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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2015년 시 - '아픔은 눈이 되리' 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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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1,421회 작성일 16-02-1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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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만]


긴 여정이 끝나는 해, 사십 여년 공직생활을 마치는 해다. 새로운 길을 떠나는 마음으로 신들메를 한다. 지난 여름 내 윤홍렬 선생님 유고 작품집 만드느라고 회원들이 애 많이 썼다. 무엇보다도 같이 문학하는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여러 회원들이 시집을 내는 틈에 끼어 나도 정리 중이다. 갈뫼가 나올 즈음 나올 것이다. 내년에는 좀 더 시 쓰는데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바깥 날씨가 참 좋은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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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눈이 되리


혼자 아픈 너에게
아프지 않은 내가 전하는 말은
위로가 되기 힘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늘 우리는 이렇게 대책 없이 살고 있다.
너에게 할 위로의 말을 잘 챙기지 못하고
너를 지켜보고 있는 너의 당신에게
힘이 날 몇 개의 낱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그저 바깥을 바라본다.


오늘은 운동장 가득 눈이 왔다.
어쩌면 아픈 것도 눈처럼 쌓였다가
내일 아침볕에는 스르륵 녹을 거라고.


지금은 조금 차갑고, 불편하지만
눈이 내린 자리에는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필 거라고
겨우 이런 말로 너를 달래려하는 나의 작은 마음을


너와 나의
소통으로 믿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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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딱지 논


별빛 내려앉고
개구리들 모여 앉을 만한 자리
한 평이면 어떤가, 두 평인들 어떤가.


코딱지 논에서는 올해도 벼가 자라네.


벼가 이삭을 빼어 놓으니 메뚜기 뛰고
뿌리 쪽에서는 우렁이들 꼼지락거리네.


이 작은 숨구멍이 세상으로 토해 내는
힘이라니.


바람을 세우는 것도
주저앉히는 것도
코딱지 힘이라네.


태어난 것도
살아가는 것도
그 힘 작은 숨구멍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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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잠깐 볕이 들었습니다.
싸라기 한줌 움켜쥐어
마당에 뿌려 놓으니 새들이 날아와 열심히 쪼아 먹습니다.


밭으로 나가니 몇 마리는 그곳까지도 쫓아와
고랑에 뿌려 놓은 들깨씨도 뒤적거려 쪼아 먹는 것입니다.


마당과 밭을 구분 못하는 새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 녀석들 지나치게 야속해 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싸라기 한 줌만 한 마음
장마 속에서 상하고 냄새가 나는데
누가 반긴다고 세상에 뿌려 놓고
선행으로 보아 달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비가 내린다지요.
마당에 서서 해야 할 일은
눅눅한 마음 여우볕에 말리는 일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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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지르기


이름도 예쁜 태풍 지나고 나니
들깨밭이 어지럽다.


훤칠하게 자랐던 깻대가
한밭 가득 이리저리 큰 대자로 누웠다.


어찌해 볼 양으로
세우려드니 요지부동이다.
매운 향기 토하며 차라리 부러지고 만다.


순지르기를 했어야 했다.
제때에 자르지 못한 죄다.
바람에 맞설 만큼만 키웠어야 했다.


한해 깨 농사 망친
패전 장수다.


태풍 지나간 하늘 보며 웃었다.
그 누구도 웃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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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기


낡은 단독주택에 살다 보면
‘손 볼 데가 많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물받이를 교체하고 나면
방충망을 손봐야 하고
벌어진 보도블록 사이엔 모래도 채워야 한다.


나이 들어가는 몸도 그렇다.
허술하게 여닫히는 눈물샘
조절기가 제멋대로인 배뇨관
조이고 맞춰야 한다.


몇 년째 열어보지도 못한
창고 정리도 해야 한다.
파일 속에 갇혀 있는 저 숱한 장작엔
언제 불 지피려나.


문득 시원한 바람 한 줄기
불러본지 오래된 설렘이라는 창도
가끔은 닦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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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봉신청


상봉신청을 하는 사람들
마음은 하나다.


만나고 싶다 보다
만나야 한다가 먼저다.


이유가 맑다.
너무 맑아서 다 보인다.


이 다 보이는 마음
뙤약볕에도 거둬들이지 않던
아비는 떠났다.


맨드라미 진자리
더 붉은 맨드라미 핀다.


딸이 다시 상봉신청을 한다.
그 이유도 하나다.
둘러대지 않아도 다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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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의 법칙


온 여름내 한 단 올렸네.
가파른 벼랑에 길을 내는 일
바닥을 다지고 한발 올려 딛을 만한 곳을
평평하게 만들어 내는 일.


의욕의 힘으로
반은 생흙을 허물어 내고
의심을 접어
반은 주저앉는 흙으로 받침을 하여
딛어도 허물어지지 않을 계단 내는 일.


올려다보는 만큼 손을 보내고
다가오는 마음 손잡아보자고
오르락내리락 거릴 길을 트네.


숨이 차면 잠시 쉬다가
다시 발 딛고 갈 단 하나 내는 일
한 단씩만 만들고 한 걸음씩 가야 하는
계단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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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화법


독수리화법으로
두 개의 말이 갈기를 세울 때
여덟 마리의 말은 마음 졸인다.


타타탁 트트특 토토톡
잘 나가는가 싶다가도
어김없이 드드득 드드득 백스페이스.


그렇다.
뾰족한 화법의 말은
자기 가슴을 치고 뛰어나간다.
다른 놈들은 얼굴 벌게지고.


새끼손가락의 엔터키는
쉬어가라 하는데
어쩌겠는가, 지우기도 되돌리기도 안되는
독수리화법.


뾰족한 손가락 말을 잘 길들여 볼 일
달리고 싶은 말들 함께 뛰어보게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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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집 만들기


마침표는 멀고 쉼표만 잦아
숨차게 좇아가다가 주저앉으니
그 자리에선 그저 쉬라 한다.
느낌표 하나 떨어진다.
누군가 ‘아! 그렇네.’했다.


그랬다.
갈매기가 날아올랐다.
억센 사내의 가슴에 둥지를 틀고 싶은 갈매기
그 갈매기가 예뻐 우선은 ‘갈매기집’이라 붙였다.


함경도 무산 땅에서 시작한 강물
큰 숨 몰아쉬며 크게 꿈틀 흘렀다.
‘역풍은 불어도 강물은 흐른다’가 맞다.
두 번째 이름이다.


평소 욕심 없던 당신
‘쓸데없는 짓!’소리친다.
그렇게 했으리라.
허락받지 못한 일이니 그저 죄송하다.
진짜 죄송한 건 늦은 일이다.


갈뫼 산 훌훌 날아다니던
왕 제왕나비의 비행 암호를
해독하는 일이다.


* 윤홍렬 선생님의 유고작품집(2015년 1주기에)을 발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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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수도를 잠갔다.
석자 깊이 땅 속
항온이 유지되는 그곳에
거꾸로 엎드려 팔 넣고
왼쪽으로 여남은 번 돌려서 꾹 막았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에도
덧문을 달고
뿌리 얼면 상할 것들은
모조리 캐 들인다.


추위기운이 나면 잠가지는 문
이런 편리한 죄임쇠는
내 눈과 머리와 가슴에도 달렸다.


바깥이 추워지면
눈감고, 귀 막고
모두는 월동중인 동네.


개 한 마리만 유유자적이다.