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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내가 나에게' 외 / 이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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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09회 작성일 16-02-1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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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연세가 어떻게 되우? 38년 무인생이요.
아직도 시를 쓰고 있는가? 쓰고 있네.
누가 읽는가? 그건 모르겠네.
왜 쓰는 거지? 그 이유를 내게 좀 일러주오.
밥벌이가 되오? 확실히 말하지만 안 되오.
세상에 정신 나간 사람 예도 있군.
고개 끄덕이면 되는 거죠?
묻는 이나 대답하는 이나 그저 웃읍시다.
웃움보다 더 좋은 건 이 세상에 없다네.
웃음치료 효과가 시보다 윗길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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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날 길에 버리면 누가 주워 갈까
글 잘 쓰고 예쁜 아기 낳던 여자인데
지은 죄 신(神)께 회개하고 회개해서
깨끗한 그릇인데 누구 주워 갈 사람 없을까
인파 속에서 거리를 걷는다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데 바람은 왜 등 떠미나
꽃들은 왜 웃음지어 보이고
새들은 왜 어깨 위에서 노래 불러주나
누군가 주워 가 독차지 하기에는
아까운 당신이라고 말하는 중인지 몰라
꿈꾸는 시간은 내 소유의 전 재산
그말 받아 내가 나에게 위로의 말로
누군가 주워 가 독차지 하기에는
아까운 당신이라고 전언(傳言)한다
바람이 하하 웃는지 옷자락이 펄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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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저냥 그럭저럭


그저 그래요
그냥저냥 그럭저럭 살아요
어떻게 사냐고 묻지 마세요
속 터지는 소리 다 못 뱉어요


좋은 소식 전할 것 없으니 할 말 없잖아요


그쪽도 그냥 해보는 소리
우리 집 오래된 병고우환(病故憂患)
생노병사(生老病死) 책임질 거 아니잖아요


집전화기는 같은 말만 입력 되었을 거에요
묻는 이 답하는 이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
기왕에 삶이 딱 부러지는게 아니니
그저 그렇게 그냥저냥 그럭저럭 산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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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살찌고 있었다


그립고 그리워서
뼛속 깊이 그리워서
낙엽처럼 한바람에 날아갈 것 알면서
떠난 것 무어라도 당겨보고 싶어서
약속 만들고 찾아간 날
오늘은 사정 있어 문 닫는다는 팻말
골라 잡은 날의 배신이 기막혀 웃음 날렸다
그리움만으로 살라고 운명이 이르는 말 같았다
당겨보고 싶었던 사람 비켜가라는
팻말이 하는 말 들으며
그리움 한 벌 더 껴입고 돌아왔다
슬픔이 살쪄 있었다
바람 한 겹이 품속으로 들어왔다
바람이 살찌고 있었다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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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흔적


마음 솔솔 새어나가 너에게 들켰다
결심 솔솔 새더니 하던 일 멈췄다


침묵 새어나간 세상 시끄럼으로 가득하다
비밀 새어나간 길 사람들이 머리채 잡는다


새는 것들만 보며 사니 지붕이 샌다
통째로 샐 때 공기들이 찰과상을 입었다


문 잠궜어도 새어나가 새는 것들 뿐이다
새는 것들 새어나가는 시간 사이
하염없이 날이 샌다 아까운 새 날이 샌다


나는 사랑이란 이름 사이로 샌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어 놓은 참혹한 흔적이다


지금도 무언가 새고 있다
왜 새는 것들은 죽음 쪽으로 즐겨 찾는 길처럼
방향 잡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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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사랑


배춧속을 뜯어먹다 보면
푸른 초원이 보이고


푸른 길로 이어진 타히티 섬이
떠오르고
원주민 사이에 앉은 고갱을 만난다


오늘 내 밥상 위에서
뜯어먹는 배추고갱이 속에
위대한 고갱이 앉아 있다


나도 모르게
모든 고갱을 사랑한다는 사실
오늘 확실히 내게 도장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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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눈을 가진 사람


소실점 넘어 영원에 빛이 닿는
아 그 사람 먼 눈
주변의 강물이 범람한다


왜 먼 눈은 별이 되는가
빛이 멀리 날아와 반짝이듯
그 사람 먼 눈 꺼지지 않는다


시간들이 초가지붕
볏집속으로 숨은 뒤에도
삶이 뭐냐 죽음이 뭐냐고


해답 없는 질문으로 공기를 흔드는
그 사람
말없이 말하는 먼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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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에 내사랑은


진실이 꼭 진주 되는 것 아니지만
가끔 진실이 진주 될 때 있어
영롱한 사리로 불어나 빛을 낸다네


오후 창앞에 졸던 고양이 잠깨듯
봄물결 사랑의 파도로 일렁인다네


긴 봄날 먼 산에 우는 뻐꾸기는
마음의 굴곡 따라 고독에 빛을 입히고


산길의 하루에서 영원과 말동무하며
적막으로 흐르는 시간을 가락으로 빚네


귀 밝은 이 먼저 듣고 손안에 쥐어
봄물결 속 초록으로 비취를 만들지만


그 이름 사랑이라도 이젠 오지 마라
내 가진 좋은 것 꺼내 줄 것 없구나


빼곡히 싸놓은 나이 뿐인 곳
남의 동네 소식이듯 봄날은 그저 스쳐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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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여행


주머니에 모인 동전들
빈 수레 타고 가듯 짤랑거린다
십 원짜리 동전은 길에 떨어져도 줍지 않아
사랑한다면서 자기 켠으로
끌어당기는 이 없는 나와 닮은 얼굴
길에 버려진 채 하늘 보기를 좋아한다
가난한 집에 식구 많듯
식구만이 가난을 떠메고 가는 힘이 되듯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며 모여 앉은
동전의 힘으로 오늘 내 발걸음은 가볍다
웰빙 댄스 초급반에서 배운
지터벅 육박자 스텝을 밟으며
좌로 한 바퀴 돌고 우로 두 바퀴 돌며 간다
신나게 가볍게 세상의 도랑을 건너 뛴다
삭막한 도회지 한복판에
음악을 뿌리며 가는
동전 악기들의 연주 짤랑 짤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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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의 고독


내 얼굴은 내 마음의 자동 캔버스다
숨기고 싶은 그림까지 저절로 그려져
비밀이 남김 없이 누설된다
사람들 제 치수에 맞춰 가늠자 꺼내 든다
슬픈 이들은 불행이라 읽고 가고
기쁜 이들은 행복이라 읊고 간다
그때마다 캔버스는 간지럼 탄다
캔버스 앞에서 오래 서성이지 않는 그들
피카소의 그림이면 낙서라도 주워갔을 텐데
읽는 이가 없을 때의 내 표정은
어둔 밤처럼 삭제되고 만다
힘겨운 목 쳐들고 연기 하지 않아도 된다
혼자 누리는 자유 속에
고독이 심지 박혀 있는
무표정이 말하는 참뜻을 그대 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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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바다


삼킨 것들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다
실컷 먹고도 배부름 나타내지 않는 바다
언제나 태초로 태어나는 바다
새로운 시간만이 서식할 수 있는 바다
수평선을 박차고 떠오르는 태양은
잉태로 몸이 부풀고
새 아침 새 얼굴엔 후광이 띠 둘렀다
파도 밀려 오고 밀려 가는 바다에서
이기(利己)로 뭉쳐 오염된 소망은 부서진다
고깃배도 크르즈 뱃길도 사라진다
흔적을 삼키며 새 피륙 펼치는 바다
농아의 수화처럼 시늉으로 말하는 가슴을
안개조차 발 디디지 못하고 걷혀 간다
파란 하늘이 거울 되어 떠 있다
바다는 태초로 돌아가길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