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33호2003년 [소설-한춘녀]세헤라자데의 아침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갈뫼
댓글 0건 조회 3,101회 작성일 05-03-26 13:50

본문

1
유리창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이 도시 위로 다시
떠오르는 하루. 점차 창백해지는 아침창을 보면서 나는 머언 이국의 왕비,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를 생각했다. 그녀의 지난밤은 무탈했을까. 그녀
의 변덕스런 왕은 어젯밤도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녀는 무
슨 허황된 색깔의 돛을 단 이야기로 온밤을 가득 채웠을까. 그래서 대여
기간 1박2일의 목숨을 하루 더 연장하는데 성공했을까. 동녘이 훤해오는
이 새벽, 그녀는 언제라도 칼날의 섬광이 다녀갈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
는지도… .
욕실 쪽에서 타일벽에 부딪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오늘 아침 유쾌한 모양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저 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자아, 떠어나자아. 동해바다로오. 삼등삼등 완행열차아
고래 잡으러어 어,어,어. 쫙쫙 물 끼얹는 소리가 노래 사이사이, 반주처럼
들려왔다. 욕실 바닥에 거침없이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어젯
밤의 여운이 온몸에 그물 물결치더니 발바닥을 간지럽히며 빠져나갔다.
나는 팔을 들어올려 살펴보았다.
투명왁스 같은 윤기가 은은히 흐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내
몸뚱이에서 황사가 서걱거린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의 산동네로 옮겨 온
뒤로는 그런 생각에 더욱 사로잡혀 있었다. 오늘 아침, 몸과 마음이 날아

갈 듯 가뿐하고 뿌듯하다. 사람의 체온으로 덥혀진 잠자리. 흡족하게 사랑
하고 달콤한 피로감에 잠겨 아무 생각 없이 잠들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
복한가. 남의 살점이 내 몸 같이 온화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분 좋다. 그러나 욕실에서 소리치듯 노래 부르고 있는 그가 나는 벌써
싫어지고 있었다. 그에게서 야만적인, 수컷 특유의 무심함이 맡아졌다. 비
정하게도.
나는 그의 베개를 들어 침대 밖으로 떨어뜨렸다.
둔탁한, 단번에 무릎 꿇는 소리가 났다. 그리곤 그만인 긴 침묵을 듣고
있는 동안 그 무저항에 심사가 점차 뒤틀려 왔다. 나는 세헤라자데 뿐만
아니라 첫날밤만 지나면 왕비의 목을 베어버린다는 그 왕도 이해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허름한 모텔, 손바닥만한 욕실 안에서 고래타령이라니. 동해
바다라구? 여긴 지그재그 접자 같은 뒷골목 안이었다.
밤늦게 이 모텔에 들어서도 그랬다.
그는 마치 제 방인 듯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실랑이를 하고 들어온 터라 나는 방 한 구석에서 무릎에 깍지를 낀 채 발
등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헤어진대도 전혀, 손톱 주위의 거스러미
만큼도 아플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좋은 기회였다. 나는 그 동안
명분이 없어 헤어지지 못한 사람처럼 이제 그와의 결별은 분명하고 돌이
킬 수 없는 것이 된 심경이었다. 서둘러 목욕을 끝낸 그가 들어서더니 나
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는 웃을 때만큼은 천진난만한 소년 같다. 그도 내
가 저 웃음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을 터였다. 자기 아직 화났어?
어느덧 내가 그의 팔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시간 없어. 벌써 2시야. 그가 내 귓부리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
했다. 너도 내 사정 잘 알잖아? 나 믿지? 사랑해. 그가 주워섬기는 동안
방금 전의 결심이 하나 둘 다른 명분의 깃발들을 달고서 머리 속을 되건
너기 시작했다. 뭐야,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 좀 새삼스럽긴 하지. 이제

와서 헤어진다는 게…. 상체가 근육진 팔울타리 밖으로 천천히 넘어가는
동안 나는 너무나도 뻔한 이 순간을 위해 초저녁부터 그렇게 버텼는지 모
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출렁, 매트리스의 파동이 침대 끝으로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자기 없이는 못 살아.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 버리면 안돼.
그가 청바지 앞섶을 틀어쥐며 대답했다. 그걸 말이라구. 낮에는 듣기 거북
한, 지극 단순한 말들이 밤에는 얼마나 자극적인지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의식적인 듯 힘껏 밀착하고 한껏 비틀었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다 말고 몸을 뒤척였다.
아무래도 하반신이 편치 않았다. 미스 최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나
는 미스 최를 잊고 있었다. 늦게라도 들어올 거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비를 맞으며 밤늦게까지 내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둠 속
에 웅크리고 앉아 떨고 있었을 미스 최. 그녀의 겁 많은 눈동자가 잠깐 어
른거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기다리다 말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겠지.
어느 덧 세하라자데의 아침햇살이 커튼을 들추고 방안을 엿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세워놓은, 한 장의 넓은 간유리 같은 햇살은 어지러운 방안 풍
경을 가르며 스타킹과 뒤엉켜있는 러닝셔츠 위에서 멈추었다. 쓰고 버린
티슈 뭉치와 과장된 감정의 찌꺼기들이 간유리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먼지
입자들과 함께 고스란히 드러났다. 웅얼거리는 노래 소리가 욕실 쪽에서
틈틈이 들려오는 와중에도 방안은 괴기할 만큼 적막하다. 이렇게 아침햇
살이 선명히 퍼지는 아침이면 나는 공연히 낭패스럽다. 어젯밤 내 입에서
흘러나간 말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순간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아침이
면 생각이 달라졌다. 그 상황에 무슨 소리는 못하나 뭐.
노래 소리가 멈추고 짧고 빠른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제 머리를 감는 모양이었다. 그 역시 간밤의 일일랑 잊고 지금
쯤은 출근시간에 늦지 않으려는 마음뿐일 게다. 그는 오늘 더 열심히 일
하고 더 기분좋게 소리칠 것이며 더 유쾌하게 전화를 받을 것이다. 저 남

자하고 같이 살 수 있을까…. 내 가슴속에서 비릿하고 미끈거리는, 비정
한 물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우리는 어쩌면 산다는 것에 이미 지쳐 있는 지
도 몰랐다. 우리가 같이 산다는 것은 각자의 짐을 나누는 게 아니라 서로
의 짐을 더 얹는 걸 의미한다. 약바르게도 우리는 시작도 전에 그걸 눈치
채고 있는 셈이다.
그 점이 아직 제 방 이부자리 속에서 자고 있을 미스 최하고 나하고 다
른 점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황금 만능열쇠로 여기고 있었다. 결혼이란 열쇠 구멍을
통과하기만 하면 잘 가꾸어진 정원, 왕궁 같은 대저택이 펼쳐져 있었다.
내 약혼자 집안은 가문을 나타내는 문장도 있대요. 꼭 리차드기어하고 브
래드피트를 합친 것 같이 생겼어요. 내 약혼자는, 내 약혼자 집안은…. 꿈
꾸듯 마냥 행복해하는 그녀를 볼라치면 그녀는 결혼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았다. 나는 애완동물 같은 여자들을 경멸하는 편이다. 그녀는
스타킹, 그림엽서 따위를 사러 내 가게에 올 때마다 약혼자 얘기를 했다.
약혼자가 보냈다는 하트 모양의 커다란 초콜릿이나 향수 냄새가 나는 진
주 달린 속옷 따위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번 여름에 데리러 온댔어요. 그
녀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면서 자랑스럽게 웃었다. 언니도 내 약혼자한
테 부탁해서 멋진 남자친구 소개시켜 줄게요. 돈도 많고 능력도 있는. 세
상에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무엇보다 나는 미스
최 같이 눈에 대번 띄는 미인이 아니었다. 그녀를 이해 못할 것은 없었다.
일종의 탈출구 같은 거겠지.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긴 했다. 그녀는
약혼자를 처음 본 순간 열대 산호섬 페퍼민트 빛깔의 바닷물을 떠올렸다
고 했다. 언니, 나 그 사람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마악 그 속에서 헤엄치
고 싶어져요.
“승미야, 수건!”
그가 욕실에서 고개를 내밀며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수건을 집어 들었다. 빨
리 해. 늦겠어. 수건을 받아들고 나가면서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했다. 수증기를 헤치며 서둘러 욕조의 물을 뒤
집어썼다. 달구어진 백사장 모래처럼 따끈따끈한 물은 하루밤새 팽팽해진
젖가슴 사이로 아랫배를 타고 허벅지를 따라 흘러 내렸다. 짜릿한 전율이
재빨리 뒤따라 훑으며 내려갔다. 어젯밤의 정사를 떠올리다 말고 흰 셀로
판지 욕실창을 올려다보았다. 선팅된 유리창을 통해 분산되는 햇살은 떠
다니는 미세한 수증기 알갱이들을 더욱 희뽀얗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몽
환의 꿈을 뭉게뭉게 분무기로 뿜어 놓은 것 같았다. 순백의 웨딩 꿈만 꾸
어도 좋을 면사포 너울 너머로는, 지금쯤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로 분주
할 것이다. 골목에서, 전철역에서, 현관 로비에서…. 늦을세라 뒤질세라 불
규칙적인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나 역시 오늘이라도 해
야 할 일이 있다. 지금쯤 내 가게로 전화를 하고 있을 미스 최 생각이 다
시 났다. 아마도 그녀는 가게 문을 열자마자 달려 올 것이다. 오늘은 또
무슨 황당한 얘기를 해 올련지….
나는 온몸에 비누거품을 일구어 내면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2
어제는 늦가을비가 아침부터 추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졸고 있었다. 졸면서 어쩔 수 없는 나의 어제를 오늘을 그리고 내
일을 근심하기도 하고 잊기도 했다. 당장의 가겟세를 걱정하고 지체 장애
자인 어머니는…, 맏이인 그에게는 아직 공부를 마치지 않은 동생들이 있
었다. 나는 내 걱정의 끝에 가서는 졸았다. 일부러라도 졸았다. 유리 진열
장 뒤에서 꾸벅거리다 보면 달콤함이 송진처럼 녹아 흐르는 방안에 어느
덧 내가 들어가 있었다. 온통 노오란 그 방 벽에는 어떤 구차한 무늬의 근
심도 없었다.

유리문이 열리는 인기척이 났다.
어서 오세요. 졸고 있는 동안에도 신경의 절반은 문 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문이 열림과 거의 동시에 말할 수 있다. 어서 오세요. 말을
하면서도 침이라도 흘리면서 자진 않았는지 얼른 손이 입가로 갔다. 손님
이 아니라 미스 최였다, 나는 좀 언짢았다. 나만의 노오란 방문턱을 넘어
서려는 참이었던 것이다.
“어머 미스 최, 오랜만이야.”
마음과 다른 내 목소리를 눈치 챘는지 미스 최의 얼굴이 잠깐 비틀어지
며 웃는가 싶었다. 다음 순간 펄쩍 유리 진열장 뒤로 뛰어 들었다. 그리곤
납작 엎드렸다.
“언니, 나 좀 숨겨 줘요.”
왜 그래? 누가 쫓아 와? 어여쁜 사람이라 다르구나 싶었다. 나는 가게
밖으로 나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침부터 오락가락하던 비는 머리카락처
럼 가늘어져 있었다. 날이 궂은 탓인가 사람들의 왕래가 뜸했다. 아무도
없는데 왜 그래? 가게에 도로 들어서는데 진열장 밑으로 미스 최의 맨발
이 보였다. 그녀는 어느 새 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디서부터 뛰어 왔는
지 진흙이 그녀의 무릎 위까지 튀어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얼굴
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눈 주위로 보랏빛 피멍울이 보였다. 연두색이 아닌
것으로 보아 지금 맞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올 게 왔구나. 하지만 나하고
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미스 최는 미성년자가 아니다. 나는 모른 척 할 생
각이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나 기도원에서 도망 나왔어.”
그 정도였을까. 최근 엉뚱한 소리를 하긴 했어도 그 정도였을까. 그렇다
면 미스 최 어머니는 아직 모르고 있는 걸까. 나는 미스 최의 앉은 몸피를
살펴보았다. 풍성한 스커트를 입은 탓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근래 가
게에 오지 않은 이유는 알게 된 셈이다. 미스 최가 문 쪽을 살피며 안절부

절 말했다.
“언니, 눈 맞아 봤어요? 불이 번쩍 하면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애요.
나쁜 것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래. 마귀가 든 게.”
“…”
“지금쯤 전부 나서서 나 잡으러 다니고 있을 거야. 무서워. 언니. 엊그제
는 도망치다 붙잡혀서, 볼래요?”
그녀는 흰 블라우스를 들어 올렸다. 군살 없는 허리선이 드러나고 마치
수양버들 가지를 들어 내리친 것 같이 푸릇푸릇했다. 내 눈이 그녀의 아
랫배를 더듬고 있었다. 제법 봉긋했다. 나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얼른 외
면했다.
“신발요? 도망치다가 잃어 버렸어요. 한 짝만 신으면 남들이 더 이상하
게 생각하잖아. 그래서 한 짝도 버렸어요. 뛰다가 숨다가, 무서워, 언니.”
그녀는 새삼 숨을 헐떡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언니, 나 밥 먹고 싶어요.
김치하고. 나는 그녀를 위해 밥 해 줄 생각은 없었다. 마침 찬밥도 떨어졌
다. 찬밥이 있다고 해도 한 벌뿐인 수저를 기도원을 방금 탈출한 그녀에
게 빌려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 나는 그와 저녁 약속이 있다.
나는 낡은 신발을 구석에서 찾아내었다.
밤색 단화인데 발뒤꿈치를 물어서 뒤축을 꺽어 가게에서나 신던 신발이
었다.
“우선 이거라도 신고 있어.”
신발을 꿰는 미스 최의 몸가짐이 흐트러져 보였다. 내가 아는 그녀는 다
리 벌려 앉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포개어 앉거나 붙이고 앉았다. 단정한
그 모습은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좋았다. 그녀가 패션모델이었다는 건 사
실인 것 같았다. 언니. 나 파리에도 갔다 왔어요. 패션 쇼하러. 나는 왕비
같은 옷만 입었어요. 웨딩드레스나 대례복 같은 거. 디자이너가 내게는 그
런 옷이 더 어울린댔어요. 왜 그만 두었냐 하면요, 언니, 어떤지 아세요?

재벌 졸부 2세 3세 중에는, 내가 내는 문제 알아맞히는 사람! 하면서 몇
백 만 원짜리 수표 들고 막 흔들어요. 말도 안 되는 난센스 퀴즈 같은 걸
내는데 그거 타내려고 그야말로 아우성이예요. 저요! 저요! 하면서. 못 알
아 맞추거나 하면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수표, 대마초 말아서 피워요. 하
지만 꼭 그래서 그만 둔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이제사 확실해졌다. 내
가 진열장 위에 놓인 전화기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전화기를 확
낚아채더니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엄마한테 전화하려고 그러죠? 전화하면 안돼. 내일이라도 끌고
가서 수술 시킨댔어요.”
그랬었구나. 나는 그녀가 필사적으로 탈출한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더니 생수병을 통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그 옆에 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큰 생수병을 단숨에 비운 그녀는 겨우
진정이 되는지 제 가슴을 몇 번이고 내리쓰다듬었다. 그녀는 리모컨을 찾
아 들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일일 연속극을 재방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
기의 처지를 잊어버렸는지 금방 연속극에 몰두했다. 어머머. 쟤, 많이 컸
네. 내가 모델 할 때 우리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던 신출내기였는데. 언니,
저 남자 카리스마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약간의 열 기운이 느껴졌다. 그와 만나기로 한 건
일곱 시였다. 오늘은 그를 꼭 만나야할 일이 있었다. 나는 내 일만 해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머머, 저 여자 머리 좀 봐. 완전 야광 색이네. 쉬지
않고 떠들던 그녀가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그녀는 애써 잠들지 않으려고
연속극에 몰두했던 모양으로 금방 코까지 가볍게 골았다. 소스라치듯 어
깨를 떨기도 하고 앓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가게에 오지 않은 한 달 가까
이 마음 고생한 흔적이 완연했다. 초췌한 그녀의 모습은 그럼에도 불구하
고 아름다웠다. 긴 속눈썹하며 선이 분명한 입술하며….
나는 불안과 불안정이 얼룩지듯 스쳐가는 얼굴을 보면서 몇 달 전, 유

난히 눈부시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얀 원피스와 샌들을 신은 그녀
는 온통 발광체인 듯 환희를 내뿜었다. 언니, 나 이뻐요? 드디어 약혼자가
오후 비행기로 온대요. 자꾸만 입이 벙그러지는 그녀는 한 바퀴 핑그르르
멋들어지게 돌더니 언니, 바이바이, 손까지 흔들며 가게를 나갔었다.
나는 미스 최가 깊이 잠들길 기다려 가게를 빠져 나왔다.
한 번 두 번 세 번 …. 전화 신호음이 길게 울리자 마침내 저쪽 수화기
가 들리었다. 여보세요. 변성기에 접어든 듯한 목소리였다. 미스 최는 아버
지가 다르다는 남동생과 어머니, 세 식구가 살고 있다고 했다. 내 얘기를
듣는 동안 남동생은‘엄마, 지금 없는데요’를 몇 번이고 멍청하게 되뇌었
다. 얼핏 미스 최를 떠맡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얘, 니
네 누나잖아, 정신차려. 얘!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돌아와 보니 미스 최는
여전히 벽 모서리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수화기가 그녀의 무릎에서 흘러
내려 그녀의 위태로운 처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지난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녀가 그렇게 손까지 흔들고 나간 뒤 얼마 동안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여행도 같이 다녀야 하고, 신혼 아파트도 알아봐야 하고,
요즘 너무 바빠, 언니. 그러던 그녀가 다시금 내 가게에 놀러오기 시작했
다. 짐작은 갔지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복권은 아무나 되나 뭐.
나는 한 번도 복권을 사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짐짓 물어 보
았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 미스 최는 잠깐 움찔했다. 그녀는 빨리도
말을 지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금방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갑자기 독
일로 발령 나서 갔어요. 다국적 회사 간부라 세계를 돌아다니거든요. 명랑
하게 덧붙였다. 내년 봄에는 틀림없이 데리러 온대요. 신접살림은 유럽에
서 차려야죠, 뭐.
그 뒤로 미스 최는 아예 출근하다시피 했다.
나는 비좁은 가게에 몇 시간씩 앉아 있는 그녀가 점차 불편해지기 시작

했다. 가게에 손님이 어느 정도만 있었더라면 나는 그녀에게 냉담했을 것
이다. 가게는 몇 달이 지나도록 손님이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
스 최는 그 후에도 약혼자 얘기를 몇 번인가 늘어놓았다.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바쁜가 봐요. 옛날 주소로도 몇 번 엽서를 띄우긴 했어요. 어느 날부
터인가 그녀는 더 이상 약혼자 얘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이 많아져
서인지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 언니, 하나님 본 적 있어요?
그녀에 대해 부쩍 의심이 든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 날도 그녀는 일찍 돌아갈 것 같지 않았다. 초저녁인데도 날이 어두
웠다. 그런 날은 손님이 더 없었다. 맘 같으면 일찍 가게 문을 닫고 쉬고
싶었다. 손님이 없는 날은 더 피곤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보란 듯이 하품
을 몇 번,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다가 하는 수 없이 물건 진열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내 손놀림을 마네킹처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언니, 나 요즘은, 하나님 자주 봐요. 잠만 자려고 하면 내 베개 머리맡
에 앉아 소곤소곤거려요. 내가 뭐 하나님 신부라나요.”
나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잘 모르겠는 심경으로, 하나님이 뭐 남잔
가 뭐, 신부가 필요하게, 하고 말았다.
“정말이예요, 언니. 하나님 같은 분이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나는 앞으
로 사람 말은 절대 믿지 않을 거예요. 특히 남자 말은.”
“아니, 글쎄. 하나님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니까.”
“언니도 상상해 보세요. 날개옷 입고 왕관 쓰고 천사들에게 인도되어 하
나님 옆에 앉게 될 나를.”
미스 최는 생각만 해도 벅찬 듯 함박 웃었다. 저런 환희에 찬 모습을 본
지도 오랜만이었다. 웃다말고 미스 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나님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내가 그녀를, 그 황당한 말을 하는 그녀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머리핀 몇 개의 진열을 마저 바꾸고 유리 진열장 모서리

에 고여 있는 먼지를 물 묻은 화장지로 닦아낸 다음이었다. 내 가슴 속에
서 비 오는 날 만원버스 속에서나 맡을 수 있는 역겨운 사람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단박에 그녀가 싫어졌다. 미스 최 약혼자가 떠난 지도 석 달째
접어들고 있었다. 낯선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 왔다. 이제 그만 집에 가.
그 동안 손님이랍시고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 뒤로 미스 최는 내 가게
에 발길을 끊었었다. 그런데 불쑥 미스 최가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
이다.
저녁 약속 시간이 다 되도록 미스 최 집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엄마, 지금 없는데요’를 되뇌이던 그녀의 남동생도, 한때는 술장사 양
키물건 장사를 거쳐 지금은 화투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어머니도 끝내 나
타나지 않았다. 어쩌다 가게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혹시나 하는 사이에 일
곱 시가 넘어버렸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은 꼭 그를 만나야할 일이
있었다.
나는 혼곤히 자고 있는 그녀를 흔들었다.
“미스 최, 일어나.”
“날 잡으러 왔어요?”그녀가 후다닥 도망갈 자세를 취했다.
“저녁 약속이 있다구.”
말뜻을 알아차린 그녀의 얼굴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먹물 빛으로 무겁
게 갈아 앉는가 했더니 어느 새 안도의 웃음으로 바꾸어 피워 물었다.
“아, 언니 남자친구?”
“응”
“그럼, 언니. 나, 언니 따라가면 안 될까?”
나는 오늘 헤어지자는 말을 하게 될 지도 몰랐다. 그는 달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기를 은근
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에게 당장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관계를 한 번쯤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힘을 적당히 뺀 다음 우리는 함께 밤을 보내게 될 것이다. 나는 알
고 있었다. 습관이란 사람을 치사하게도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가을비가
추적거리는 이런 날은 억지로 덥혀지는 전기장판이 아니라 사람의 체온을
품은 따뜻한 잠자리가 간절해진다.
“안돼. 남자친구한테 중요한 말을 할 게 있거든.”
“그럼 언니. 나, 여기 그냥 있으면 안 될까? 언니가 밖에서 셔터를 잠그
고 가면 되잖아?”
한순간, 그러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를 안에 두고
셔터를 내렸다가 엉뚱한 짓이라도 한다면? 내 가게에는 깨어질 물건도 많
고 라이터나 가위 같은 위험한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없는 가게에
미스 최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어슬렁거린다고 생각하면 저녁밥이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미스 최. 나 늦었어. 갔다 와서 다시 얘기하자, 응?”
나는 그녀를 재촉하여 가게 밖으로 내몰았다. 서둘러 유리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려 자물통을 채울 동안에도 그녀는 붙어 서서 어린아이처럼 굴
었다. 언니, 나 가게 안에 있을게, 응? 나 갈 데도 없어, 언니.
나는 지난 번 내 가게에 들렸던 그가 미스 최를 훔쳐보던 것을 기억하
고 있었다. 셔터가 이렇게 뻑뻑해서야. 나는 셔터를 구둣발로 걷어찼다. 그
리곤 돌아서서 마을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스 최는 내 가
게 앞에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언니! 웃으며 따라 붙을까 봐 땅만 보고 걸었다. 걸으면서 그녀가 밤늦게
까지 가게 앞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는 오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설마 이 궂은 날 한데서 밤을 새지는 않겠지. 집에 들어갈
거야. 어차피 끌려갈 병원이라면 하루라도 빠른 게 좋다.
하루라도 빠른 게 좋다. 나는 걸으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비는 멈춰 있
었지만 길바닥은 엉망이었다. 곳곳에 흙탕물이 고여 있는가 하면 깨어진

아스팔트 위로 진흙이 올라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나하고
는 상관이 없었다. 옮겨 온 가게가 이 산동네에 있고 가게 안에서 먹고 자
고는 있지만 나는 이 동네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질척거리는 흙탕물이 튀
어 오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걸음을 빨리 했다.
3
아침을 먹고 그와 헤어진 것은 아홉 시가 다 되어서였다.
오늘따라 마을버스에선 퀴퀴한 냄새가 더 났다. 날마다 더께지고 쌓여
져 화석처럼 굳어진 냄새가 올라타자마자 비위를 상하게 했다. 아침에 먹
은 것이 자꾸 쑥덕거렸다. 가게에서 생활하고부터는 몸이 많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런 내 기분은 아랑곳없이 마을버스는 기우뚱과 균형잡기를 반
복하면서 한참을 휘감아 산꼭대기까지 올라왔다. 나는 내리자마자 동네에
하나뿐인 약국에 들렸다.
그는 아까 헤어지면서 말했다.
오늘이라도 병원에 가 봐.
그러면서 그의 눈은 전철역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는 사람들을 뒤쫓아
같이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두, 세 계단씩 건너뛰며 지
하철 역사 안으로 급히 사라졌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
하자 내 가슴속에서 다시 한 번 비릿하고 미끈거리는, 비정한 물비린내가
풍겨났다. 나는 약사가 건네는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쯤 그는 윤전
기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지하공장 한 구석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있을 터
였다. 내 걱정 따윈 잊고‘자아, 떠어나자아, 동해 바다로오’를 흥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소음으로 희뿌연 종이먼지 속을 헤엄쳐 다니면서 늘 동
해바다를 꿈꾼다.
약국 문을 밀치고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아, 글쎄, 여보. 흥분한 표정의 약사 부인이었다. 약을 먹고 있는 나를 보

더니 말과 표정을 멈추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직 일하러 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겠지만 집들이 굴딱지 같이 붙어있는 이
동네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싸웠다. 여자들은 머리털을 쥐어뜯고 남
자들은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했다. 아이들은 서슴없이 서로의 얼굴에 침
을 뱉는다.
약국을 나와 내 가게 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아침해가 많이 올라 와 있었다. 낭패스러웠다. 가게에서도 어쩌다 늦잠
을 자는 날, 셔터를 올리자마자 나를 밀치고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햇살은
당혹스럽기 마련이었다. 오늘은 많이 늦은 셈이다. 아침 일곱 시에 문을
여는데 동이 트기도 전 마을버스는 하루를 배급받으려는 사람들을 태우고
내 가게 앞을 구르듯 떠밀리듯 내려갔다. 아무래도 신의 가호와 축복이 더
많이 고여 있을 것 같은 산 아랫동네로 몇 번이고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전철역, 버스정류장. 시장 입구에서 부려진 사람들은 세레라자데의 아침햇
살이 희끄므레하게 퍼지고 있는 도시의 아침을 향해 뿔뿔이 흩어진다. 용
역회사로, 공장으로, 식당으로….
이맘때면 텅 빈 산동네에는 적막감마저 감돌기 마련이었다.
지나치다 보니 임대 아파트 앞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궐기 대회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재건축 이야기가 나온 지는
한참 되었다. 좋은 집 놔두고 여기 와서 사는 사람들도 많아요. 미스 최가
귀뜸 했었다. 아파트가 헐리기라도 하면 나는 곤란해진다. 내 가게는 이
아파트 아래쪽에 있다. 아파트라고 해 봐야 오 층짜리 세 동뿐이지만 사
람들은 임대라는 말은 빼고, 요 위 시영 아파트에 살아요, 말하곤 한다. 이
아파트 빼고는 거의 무허가 건물일 터였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경광등을 울리며 경찰차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나는 옆으로 비껴 섰다. 경찰차는 곧장 아파트 마당으로 들어서더니 사
람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소리를 내며 섰다. 경관 두 명이 급하게 차에서

내리고 그 서슬에 잠깐 흩어졌던 사람들이 차 주위로 모여들었다. 앞다투
어 뭔가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아파트 마당으로 걸음
을 옮겼다.
햇빛이 화창해서인가 시멘트를 바른 마당이 바랜 듯 깨끗해 보였다.
어제는 비가 오락가락했었다. 나는 가까운 플라타너스 나무 밑으로 갔
다. 평생의 노역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낙엽들이 뒹굴고 있었다. 아파트 현
관에서 여자 둘이 걸어 나왔다. 그녀들도 집안에 있다가 사이렌 소리를 듣
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 중 팔짱을 낀 여자가 나를 보더니 순간적이긴
했지만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낯설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동네 사
람하고 말을 섞지 않고 지낸다. 가게 손님으로 다가올 때만 말을 한다. 그
녀들은 곧 내게서 눈을 돌려 사람들 쪽을 주시했다. 나 역시 같은 방향으
로 시선을 옮겼다. 경관들과 검은 모자를 쓴, 경비원인 듯한 남자가 화단
쪽을 가리키며 다가가고 있었다. 이불 호청이 안쪽 화단 앞에 떨어져 있
었다. 납작하니 퍼져있는 빨래감 위로 가을 햇살이 하얗게 내리쬐고 있었
다. 평화롭고 한가로운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물에 젖은 것 같은, 묵직한
무게감이 나무 그늘에 있는 나에게까지 천천히 전해져 왔다.
나는 그제서야 약국 여자가 왜 뛰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아파트 재건축 문제는 아닌 것이다. 내
가 아는 사람이라곤 이 동네에 아무도 없다. 금방 발길을 돌리기도 뭐해
서 나는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내 옆에 선 여자들은 벌써 나 따윈 염두에도
없었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여자가 아니라는데? 오늘 새벽에 누가 C동 옥상으
로 올라가는 걸 얼핏 봤대나 봐. 뒷모습이 여학생 같더래. “
“여학생이 왜 그 시간에, 뛰어 내렸을까?”
“누가 알아? 못된 남학생들과 어울려 임신이라도 했는지. 내 말은, 재수
없게 왜 우리 아파트에 와서 자살하느냐 이 말이야.”

“글쎄 말야. 왜 하필 우리 아파트에 와서 죽어? 다른 데 다 놔두고. 아
무튼 집값 떨어지게 생겼어.”
“그나저나 저거 빨리 치워야지, 왜 저렇게 놔두는 거야?.”
“근데 소영이 엄마, 저거 집에 개 아냐?”
“아니, 저 눔의 개새끼가. 내가 현관문을 열어 놓고 나왔나? 아까부터
안 보이더라니. 뽀삐! 뽀삐! 이리 와!”
뽀삐 라는 강아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뒤쪽에서 물어뜯기도 하고
짐짓 뒤로 물러나기도 하면서 장난이 한창이었다. 흔히 발바리라고 부르
는 흰 강아지였다. 강아지의 주인은 조금 전 팔짱을 끼고서 당신 뭐야, 하
는 표정을 짓던 그 여자였다.
“아니, 저 눔의 개새끼가 신발을 물고 나온 것 아냐?”
뽀삐 주인이 사람들 쪽으로 걸어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뽀삐! 이리 못
와? 같이 섰던 여자도 따라가며 말했다. 멀쩡한 신발 못 쓰게 만들겠네.
뽀삐는 주인을 향해 마치 칭찬이라도 받으러 오는 것 같았다. 신발 한 짝
을 입에 물고 촐랑촐랑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짧은 안짱다리하
며 원통형 베개 같은 몸뚱이하며 예쁜 강아지는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C동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난간은 내 허리춤 높이는 되었다. 하늘을 나는 새도 아니고 내가 보기
엔 난간 위에 균형을 잡고 올라서기가 더 힘들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휘
청거리면서라도 올라서긴 했을 것이다. 상체의 의지만으로 추락할 수 있
는 만만한 인간사가 아니니까. 추락도 비상도 한 발짝 무작정 내딛는 용
기가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올려다보는, 아직 살아있는 내 눈에 모
래사막을 박차고 이제 부풀어 오르려는 붉은 지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무심히, 관성으로 시작되려는 새벽을 향해 정면으로 맞선
위풍당당한 왕비의 모습도 보였다. 오늘 아침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유리
진열장 뒤가 아니라 아파트 옥상 난간이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목숨을 걸

어야할 내일도, 밤새 이야기를 들어 줄 왕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더 이
상 졸린 눈을 비비며 서둘러 가게 문을 열고 밤늦게 가게 문을 닫을 필요
가 없었다. 결연한 그녀의 얼굴 위로 아침해가 악수를 청하듯 첫 황금햇
살을 길게 뻗쳐 왔다. 황금햇살은 그녀의 옷자락에도 그녀의 눈동자에게
금방 옮겨 불붙었다. 그녀는 뿌리치듯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지평선이 새떼처럼 소란스러워지더니 일제히 황금 화살촉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앞다투어 달려온 화살촉들은 몇 발짝 떼기도 전에 그녀의 몸뚱
이를 감싸안았다. 그들은 함께 황금빛 추락을 시작했다. 꿈꾸기와 꿈깨기
를 반복하면서. 수직의 긴 터널을 거듭거듭 통과했다. 고대에서 오늘날의
아침까지, 이국의 어느 왕궁에서 이곳 산동네까지. 염려가 많은 머리 꼭대
기에서 진흙투성이 발끝까지. 퍽! 하며 길게 깔리는 건 황금햇살도 내 몸
뚱이도 아닌 시멘트 바닥이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내려다보니 플라타너스 낙엽이 내 발등을 넘어 저
만치 굴러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화단 쪽을 바라보았다. 가을 햇살을 하
얗게 되쏘고 있는 이불 호청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명의 사람
들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젠 나도 되나와도 될 것 같았다. 금이 간 아파
트만 낡은 것은 아니었다. 아파트 입구 양쪽에 선 콘크리트 기둥에서 시
멘트모래가 한낮에 하릴없이 흘러내렸다. 훼손이 심한 콘크리트 기둥은
엉뚱한 물건을 연상케 했다. 여기 저기 아이들 낙서가 눈에 띄었다.
-봉구 자지 삐꾸 자지. 대현이 색시는 민지-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으며 기둥을 끼고 도는데 뽀삐 주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부메랑처럼 날아와 꽂혔다. 어, 이거 우리 신발 아닌
데. 누구네 신발이야, 뽀삐? 이거 어디서 물고 왔어?
이거 어디서 물고 왔어? 쨍!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서인지 어지러웠다.
속에서 울컥 치밀고 올라왔다. 그렇지, 조금 전 약까지 먹었다는 걸 잊
고 있었다. 아파트 담 마른 풀섶으로 뛰어 들었다. 미처 어떻게 해 볼 새

도 없이 아침에 먹은 순대껍질이며 깍두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뒤이어 약
냄새를 풍기며 보랏빛 선지피로 물들여진 밥알들이 반쯤 소화된 상태로
나왔다. 한 번 토할 때마다 엄청났다. 이러다간 어제 먹은 것까지 올라오
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하지만 토하려면 다 토하는 게 낫다. 차라리 다
올리고 나면 속이 편하다. 와중에도 아랫배가 딴딴해지며 깊숙한 깊숙한
그 안쪽, 똘똘 뭉치고 있는 조막만한 긴장이 느껴졌다. 내 안에도 어린 세
헤라자데가 있는 것이다.
어느 덧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려간다는 느낌도 없이 매일 먹는 음식을 어쩌다 올린다는 것은 이렇
게도 힘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토하기를 멈추자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펑펑 솟구쳤다. 범람하
는 눈물은 양 쪽 볼을 타고 기세좋게 흘러내렸다. 금방 목젖이 뻣뻣해져
왔다. 가슴이 터질 듯 했다. 어제, 모텔에 들기 전 그가 그랬다. 아무렇지
도 않은 듯 그가 그랬던 것이다. 아이 핑계로 내 발목 잡을 생각 마. 이번
에도 네가 알아서 할 거지? 나는 셔터를 걷어차서 상처가 난 구두 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칠을 다시 하든지 새로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서. 내 표정을 의심스럽게 살피던 그가 상황 끝이라는 말투로 마침표를 찍
었다. 미안해. 이해해 줘. 됐지?
미안해, 이해해 줘, 됐지? 물론 이해하지. 하지만 벌써 몇 년째야! 언제
까지 가족 걱정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일 아니냐구. 우리가 없어도 그들
은 다 알아서 살아갈 거야. 이젠 나도 지쳤어. 나도 여자라구! 아이도 낳
고 소꼽살림도 하고 싶은 여자라구. 이젠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
야. 내 맘대로 살 거라구. 말리지 마. 이젠 뭐든 저지르면서 살 거야. 저질
러 놓고 볼거라구!
나는 화장지를 꺼내어 연신 눈물을 닦았다.
뜨거운 눈물은 와중에도 쉴새없이 솟구쳤다. 나는 우는 건 질색이다. 영

화관 같은 데서 훌쩍거리고 있는 여자는 더 질색이다. 이렇게 아무데서나
우는 여자는 거의 경멸 대상이다. 하지만 그런 평소의 생각들은 당장의 눈
물을 어떻게 해 주지는 못했다.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쭈그려 앉은 채
중얼거렸다. 나는 어떻게든 구토물 앞에서 옮겨 앉고 싶었다. 몸을 일으키
려고 할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할 수 없이 옆걸음질이라도 해 보려
고 했으나 발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더군
다나 이렇게 눈물이 앞을 가리는 데야. 얼마나 눈물이 뜨거운지 - 경험에
의하면 눈물은 언제나 체온보다 뜨겁다- 얼굴이 몹시 화끈거리고 쓰라렸
다. 이 얼굴을 하고 어떻게 걸어간담. 해는 이미 중천 높이 떠 있었다. 나
는 감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서른 살을 넘긴 여자가 대낮에 어린아이처
럼 엉엉 울면서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말하긴 싫지만 나
는 뽀삐 라는 강아지가 물고 있던 흙투성이 신발을 알고 있었다. 신발은
밤색 단화였다. 뒤축이 접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