공에 흩날리는
한낮의 정적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키스’의 주인공들이다
부끄러움을 잊은 정오의 햇살이
하얀 목을 뒤로 젖히며 감미로운 듯
눈을 감고 있다


은하수가 흐르듯
하르르 벚꽃 잎만 흩날리는
횡단보도 한 중간
이별을 앞둔 견우, 직녀의
애절한


정오의 입맞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오스트리아 화가


----------------------------------------------------------------------


토종닭 집에서


튼실한 토종닭 다리가
끓는 냄비에 걸쳐져 있다
성긴 댓잎 같은 발가락들이
한 번씩 움찔거린다


원시 부족 마사이족 다리 같다
성큼성큼 협곡을 건너며
들판의 사자와 얼룩말을 쫓던
카리스마 넘치던 야생의 다리


댓잎 같은 발가락으로
맨드라미 같은 붉은 벼슬을
곧추세우며 푸드득
날개를 치며 허공으로 오를 듯
방금이라도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 자세다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토종닭 나신(裸身)
뜨거운 듯 뒤척이는, 푸른 고뇌


마사이족 닮은
암갈색, 미끈한 다리가 서늘하다.


----------------------------------------------------------------------


저 사람, 대체 누구일까


영랑호 범바위에 누군가 서 있다
한 그루 나무인 듯, 사람인 듯
하염없이 호수 건너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고즈넉한 모습
마리아상 같기도 하고
관세음 보살상 같기도 하고
지아비를 기다리는 지어미 같은,
먼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여인
모두 고뇌에 찬 간절한 모습이다


밤이 되어도 꼼짝 않고 서 있는 저 사람
나무인 듯, 사람인 듯
한평생 나를 슬프게 옥죄던,
그 사람일까, 얼굴이 없다


영랑호 범바위 위에
발끝까지 어둠을
검은 망또처럼 걸치고
조용히 서 있는 망부석 같은


저 사람, 대체 누구일까


----------------------------------------------------------------------


비자림* 숲길에서


근육질의 남자들이
곡예 하듯, 출렁
나무에 매달려 있다


초록빛 팔뚝,
몸에 문신을 한 바이킹 족들이
정글에 모여 무슨 음모를 하는지
머리에 푸른 띠를 두른 채 우우
함성을 지르고 있다


술렁대는 나무마다
거꾸로 매달린 초록색 구렁이들이
혓바닥으로 햇살을 핥고 있고
진액이 뚝뚝 떨어지는
근육질 팔뚝 아래로


수령, 육백 년을 뜀박질한 비자림 숲 속
바이킹 족, 그 후예들이


청아한 새소리를
불경처럼 떠받들고 있다.


*비자림: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자연휴양림, 수령 육백 년 이상된 비자나무숲


----------------------------------------------------------------------


65년만의 귀향
― 유해 발굴


부스스 기지개를 켜고 눈을 뜨니
포성 소리 들리지 않고
산비탈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네
벌써 65년 세월이 지나갔구나


두 개골 움푹 패인 눈으로
옆자리 누워 있는 전우, 생전 모습이듯 나를 바라보네
내가 꼈던 녹슨 반지도, 어머니 사진도
산비탈 저만치 흙 묻은 채 있고
삭은 군화 속 가닥가닥 발가락이 떨어지네
조각난 내 두개골과 팔 다리 뼈를
누군가 퍼즐처럼 맞추고 있네
고향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려고
태극기로 부산히 싸고 있네
차창 밖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눈부신 세상


입대할 때 엿을 사 드리며
맞지 않은 군복 입고 뒤돌아설 때
동구 밖서 흐느끼시던 내 어머니
65년 만에 다시 가는 고향집


지붕 낮은 초가집
어머니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흰저고리 검정치마 단발머리 고무줄하던 여동생이

칠십 노인 이빨 빠진 채로 나를 반기고
바지저고리 펄럭이며 구슬치기하던 남동생
구부정한 허리로 지팡이 짚고 나를 맞이하는데
나만 늙지 않는 영원한 스물 한 살 푸른 청년이네


65년 만에 만난 그립던 삼남매
죽은 자와 산자가 손잡고 얼싸안으니
뜨거운 눈물 걷잡을 수 없이 흐르네


누군가 다시 내 유골 담은 상자를
예단처럼 곱게 태극기에 싸고 또 싸서
머물고 싶은 고향집을 하직하고 떠나오네


초여름 햇살이 쏟아지는 현충원
출전을 기다리는 병사들처럼 사열해 있는 비석들
묘비명 대신 가슴에 달고 있는 이름표들
아직, 따뜻한 피가 도는데 저만치
먼저 간 내 동료들 말이 없구나


의장대 몇 발 총소리에
한때 우리들의 청춘이었고 꿈이었던
유월 푸른 하늘
나무들은 더욱 푸르고, 새들은 높이높이 날아 다니는데
나는 또다시 이곳에 누워 영원히 잠을 청하네

그립던 내 고향집, 잠깐 본 세상
아! 잊을 수가 없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