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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늦가을 조문' 외 / 채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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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28회 작성일 16-02-1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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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재순]


‘ 백년에 단 한 번 피는 꽃’ , ‘ 백년 뒤엔’
이런 생각으로 우묵해지는 때가 많았다.
먼 북쪽으로 가 빙하, 간헐천, 폭포를 본 뒤
내게 남은 말은 사랑과 죽음이었다.
화살, 백조, 고래......
이런 이름의 별들을 떠올리며
난 어떤 이름의 별이 될까로 수척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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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조문


떨어지는 자작나무 잎사귀에게 술 한 잔


사라지는 구절초 꽃잎에게 술 한 잔


방금 흩어진 구름 한 점에게 흰 국화 한 송이


인적 드문 솔숲에 누워 있는 참새 주검에게 국화 한 송이


더 이상 꿈을 피우지 않는 청춘에게 향 한 촉


가끔씩 시들해지는 내 하루에게도 향 한 촉


늦가을, 어딘가 조문을 한 번 다녀오는 것이다


다음날 쓰다달다 말없이 고봉밥을 먹었다


그 다음날 미루었던 답신을 오래오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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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끌라베*


뒤돌아봐 네 뒤에 얼마나 망망한 네가 있는지
그 뒤에 나무들도 누군가의 잊혀진 기억, 저 꽃과 바람까지도
꽃의 마음을 들여다 봐 바람의 속을 알 때까지


참 좋았던 연애의 한 시절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봄꽃 지듯 스러져 버려
아픈데 아픈 걸 자꾸 잊어버려
아슬하기만한 몸을 들여다 봐
뭘 위해 살아왔는지
마음 머물렀던 자릴 떠올리려해도 생각이 나질 않아
내 몸에 푸른 정맥만이 선명하게 돋아날 뿐


망설이다 내려놓은 그 시간, 발진까지 잊고 살아
초저녁 마당을 서성이며 집 나간 누군가를 기다리듯
저녁산 바라보며 허공을 향해 끄덕이곤 해
알약 한줌 천천히 넣으며 입밖으로 떠도는 말들
앞 강물 징검다리로 놓는 중이야


* 자물쇠가 채워진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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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과 필름이 남긴 말


거울
색깔까지도 똑같이 담아냈지
날아가는 새든, 묵묵부답인 저 벽이든
누구든 내 앞에 서면 같아질 수 있지
표정까지도


필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보고
수천 가지의 표정을 만들어 냈을 뿐
자아, 당신 안에 있던 구름과 나무, 계단과 그늘은
다 어디 있는 거지?


필름
내가 본 것들은 다 기억하고 있지
저기 연인들이 발발거리고 쏘다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몸에 새겨두고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지, 절대


거울
당신은 단지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만으로도 꽉 차서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지
가슴에 안긴 물고기 지느러미 끝내 파닥일 수 없지


누구도 대신 할 수 없어

이생은 짧고 아름다운 거라고
조바심과 애착을 지나
박차를 가하던 치열한 시간을 지나
단잠을 지나 푹신해진 오늘에 이르러


산 정상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한 번 엇갈리면 다시는 만날 수 없지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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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뒤엔


앙증맞은 채송화도
백 일 동안 피는 배롱나무도
나도, 여러분도
모두 먼지


충분히 사랑했고 사랑받았고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의 모험으로
행복했으니 더 바랄 게 뭐냐*고 한 작가 말이
오솔길로 오는 가을 저녁


허공 중 새들이 길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날고
일벌은 꿀 모으느라
발저리도록 삼천 꽃송이를 들락거리고


축제 끝나고 혼자만의 밤이 찾아와도
나와 내가 만나 등 토닥이며
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뒤채는 사이
별 하나가 깜빡거리고
화살, 백조, 고래
어떤 이름의 별일까
저 별은 누굴 또 밤새 흔드는 걸까
다이빙 중 돌연 심해로 사라진
나탈리아 몰차노바의 소식에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을 다시 펼친다


* 작가 올리버 색스의 말을 일부 변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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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지다


어디서 봤을까
어디서 봤더라
입술 마르고 수척한 저 얼굴


어디 먼 델 다녀왔구나


뒤척이던 밤들이었구나


차마 돌아서지 못한 인연 있었구나


어찌할까, 어찌할거나
망설이던 날들 가고
뜨거운 눈길도 거두고


한줄기 바람, 한줌 햇살도 힘겨워
떠날 때가 되었다고
이제 가야겠다고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을까
저리도 고요한 저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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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위드


어디로 가야하나 생각하는 동안 가을이 왔고
먼지 풀썩이는 몸으로 물기 찾아 떠나야 했다
평생 떠돌이로 살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내 이름은 회전초


이글거리는 한낮
입술 바짝 마르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순간
적막이 내게로 왔다


‘나는 이곳에 남겠어’
속으로만 되뇌이다 어두워지곤 하는데
아무리해도 이별에 길들여지지 않는 날들이 이어지고


가뭄들기 시작하면
가차없이 떠나야 하는 정처 없는 날들
안간힘으로 비탈길 굴러가야 하는
각축의 세상으로 떠나갈 수밖에 없는 내게
먼 발치서 말없이 눈 인사 건네는 그들과
풀벌레 안아 키우며 끝까지 살고 싶은데


시들지 않기 위해 오늘도 두리번거리고 있다
비 오기전 바람 부는 기미를 알아채기까지
그림자 길어지는 저녁
새 몇 마리 중얼거리며 들판을 가로질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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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로 갈까요


우리 아이슬란드로 갈까요 눈보라 속을 힝힝 달려 볼까요 폭포를
뒤란에 둔 집은 어떤가요 짧디 짧은 대낮에는 나무 울타리도 만들
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용솟음치는 간헐천을 사이에 두고 두근거려
볼까요


용암 벌판에 뿌리내리는 푸른 이끼 찾아 보며 오로라로 환히 밝
혀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긴긴 밤을 지새는 건 어때요 나이와 어제
는 잊고


헛기침일랑은 거두고 빙하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러 어느날 오
후 문득 나들이 할까요 아슬한 오늘을 내려놓고 아침 달 올려다 보
며 한켠을 물들여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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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일곱 번 화장실 들락거릴 때
남편 부축받으면서도,
손 마비로 더는 쓸 수 없게 된
소설가 아내가 구술하고 남편이 받아 적었다는 책을 펼친 밤
수없이 머릿 속으로 매만지던 문장들이
내게로 왔다


이미 완벽한데
구십 넘은 나이에 왜 계속 연습을 하냐는 말에
매일 6시간씩 연습하고 나면
좀 더 나아졌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라던 첼로 거장
숨 다하는 날까지 연주한 곡을 듣는 밤
자신을 퍼 올린 선율이
내게 울려왔다


끝까지 백기 들지 않은 채
산 정상에 올라
뭉툭해진 부리로 바위 쪼는 솔개의 시간들
자갈 입에 물고 히말라야 넘는다는 두루미
배롱나무와 함께 울던
매미 생각


우묵해질 무렵
그가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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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필드*


가끔은 그 들판을 걷고 싶다
아프거나 쓸쓸해지는 날이면
괜찮아, 괜찮아 등 토닥이며
속이 부글거리는 대낮에도
잠 못 이루는 밤에라도
가보자, 걸어가 보자 중얼거리며
눈이 위로하듯 덮어 준 들판을 거닐고 나면,
조금 울고 나면 새날이 올 거야


앓고 난 마음처럼
구멍 뚫린 바위 널린
그 길을 걷고 나면
오로라거나
또 하나의 근심이거나
이 또한 스러지리라
혼잣말 하다보면
이끼 돋아나는 봄이 올 거야
백년에 단 한 번 피는 꽃,
꽃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꽃 생각으로
마음 울먹이는 날들이 온다 해도
새날이 찾아오면
꽃은 찬란하게 피어나고
어느 날 나비가 날아들 거야


꽃 피었다고 어찌 웃을 수만 있겠냐마는


*라바필드: 1477년 화산 폭발로 모든 생명이 죽었던 아이슬란드의 용암 벌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