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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카리브 소나무' 외 / 장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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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78회 작성일 16-02-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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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진]


가뭄과 갈증
짧아진 봄 가을과
천재, 인재로 범벅된 한해가 기운다
산에 두어 번 다녀오고
색소폰 연주 몇 군데 다녔다
바빴는데 생각하면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의 뒷꼭지만 본 꼴이다
그래도 언제나 감사하다
멕시코로 쿠바로 여행도 다녀오고
자전거도 새로 장만하여 타기 시작하고
무엇보다 한결같이
환하게 서 있는 당신과 내가 있기에
고맙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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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소나무


아득한 카리브해에 떠 있는
동경하던 섬나라 쿠바까지 왔는데
둥근 산 밑 붉은 땅에 밭 가는 농부 있네
멋진 뿔 무소 두 마리에 연장을 얹고
긴 이랑 따라 가는 그림자 풍경
소들이 바라보는 골짝 너머엔
구름 위에 시를 쓰는 사람이 있네


혁명의 붉은 깃발 몇 번을 지났어도
푸르게 자라나는 담배잎들처럼
햇살 따라 일 나가고 노을 따라 돌아오는
주름살 아름다운 예술가들 있네
숙성된 잎을 말아 시가를 만드는
익을 대로 익은 장인들 있네


옥색 바다를 등지고라도
비냘레스 가는 언덕 소나무로 서서
그윽한 계곡 빛나는 밭이랑과
정겨운 산어깨에 푸근히 기대어
내려오는 붉은 이불 덮을 수 있다면
짧은 인생도 서럽지 않겠네
혼자서라도 외롭지 않겠네.


*카리브 소나무(Caribbean Pine): 쿠바 등 중미지역에 분포하는 소나무
*비냘레스(Vinales): 쿠바의 태고적 아름다움을 지닌 시골 마을로 시가(cigar)주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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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 적응


어떤 안경 쓰고 세상을 바라보든
몸은 자유로이 시공을 넘나드네
태양이 머리 위에 있든
비스듬이 누워 눈을 찌르든
시간의 경계는 견고해 보이네


구름바다 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순간들이
내 몸의 시곗바늘을 잡고 늘어져
헷갈리는 시간 속에 있어도
두렵지 않네 새초롬 실눈 뜨고
흔들리는 세상 가치의 가지들 보네


이대로 흐르고 흘러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영원에 닿을 수 있을까
멈춰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차라리
철새의 날개로 변해 계속 갈 수 있을까
가다가 가고 있는 자신마저 잃어버려
그냥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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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 자전거길


풋풋한 바람이 온다
몽실몽실 안개구름 이불 덮은 산들 온다
백로 한 쌍 산책하는 호수가 온다
훅훅 배추밭 거름냄새 지나간다
벚나무 가로수 둥치 매미소리 지나간다
일어서던 불면의 앙금들 휙휙 지나간다
달맞이꽃 지나고 마타리꽃 온다


인생 바다 노 젓던 팔로 핸들 누르고
힘들다 빈 깡통 후려 차던 발로
사뿐사뿐 작은 페달 밟는다
돌고 돌며 둥글어가는 세상
구겨진 길을 펴면서 나간다
언덕을 만나면 언덕에 절하며
한 무리 바퀴들이 하늘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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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음표


생각이 많아지면
말도 잠도 끊어지는 걸까
너무 하다 너무 하다
백지 위에 펜 잡고 씨름하다
결국 멈추고 말았을 큰 물음표 하나


사람에게 받은 상처
조직의 쓴맛 단맛 다 알만한 나이에
무엇을 위해 팽개칠 수 있는 걸까
자존감 책임감 사명감
그럴듯한 말 다 대보아도
결국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


알 수 없어서
알고 싶지 않아서
같은 하늘 아래
책임 없는 건 아니기에
버리고 떨쳐내지 못한 미안함 측은함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까마득히 흘러라 시간의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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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사람


환한 사람 되고 싶다
어둠 탓이 아니라 스스로 환한
단아하며 은근히 밝아
움직이는 모든 것 모여들게 하는
그런 사람 만나 닮아가고 싶다


화난 사람 세상에 너무 많아
전화 받기 겁나고 마주치기 싫어
가만 앉아 입 닫고 귀 막고 살 수도 없고
환한데서 환하게 안 되니 화가 났는지
샛길 찾고 빈틈 노려 찌르는 사람들


환한 사람 만나고 싶다
반갑습니다 환하게 인사하며
환한 웃음 꽃 피우는 사람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일을 해도
조용하게 은근하게 빛나는 사람
그런 사람 모여 사는
그런 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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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세 살 때인가
경기로 깨어나지 못해
십리길 찾아간 침쟁이도 포기하여
날 새면 묻으려고 비탄 잠겨 있을 때
밤을 도와 찾아든 체 장수가 건진 목숨
저렇게 용해빠져 어찌 세상 살겠느냐
걱정 참 많았다는데
가슴 복판에 눈물 많은 나무 한 그루
머리는 북두에 얹고 팔은 바다를 안고
늘 쏘다니는 바람을 꿈꾸는 사내
강물처럼 말랑말랑 훨 훨
흐르다 흐르다 노래가 될런지
두드리다 두드리다 원숭이가 될는지
결국 아무에게도 짐은 되지 말아야지
불면 부는 대로 날아가다가
사라진 바람결에 냄새라도 남건 말건
거울 속에 안경 쓴 크단 눈 하나
호기심 그득한 눈망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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